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道). 왜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이라 했을까? 예수께서도 "나는 길이다" 하셨다. 길은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있다. 그럼 그 도에 있어서 무엇이 출발이고, 무엇이 끝일까.
출발은 '나'다.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희랍에도 '퓨시스'라는 단어가 있고, 동양에도 性이란 글자가 있다.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인간에게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다른 생물과는 다른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본성의 끝은 어디인가. 그 본성을 주신 이다. 즉 나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 이른다. 삐뚤어짐에서 시작하여 올곧음으로 아버지께 닿는다. 아버지를 만나고자! 이 과정이 길(道)이다.
그런데 그 길은 텅 비어 있다. 마치 가운데가 뻥뚫린 피리와 같다. 그 어떤 것도 그 속을 채워 막아선 안되며, 그럴수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허탄한 시도에 멈춤이 없다. 돈이든, 쾌락이든, 자아성취든, 무언가로 인간은 자꾸 그 길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바로 뚫린 길'이다. 신의 호흡으로 소리가 나는 피리다. 따라서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수도, 막을 수도 없다. 오히려 만물이 그 구멍으로부터 나왔기에 끝이 없이 깊고 넓은 구멍이다.
만물의 근본이라 써놓은 글자는 '宗'이다. 우리말 '마루'는 '가장 높음, 가장 근본됨'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종교는 가장 높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다. 이 '도'라는 길이 가장 높고 근본이 되시는 분이 놓고 닦으신 길이기 때문에 宗이다. "깊고도 넓고도♪"
[2] 그 도는 날카롭지 않다(挫基銳). 오늘날은 날카로운 것이 미덕인 시대다. 뭔가를 찌르고 쪼개고 자르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이것 저것을 나누는 상대적 지식을 추구한다. 곧 분별지(分別知)다. 이 분화된 사회 속에서 우스개소리로 '바퀴벌레 앞다리 박사님'도 있다 하잖나. 그러나 도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도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파벌을 조성하며 엉겨있던 것들이 그 도로 인해 풀린다(解基紛). 또한 도는 마치 온누리를 비추는 빛과 조화를 이루어, 빛을 따라 그 도가 닿지 않는 곳이 없다(和基光). 그 빛이 닿는 곳에서는 어둠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 도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쌓였던 구석 구석까지 미친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함께 하지 않으려 손사래를 치는 먼지같은 이들과 하나가 되어버린다(同基塵).
그렇기 때문에 맑다. 모든 것을 찌르지 않고 감싸서, 가장 미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되게 하는 그 도는 투명하게 맑다. 맑으니 감춤이 없다. 그 속이 뻥 뚤려있는데 무엇을 감추겠는가? 그 속에 모든 것을 담아 하나되게 하면서도, 그 속은 넣어도 넣어도 끝이 없다. 시간을 담고, 공간을 담는다. 온 세상을 담아낸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3] 그런데 노자는 그 도를 '아들'이라 부른다. 그 도가 인격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따를 본(本)이기에 인격이다. 그런데 그 아비를 알 수 없는 아들이다. 왜냐하면 핏줄의 아비를 통해 나는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마치 바람과 같이 난다. 어디로부터 나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도'가 김씨성을 가진 아버지를 두었어도, 그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도는 성씨 따라 나는 것이 아니라, 바람 따라 난다. 그럼 도는 누구의 아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