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자는 1장에서 형이상학을 말했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세상의 모든 음표와 쉼표가 나오는 검은 구멍. 그 검은 구멍으로부터 나오는 옳음, 이른바 '이름할 수 없는 옳음'.
노자는 이어서 '하늘 아래' 일을 말한다. 형이하학이다. 상대계의 일이다. 신기한 것은, 노자는 <도덕경>의 시작을 '진선미'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제 '진'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은 '선'과 '미'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노자는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 다 안다고 말하는 '미'(美, 이쁨)는 참 미가 아니라한다. 그것은 '이미 삐뚤어진 것'이다. 삐뚤어졌다고 풀어놓은 것은 惡에 대한 번역이다. 이 글자의 자형은 틀어진 등뼈다. 등뼈는 몸의 중심인데 그 중심이 틀어지면 몸 전체에 문제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늘 아래 세계에 무언가 중심이 뒤틀려버렸기 때문에, 사람이 이쁘다 말하는 것은 참으로('진'에 걸맞는) 이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쁨(美)'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선'(善, 좋음)도 그러하다. 사람들이 좋은 게 좋다고 하는 그 좋음은 참 좋음이 아니다. 已(이미 이)를 썼다는 것을 주목해보라. '이미'는 라틴어로는 'iam'인데, 'already, now'의 의미다. 왜 노자는 사람들의 미와 선이 악하고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미'라는 시간 부사를 넣었을까. 무언가 과거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이 있었기에, 사람의 관점이 '이미' 타락해 버렸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2] 제대로 된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하늘 아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이 없다.
이름 있는 것이나(有) 이름 없는 것(無)이 서로 기대어 있다. 有無를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너무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노자는 형이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므로 有도 있는 것이고, 無도 있는 것이다. 다만 有無라 한 것은 이름의 차이인 것이다. 이점은 벌써 노자가 1장에 언급했던 것이다. 노자는 이름 붙이는 일을 언제나 앞 쪽에 둔다.
고된 삶과 쉬운 삶이 서로 기대어 이뤄진다. 難을 '고된 삶'이라 풀었다.
긴 것이든 짧은 것이든 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상대적 의미가 있는 것이고, 높음이든 낮음이든, 소리든 울림이든, 앞에 것이든 뒤에 것이든, 모두가 서로 기대어(相) 있다. 하늘 아래, 홀로 영원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씻어난 이'(聖人을 류영모 선생은 이리 풀더라. 참 좋다고 생각한다. 씻어서 깨끗하게 된 사람)는 하늘 아래 사람들과 다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쁘다 이름 붙인 것을 위(목적)로 하고, 자기가 좋다 이름붙인 것을 목적 삼으나, 씻어난 이는 이 상대적 가치들 중에 어느 것도 위로 두고 일하지 않는다. 그가 서 있는 자리가 '위(爲)함 없는 자리'. 상대적 가치들을 꿰뚫어 보는 자리. 절대의 눈으로 보는 자리다. 그래서 말 없이 행함만으로도 가르침에 이르는 자리.
[3]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경거망동 떠들지 않는다(辭).
자신이 만든 것에도 이름 붙여서 자기 소유 삼지 않는다(有).
무언가를 하고도(爲, 앞에서 '위함 없다'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고도' 그것이 상대적 가치임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에 눌러 앉아 덕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노자 당시 이러한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한 일에 기대어, 눌러앉는 사람들. '功'때문에 사는 사람들. 자아 성취가 전부인 사람들.
그러나 씻어난 이는 나그네다. 어딘가 눌러앉을 이유가 없다. 그가 가는 어느 곳이든 처무위(處無爲)이며, '하나님 집'이다. 그래서 어느 한 자리에 눌러앉을 필요도 없고, 어디론가 갈 이유도 없다. 모든 시간, 모든 장소. 절대의 차원에서 살기 때문에 그는 어디에 있으나 한 자리다. 노자의 말장난을 보라. '오직 불거불거(弗居,不去)' 한 군데 정착하지 않아 여기 저기 다녀도 그에게는 떠남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