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상대적인 것이다. 한 분을 부르는 다양한 이름이 있듯, 하나에 다양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 중 어떤 이름도 절대적일(常) 수 없다. 그 이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붙어진 그 존재가 절대적인 것이다. 고로 이름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다. 글자던 그림이던 다 우상숭배요, 사람 짜먹으려는 일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글자는 죽이는 것이요, (글자가 가리키는 실체인) 영은 살리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글자에 머물면 죽는다. 우상숭배는 자신을 파멸시킨다. 글자와 그림. 곧 상대적으로 이름붙인 것을 넘어서야 한다. 노자는 말하는 것이다. "옳다는 길, 옳다는 말을 넘어서라. 실체에 닿아라"
그 실체는 이름이 없다. 이 이름없음(이것도 또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다)에서 우주가 창조되었다. 하나님을 어찌 부를 수 있을까? 누가 감히 그 분께 이름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름은 다스리는 자가 다스림 받는 이에게 붙여주는 것이다. 할이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주듯,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듯 말이다. 하나님에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는 '아버지'라 부를 뿐이다. 그렇다고 그 분이 아버지만이시냐, 그 분은 아버지를 넘어서는 아버지시다. 세상 작은 하나도 언어로 규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분이랴.
비로소 始를 '창조'라 풀었다. '비로소'는 일의 되어짐, 즉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존재가 비로소 존재하게 된 그 결과. 그 결과를 무어라 말할 것인가? 없음으로부터 있게 되었고, 이것을 창조라 부른다. 요새는 진화와 싸우는 전투적 용어가 되었지만,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니니까. 비롯된 모든 것.
'천지'는 '우주'로 풀었다. 하늘과 땅으로 온 세계, 온 우주를 설명하는 유대인의 세계관과 같다.
그런데 그 분을 부를라니까, 만물을 창조하시는 이라는 의미로, '만물의 어머니'라 이름 붙인다는 말이다. 분명한 존재가 있어 부르긴 해야겠는데, 이름을 붙일 수 없으니 자의적으로 '만물의 어머니'라 불러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조차 중요하지 않다.
그럼 이름이 중요하지 않으면, 무엇을 생각해볼까. 속성이다. 곧 '그 분은 어떠한 분이시냐?' 어디서 끊어 읽느냐가 관건인데, 無를 常에 붙이느냐, 欲에 붙이느냐이다. 노자가 첫줄에서 언급했듯, 常은 이름붙이기로 만족시킬 수 없는 신의 속성이다. '늘', '항상', '영원함'. 그런데 그 상(常)을 또 있고 없고(無)와 연결시키면 안된다. 欲에 붙여야지. 절대적 차원이 없다 말하면 되겠는가?
欲이 있는 것은 움직임이요, 欲이 없는 것은 멈춤이다.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며 기묘하게 만물을 운행하는 그 무엇.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하는 에로스와 같다. 희랍 사람들이 에로스라 이름붙인 것을, 노자는 만물의 어머니라 부른다. 그것은 움직임으로도 말할 수 없고, 멈춤으로도 말할 수 없다. 예컨데, 말로 다 할 수 없고 침묵도 있으며, 음표로 다 할 수 없고 쉼표도 있다. 그 분은 말이자 침묵이며, 음표이자 침묵이다. 그 분은 말하기도 하고 침묵히기도 하시니까, 말씀하시는 인격이라 하겠다. 그 분은 음도있고 쉼도 있으시니 조화로운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 하겠다. 그래, 노래하시는 인격이라 하자.
기묘하다. 쉼표는 없으나 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나 분명한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기묘하지 않은가?
돌아간다. 움직임이 모두 질서에 따라 소리낸다. 그렇게 모두 각각의 화음을 내다가 한 가지로 돌아가지 않는가?
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이 '쉼표(이렇게 부르자)'와 만물의 내는 소리는 한 가지, 한 노래다. 만물이 소리를 내고 영원한 쉼표로 돌아간다. 노자의 말대로라면, 이 노래는 '아득히 검고 검음(玄)', 끊임없이 음과 쉼의 노래소리가 드나나는 한 구멍에서 나온다. 이를 뭐라 부르면 좋을까. 하나님은 몸이 없지만, 이렇게 이름 붙이겠다. 하나님의 입. 곧 玄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