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은 자신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관에 빠졌다고 말했다. 마음에는 삐뚤어짐이라는 괴물이 살고 있고, 이 괴물은 율법으로 옭아맬 수 있기는 커녕 율법을 집어 삼키어 점점 몸집을 불릴 뿐이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율법을 열심내어 연구하면 할수록, 그 마음에 율법에 반대되는 욕구가 점점 커지는 상황인 것이다. 역설이다. 세상의 빛이 되고자 말씀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자기 자신은 어둠에 휩싸인다. 이것이 바울이 처한 상황이자, 곧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
그런데 베풂이 있다. 이 말은 희랍어 '카리스'인데, 곧 '거저줌', '드러난 아름다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카리(감사), 카라(기쁨), 카리스마(선물) 같은 말들이 파생되었다. 게다가 이말은 '그리스도'와 라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카리스의 속격이 '카리스토스'인 것. '크리스토스'와 모음 하나 차이.
카리스나, 크리스토스나 X로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 교차다. 엇걸림이다. 거저주며,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감사가 터져나오고, 기쁜 그 순간에는 무언가가 교차되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카리스토스의 크리스토스'인 예수는 고로 '교(交)차인'이다. 그는 두 가지 차원을 하나로 묶는 가온이다. 두 가지 이질적인 것을 사귀게 하는 미지수 X 값인 것이다.
저 X가 인간의 역설을 어찌 풀어내는지 이제 바울이 이야기할 것이다.
[2] 인간의 곤경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나, 살몸으로는 삐뚤어진 죄의 법을 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섬기려하면 할수록, 살몸을 따라가는 그 삐뚤어짐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려 하는 나를 집어삼킨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잖나? 다른 말로 바꾸면, 이론과 실천이 다르다는 말이고,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단 말이다. 사람이 말한대로 못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인간이 처한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절망이라는 것이다. 생각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다가 하다가 죽는다. 끝내 생각한 바와 다른 자신과 세상을 처절히 느끼면서.
우선 그는 결론부터 내린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미래에 최종적으로 벌어질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과 '성령'에 관한 내용이 상술된다. 그 내용은 [3]에서 다루기로 하고, 어쨌거나 결과부터 확인해보자.
결과는 해방이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 삐뚤어짐의 법으로부터, 죽음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삐뚤어짐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은 인격의 삐뚤어짐이 교정되어 다시 하나님과 올곧이 연결되었다는 말이고, 죽음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은 부활이다. 곧 죽음이 더이상 옳은 생각을 현실에 구현하는 일에 방해될 수 없다는 말이다.
[3] 왜 '예수 그리스도 안'이냐? 하나님께서 그 예수의 살몸에 모든 인류의 죄를 교차시켰기 때문이다. 교차된 사형틀 위에서.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사실이다. 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는가? 왜 민중은 그에게 침을 뱉었으며, 왜 유대의 각기 파당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 모두 협력했으며, 왜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앞장 서서 로마에 고발했으며, 왜 로마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하나되었던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제국은 그 교차된 자리에서 그 실체를 드러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했던 개인도 틀렸고, 섬김이 아닌 지배에 중독된 지도자도 틀렸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이스라엘도 틀렸고,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평화를 구현해보겠다는 로마도 틀렸다. 모두가 자신들이 맞다고 했지만, 그들 모두가 모여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고서야 진실이 폭로되었다. 그들이 틀렸다. 예수가 옳았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러한 자리에 두셨다. 바울의 말대로, 예수의 살몸에 모든 삐뚤어짐이 모이게 하여, 한 번에 일소하기 위해서. 이것은 예수의 입장에서 부당한 처사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셨고, 하나님도 예수를 그러한 자리에 세우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당신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복수가 복수를 낳고, 이 복수가 개인의 일상을 넘어, 국가와 국가, 제국과 제국의 차원까지 확장된 그 정점에서, 예수 한 사람이 나타났고, 그의 부당한 죽음에 의해 세계가 뒤집혔다. 더이상 사람의 토대는 복수와 지배가 아니다. 용서와 섬김이다. 먹음보다 들음이 먼저고, 지배 아닌 섬김이며, 폭력 아닌 폭력 당함이다. 개체가 아닌 전체고, 곧 나 아니고 아버지다. 당신이 이것을 깨치고 살아간다면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 그 숨결은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당신의 인격은 고갈되는 목숨과 함께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숨을 쉰다. 7억번이면 끊어지는 목숨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숨쉬는 영원한 얼숨이다. 그래서 이 숨을 쉬는 이들은, 복수가 아닌 용서라는 새로운 토대 위에서, 예수의 모양으로 산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율법이 옳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말한대로 사는 것'이다. '이론과 조화된 실천'이다. '말과 삶의 일치됨'이다. 곧 진정한 인간다움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우리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자, 예수께서 살고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