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의 죽는 살몸 마저도 소생시키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거주 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1]
*살몸 : 살몸이 뜻하는 바는, "세상의 타락성과 멸망할 운명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단순히 영은 비물질이라 선하고, 몸은 물질이라 악하다는 영지주의식 이원론이 아니다. 살이 악하냐? 자기 살결 돌보느라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그 맘과 몸이 타락한 것 아니냐? 따라서 본문의 '살몸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세상의 타락성과 멸망할 운명을 공유하는 그 사람의 몸과 맘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임을 염두해야 한다.
*때문입니다 : 계속 어색하더라고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계속 붙인 것은, [1] 문장이 로마서 8장 3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문두에 '가르'가 계속 나온다) 즉 "살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숨결을 따르는 우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 것이다.
*생각이...죽음이요, 생각...생명이다 :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중요하다는 말로도 모자르다. 생각이 죽음과 생명을 결정한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가? 꺼져가는 살몸에 관한 일만 생각하는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의 숨결을 생각하는가?
*고요함 : '에이레네'라는 단어. 이전에 '싸움없음', '평화'라 번역하던 것을 이번엔 '고요함'이라 고쳐보았다. '싸움없음'이 에리에네의 외적인 모습이라면, 내적인 모습은 고요함이다. 마음의 안정이다. 하나님 영에 대한 생각은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화로운 고요함을 가져오는 것이다.
*아래 조화로이 : '휘포타쏘'. 개역성경에는 '굴복하다'로 되어 있다. '휘포'는 '아래', '타쏘'는 '질서있게 정리, 배열하다'이다. 살몸의 생각은 하나님과 맞선다.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살몸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소란과 분란을 일으킨다. '에이레네'가 없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의 영을 생각하면, 곧 마음안에서는 하나님과 나의 평화조약이 이뤄지고, 마음 안밖에서는 소란과 분란이 고요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영 안에서 '내 마음-내 몸-타인의 몸-타인의 생각'의 조화가 이뤄진다. 곧 전체의 에이레네, 세계 평화의 길. 하나님 영 안에서, 그 법 아래 모든 것이 조화로이.
[2]
*하나님의 숨 : '성령', '하나님의 영'.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숨님'. '당신 안에 하나님의 숨이 있다면, 당신은 그 숨 안에 있다' 이 말을 생각해보라. 숨이 내 안에 있는데, 내가 숨 안에 있다? 이 말은 공기를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우리는 호흡을 통해 공기를 내 속에 집어 넣는다. 그 공기가 내 안에 있다. 더불어 그 공기는 내 밖에도 있다. 내 안과 밖이 공기다. 그 공기로 호흡하며 생명이 유지된다.
하나님의 영이 이와같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 구석 구석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 숨결없이 창조된 세상은 한 부분도 없다. 존재하는 것중 그의 숨결 없는 사각지대는 없다. 그래서 성과 속의 경계는 무용한 것이다. 이 생각을 하면 범신론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에 대한 인지가 있는 것이다. 전체도 숨이고, 내 속도 숨이다. 그 한 숨의 오고감으로 생명이 유지된다. 그 숨결의 오고감을 멈춰선 안된다. 생각으로 영을 들이마시고, 고백과 실천으로 영을 내뿜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이 여기에 있다. 영들숨, 영날숨. 세상을 창조한 그 영을 마시고 뱉는 것. 살림살이.
그런데 만약 누군가 입과 코를 막고, 그 하나님 영을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인은 질식사다. 살몸만을 더욱 생각함이다. 타락과 멸망의 길에 들어섬이다. 숨을 끊어 자기의 맘과 몸을 망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눅 12:10, 개정)
교육은 생각을 바꿔주는 일, 곧 숨을 터주는 일이다. 하나님 숨으로 가르쳐야지, 숨 빼고 가르치면 살몸 위하는 것 밖에 안남는다.
[3]
[3]번 문장이 설명하는 상태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완전한 상태로 가는 중간 단계다. 죽음의 살몸 속에서, 산 인격으로 사는 것. 때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며 나와 타인에 대해서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이 중간 단계의 모습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의 단계를 생각해보자.
1) 인격도 죽고, 몸도 죽음
2) 인격이 살음, 허나 죽음의 몸 속에서 산 인격이 갈등을 일으킴
3) 산 인격에 걸맞는 새로운 차원의 몸이 주어짐
이것이 바울이 지금껏 설명한 단계들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1)에서 2)로 넘어갈 것이고, 2)는 우리의 세상살이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2)에서 그치지 않고 3)으로 갈 것을 분명히 보장한다.
[4]
마지막 문장의 '예수'와 '그리스도'의 대비를 잘 살펴보라. 예수 한 사람이 부활했다. 이 사건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냥 그 옛날 내가 가보지 못한 팔레스타인 어느 동네에서 한 청년이 살아났다는데,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예수라는 청년이 부활한 사건이 당신과도 분명히 관련이 있다. 그 관련을 보여주는 말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는 자'라는 말이고, 기름 부어졌다는 말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로 짜낸 해석의 틀이 가로축으로 있고, 그 가로축 위에 예수 한 사람의 부활 사건이 세로축으로 있다. 이 교차되는 역사의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교차점을 통해서 우리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의미를 본다. 사람의 아들 예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한 사람이 일어났으니, 우리도 모두 일어날 것이다. 기름 부어진 예수가 일어났으니, 숨결 부어진 우리도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이 곧 하나님 백성 전체의 부활이다. 이 모든 의미를 주관하는 것이 하나님의 숨이었다. 그러니 1) 숨을 들이 마시라. 2) 산 영으로 살몸을 지나, 3) 새로운 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쓰고나니 출애굽 얘기같다.
3. 제소리
11411日. 오늘 날 수는 신비롭다. 하나 하나가 죽는데, 하나 하나가 다시 난다.
살몸에 속한 맘과 몸이 곧 나 인데, 그러한 내가 죽으니 새맘과 새몸을 얻어 새로운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