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은 '엔톨레스'라는 단어를 쓴다. '엔텔로마이'(명하다, 위임하다)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파자하면, 엔+텔로스. 즉 '계명'은 목적에 부합한 명령을 뜻하는 말이다. 오는 시대, 새 시대의 삶의 방식이, 현시대에 미리 전달된 것이 계명이다.
넓게 생각할 수도 있다. 개역성경에서 '법'이라 풀어놨듯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모든 문화속에서의 윤리라고 이해해도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의 바람직한 이상향을 생각해며, '인간은 이래야돼. 저래야돼'라는 내용들은 다 좋은 내용들이다. 그리고 오는시대 속에서는, 저러한 당위들이 현실이다.(그래서 오는시대는 현재이자 미래다. 오늘이자 내일이다)
*탐심 : '에피뛰모스'. 욕망, 욕구.
*율법을 먹지 않으면 삐뚤어짐은 죽은 상태가 됩니다 : 이전 시간에 나는 이 삐뚤어짐(죄)을 인간 내면에 살고 있는 괴물이라 표현했다. 율법은 이 삐뚤어짐의 먹이가 된다. '무언가 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은 삐뚤어진 사람에게는 더욱 삐뚤어지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바울이 그 다음 문장에,"전에 율법을 떠나있을 때는 내가 산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삐뚤어짐에게 줄 먹이가 없는 세상이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노자. 장자의 세계가 이러한 세계다. 자연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고, 인간의 인위적인 제약들을 모두 치워버려서 내면의 죄악이 반응할만한 외부 요소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삶. 이러한 삶은 본인에게는 좋다. 그러나 '인위(人爲)'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있다 한들, 모두를 위한 삶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한 '인위'이기 때문이다.
외부 요소를 없애기 전에, 마음속의 삐뚤어짐을 해결해야 한다. 불교로 치면, '성불하라 말하지 말고, 본인이 먼저 성불해야 한다'. 당위를 말하는 인위적인 외부요소가 잔뜩있는 이 현실 속에서, 저 외부요소들을 틈타 욕심을 키우지 않도록 내면의 삐뚤어짐을 해결하는 방법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살만하지 않겠는가?
*죽은 상태 : '네크로스' '시체'에서 온 표현이다. 싸늘하게 식은 상태.
*즉 나를 참된 삶으로 이끄는 계명이 오히려 나를 죽게한 것입니다 : 역설이 아닌가. 계명은 참된 인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에는 삐뚤어짐이 있어서, 그 삐뚤어짐은 이 계명을 받아먹고서 더욱 삐뚤어진다. 참된 인간에 대해서 말해주는 계명에 의해 인간은 더욱 참됨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에게는 무슨 소리를 해도 삐뚤게 들린다. 무슨 좋은 소리를 해도 고깝게 들려서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를 어디 한 두번 보나? 금지명령에 끌리는 인간의 삐뚤어짐은 우리의 일상이다. 예컨데, "19금 비디오를 보지 마세요"라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술어는 사라지고 주체만 남는다. 그리고 오히려 저 금지명령이 19금 비디오를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난관에 빠졌다. 인간은 삐뚤어졌다. 그런데 삐뚤어진 인간에게 똑바로 하라고 외부에서 옳은 소리하는 것이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옳은 소리를 받아 먹고 더욱 다채롭게 삐뚤어진다. 각종 자의적인 근거들을 세우고, 삐뚤어진 자신을 지켜낸다.
*좋으신 하나님 닮았습니다 : '선한'의 번역어. 원어는 '아가토스'인데, 이 말은 이오니아 지방에서 온 말로, '헤가.데오스'에서 왔다. 헤가는 good. 데오스는 God. 우리말로 하면 '좋으신 하나님'(good과 God이 비슷한것도 눈여겨보라).
사람들은 언어 속에서 신의 존재를 지워가고 인간 감정으로 축소시킨다. 그래서 절대적 차원이 없어지고 상대적 차원만 남았다. '좋으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은 빠지고 '좋은'만 남아서, 우리는 아가토스를 사전에서 찾아 good이라 이해한다.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단어들이 그렇다. 과학발전이 급속하게 이뤄진 지난 200년의 생각의 프레임을 그대로 단어 사용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없고, 과학이 모든 것을 밝힐 수 있으며, 언어가 인간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 그 200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절에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생각.
'올'바른 언어사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근원과 연결된 언어사용이다. 하늘의 차원과 땅의 차원이 연결된 곧은 한 줄 속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명을 통해 삐뚤어짐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 본문에는 '함정에 빠뜨리다'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성경에는 '죄를 더욱 죄되게 한다'라 되어 있다. 삐뚤어짐을 인간 내면의 괴물로 본 것이 여기까지 이어졌다. 인간의 역설로 돌아가보자. 내면은 삐뚤어져 있어서, 그 삐뚤어진 인간에게 계명은 오히려 더욱 삐뚤어지는 계기가 된다. 내면의 삐뚤어짐과 외면의 소용없는 계명 사이에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계명을 주셨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계명을 주신 것. 목적은 무엇인가? 삐뚤어짐이 집어 삼켜서 인간을 더욱 망칠 것을 알고도, '글과 문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계명을 주면 줄수록 더욱 더 반대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이것은 충격적인 것이다. 말씀으로 온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무시된다니! 그 분의 율법과 계명은 삐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기준이다. 불변이다.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나 그 기준이고, 불변이고, 영원한 것이 거절된다.
그런데 이것이 그 괴물을 상대하는 신의 방식이다. 인간 속에 기생하며, 인간을 속이는 그것을 잡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자신의 말씀이 거절되는 수모를 감수하셨다. 그런데 이것이 방법이다(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것은 일종의 그물이다. 수모당하는 말씀만이 삐뚤어짐이 정말 삐뚤어졌음을 밝힌다.
그래서 모세 율법과 십계명이 그 일을 했다. 인간으로부터 온갖 거절과 수모를 당하면서 삐뚤어짐을 폭로했다. 그런데 폭로만으로는 안된다. 글과 문법만으로는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과 계율이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그 인격'을 가리키고 있던 글자들이 가고, 이제 '그 인격'이 왔다. 그리고 온갖 수모를 당한다. 부당하게. 삐뚤어짐을 드러내기 위함만이 아니다. 잡고자 함이다. 이제 다 잡았다.
3. 제소리
11404日. 홀로는 '하올로'에서 왔다(하의 'ㅏ'는 아래아). '하'는 수사다. 1. 올은 '올바름, 올곧음 '의 '올'이다. '올'은 하늘과 땅을 잇는 한 줄기다. 그래서 '한 올 한 올'. 하늘과 땅을 잇는 바름, 하늘과 땅을 잇는 곧음. 곧, 홀로는 '하나의 올바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