*빚진 자 : 죄는 빚이다. 다른 것 아닌 절대적으로 옳으신 한 분 앞에 쌓아놓은 나의 빚이다. 만약 그러한 분이 없다면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그저 사람 사이에서 실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라. 엉망진창, 온갖 허망한 것으로 채워져, 내 몸 조차 제대로 다스릴 수 없는 병듦이 보이지 않는가. 인간은 중심이 뒤틀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중심은 마음이다. 영혼의 좌소. 시간 속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의 국면들이 통과하는 중심.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뒤틀리니, 인간도 세상도 뒤틀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곱추의 등뼈가 교정되듯, 삐뚤어진 중심이 교정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이전에 살아왔던 죄의 과거는 없어질 수 없다. 과거의 사건은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도록 시간 속에 갇혀있으니까. 폴 틸리히는 "용서는 잊을 수 없는 것 잊는 것"이라 말했다. 이게 사람에게 가능한 일인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인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구성한다. 우리의 맘도 그렇고 몸도 그렇다. 그런데 이전의 부채를 쌓던 과거와 무관한 현재를 사는 것이 가능한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제' 허리를 펴고 제대로 걷는다. 더이상 인격에 삐뚤어짐의 부채를 쌓지 않는다. 새로운 걸음. 가벼운 걸음.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을 '빚진 자'라 부른다. 왜냐하면 '자신의 허리를 짓누르던 그 빚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게 선 허리를 볼 때마다 그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몸으로, 살몸 따라 산다면 곧 죽을 것입니다 : 말이 재미있지 않은가? '살'몸을 따라 살면 '살'지 못한다. 몸은 살고자 하나 그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 살몸을 살게 하고자 먹이고 입히지만, 결국 이 몸은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모든 것들 벗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비참한 순환이다. 인간은 죽임과 죽음의 차륜 속으로 들어왔다. 그 속에서 모두가 살기 위해서 살몸을 따라 살지만, 모두 죽음으로 돌아간다. 살몸을 따라 사는 것은, 그 무지막지한 차륜 속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러한 죽임과 죽음의 순환 속에 들어온 것인가? 이러한 순환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지구의 시작이 이 차륜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차륜이 영원하고 신비한 질서는 더더욱 아니다.
창세기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지점이다. 인간의 인격이 삐뚤어지고 난 이후, 그 때부터 이 차륜은 돌기 시작했다. 먹음(식물과 동물을 죽임)으로 자기 항상성을 유지하게 되었고, 먹힘(자신의 죽음)으로 다시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했다. 이 차륜 돌아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심판이다.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거절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던 에덴에서 쫓겨났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나 하나님을 거절하고 살몸의 욕구를 따라갔던 것이다. 인격은 살몸을 다스리는 관제탑이지, 살몸에 끌려가는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은 하나님을 버리고 살몸 아래 꿇었다. 이에 대한 심판이 살몸에 이뤄진다. 곧 죽음이다.
둘은 인간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인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는데, 인간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해보라. <웜바디스>라는 영화에 보면 '보니'가 등장한다. 사람이 좀비가 되고, 그 좀비는 끝내 자신의 얼굴 가죽을 다 뜯어먹고 보니가 된다. 인격을 잃어버린 채 순수한 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는다. 즉 죽음은 인격의 망가짐에 걸린 최후 브레이크인 것.
눈여겨 볼 것은, 성경은 '살몸으로 사는 삶'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몸따라 사는 것'을 죽는다라 말하는 것이지, '살몸으로' 사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살몸으로 산다. 살몸 없이 사는 이가 어디있나. 살몸으로 사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물질과 비물질을 나누고 그것에 차등을 두어, 비물질이 물질보다 중요하다는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아시아 자연 종교들에서 발견된다. 저 차륜에서 생각을 시작하면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다. 죽임과 죽음의 순환에서 벗어나고자 살몸 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 죽음의 차륜은 인격의 삐뚤어짐으로 시작된 것이지 물질의 근본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은 올바른 뜻에 아래서 선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몸처럼 말이다. 버릴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서 쓸 것이다.
[2]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아왔을 때, 그것은 살몸에 저당잡힌 인격을 건져내는, 하나님의 교육이었다. 그 교육의 목적은 살몸보다 더 크신 이가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보다 더 중요한 한 분,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한다. 살몸보다 크신 이가 삶을 삶답게 인도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살몸을 주신 하나님보다 살몸을 따르는데 더 익숙했다. 인격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살몸이 익숙한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 다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건져내시며 하셨던 말씀이 있다. "이스라엘, 너는 내 맏아들이다!"(출 4:13). 그 아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듣고자 하셨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빠, 아버지!" 아니었을까? 그 시절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왕이 아닌 것을 왕으로 섬기며 참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완전한 출애굽. 그 결과로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을 받게 되었다. 그 인격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외친다. "아빠, 아버지!" 이 고백, 이 관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살몸들이 스러져 갔던가? 살몸이 살몸으로 돌고 돌아 또다른 살몸을 만들고, 그 안에 새로운 인격이 부어지고 부어져 오늘날까지 역사는 이어져왔다. 그리고 이 역사의 맨 끝자락에서 내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른다. 그리고 살몸을 제자리에 놓는다.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멍에를 매고 참주인의 일에 섬겨야할 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3] 아들은 상속자다. 그리스도도 아들이요, 나도 아들이다. 류영모 선생은 예수를 효자라 보았다. 효자는 아버지를 위해 고난받는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신을 헌신, 즉 살몸을 내어놓는다. 그 아들은 상속을 받는다. 아들 중에 아들인 예수는 이미 상속을 받으셨다. 곧 새로운 인격의 거처와 세상을 상속 받으셨다.
그리고 이제 우리 차례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 살몸 내어놓아 우리 역시 예수께서 받으신 그 상속에 참여하는 일이 남았다. 우리는 이어지는 로마서 8장 속에서 두 가지 질문을 구체화해야 한다. 하나는 아버지 뜻은 무엇인가? 둘은 무엇을 상속받는가? 이것에 대해서 바울이 이제 이야기할 것이다. 원경선 선생이 말하기를, 성경에서 한권을 추린다면 로마서요, 그 로마서에서도 한 장을 추린다면 단연 8장이라 했다. 그 8장이다. 로마서는 이제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그 분의 뜻과 아들의 상속.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걷히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