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렇게 무책임한 소리를 들어본적이 있는가? 어떤 이가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쟤 잘못이에요"이렇게 말하는 건 얼마나 꼴뵈기 싫은가? 서로가 하나님도 아니면서 심판론 운운하는 정치판을 보는 느낌이다. 책임은 왜 전가해? 누가 누굴 심판해? 하기사 이건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오랜 전통이기도하다. "내 책임 아니에요."
허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문제있다는 선언이 두려운 것이요, 이러한 판단,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인류 보편의 성향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심판하시는 보편의 한 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지금 바울이 그러고 있다. 원치 않는 일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손가락을 잘 따라가보라. 그는 누구를 정죄하고 있는가. 삐뚤어짐이다. 삐뚤어짐을 정죄하기 위해서 손가락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자기 자신이다. 죄를 더욱 죄되게 한다. 죄를 감싸고 적극적으로 행하던 인격이, 이제 자기 속의 죄를 범인이라 지목한다. 죄와 인간의 긴밀한 파트너쉽은 깨졌다. 죄는 자신이 오랜세월 친밀하게 기생해왔던 숙주에게 정죄받는 기생충이 된 것이다.
[2] 바울의 생각을 좀 더 따라가보자. [2]번 문장에서 '하나님의 성품'이라 번역한 것은 '선'이라는 단어다. 그런데 '선'이라 하면 의미가 모호하다. 무엇이 선인가?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본래 선이라 번역된 '아가토스'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좋음'이다. 누구에게 좋은 것이 선인가? 너에게? 나에게? 아니다. 단 한 사람도 배제 않고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좋은 것이다. 선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좋으심이 살몸에는 없다. 이 '살몸'은 곧 육욕을 뜻하는 말이다. 내 몸하나 잘되길 바라는 맘에는 하나님의 좋으심이 없다. 개체만을 추구하는 것은 전체와 상관이 없다.
'온전'이라 풀어 본 말은 '칼로스'라는 단어다. 진, 선, 미를 모두 함께 통칭하는 말이다. 여기서 '진'이 '진리'요, '선'이 위에 설명한 '하나님의 좋음'이요, 미가 '아름다움'이다. 그러니까 '칼로스'는 큰 말이다. 모든 좋은 건 다 들어있는 말이다. 완전, 온전.
하나님의 성품이 맘에는 있다. 그 하나님의 좋음을 이루고픈 맘이 있다. 그런데 몸에는 없다. 그래서 맘과 몸이 충돌한다. 그래서 온전을 이루지 못한다. 이루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습관적으로' 행한다. 하나님의 좋음과 상관없는 악(특정 개인, 혹은 특정 사람들에게만 좋은 일이 악이다)이 일상에 뿌리깊게 박혀 있다.
[3] 그러나 바울은 다시 한 번 책임전가를 시전한다.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내 속의 삐뚤어짐의 책임이다. 삐뚤어짐과 살몸을 통해서 죄가 현실로 구현된 것이니, 그것들의 잘못이다. 그런데 바울이 정죄하고 있는 그것들은 곧 '나'의 구성요소 아닌가? 바울은 지금 자아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라. 바울이 '진정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삐뚤어짐과 살몸과 상관없는 나다. 그래야 위와 같은 책임전가가 가능한 것일테니까. 그러나 분명 현실속에서 바울은 이 삐뚤어짐과 살몸과 동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믿고 바라고 있다. 이 삐뚤어짐과 상관없는 맘이다. 살몸의 추구와 상관없는 몸이다. 이러한 맘과 몸의 나가 진정한 나다! 용서된 맘, 새로운 몸, 진정한 나!
'진정한 나'가 보장되었기에,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모든 책임이 이 속에 있소! 여기 내 삐뚤어짐에, 내 살몸에 책임을 물으시오! 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인류를 망친 근원이 내 속과 겉에 있소!
바울만 그러한가? 우리 각자 역시 삐뚤어짐과 살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손가락을 우리 자신에게 향해야 해. 인류가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인 그 근원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를 넘어서야 한다.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심판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용서된 맘, 새로운 몸. 하나님의 숨결이 증언하는 것을 믿고 따라와. 그 믿음 안에서 삐뚤어짐은 더이상 내가 아니고, 살몸의 추구도 내가 갈 길이 아니다.
게다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살몸에 채운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살몸과 삐뚤어짐이 개체로만의 책임이 아니라, 전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인류의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전체를 위해 살몸에 받으신 고난은 곧 내 살몸의 고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예수 뒤를 따르는 신인류였다. 바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진정 자신의 살몸을 전체의 고난을 위해 내어주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줄 알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나'에 대한 소식을 전하다가,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배가 뒤집혀 죽을 뻔한적도 있으며, 가장 극심한 태장을 세 번이나 당했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으며, 감옥에 갇히기를 수도 없었다. 동족인 유대인도, 비유대인들도 바울을 죽이고자 했다.(고린도후서 11장을 보라) 그러고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을 다 내어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전체를 위한 고난에 온통 내어주고나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자신을 온통 전체를 위한 고난에 내어주면서도, 이것이 정말 사랑인지, 아니면 자기 명예를 위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아분열이 아니다. 자아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인류를 그토록 괴롭혔던 삐뚤어짐과 살몸을 섬김과 고난으로 태워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물이다. 드려진다. 더러운 것은 남고, 정한 것만 남는다.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드러난다. 전에 알지 못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얻는다. 바울 서신서 전체가 그 증거.
[4] 바울은 전쟁의 그림을 가져온다. 온전을 바라는 마음과 싸우는 또다른 마음. 그런데 자기 자신이 이 싸움에 숱하게 졌다. '습관적으로' 졌다('프라쏘'라는 단어는 '습관적으로 행하다'). 그래서 자신이 삐뚤어짐의 법 아래로, 포로로 잡혀갔다고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이 '포로'를 언급할 때, 이것은 설명을 위한 은유가 아니다.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온 증언이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이집트를 시작으로,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이사, 그리스, 마케도니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제국들의 군홧발 밑에 언제나 굴종해야 했다. 구약성경은 이 기나긴 포로기 속에서도 온전을 추구하라는 역사의 요구와, 그 요구에 반응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포로기의 정점에 나타나 이 역사의 그림을 재해석 하셨다. 즉 사람에 의한 제국의 노예가 된 것이 본질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죄의 노예가 된 것이 포로기 역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지금 나를 짓밟는 로마인들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로마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내 속의 삐뚤어짐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요, 그러한 자유를 주는 것이 진정한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제자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포로기 역사의 끝판왕을 자기 마음에서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