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써있는대로 지켜보려다 실패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이 반복되는 싸이클은 낡은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은 이렇게 해왔고, 모두가 글대로 사는데 실패했다.
*삐뚤어짐 : 삐뚤어짐 때문이다. 삐뚤어짐은 살몸안에 살고 있는 괴물이다. 글과 문법(율법)으로 묶어놓아도 그 사슬을 끊고 제멋대로 사람을 움직여간다. "우리 몸 구석구석에 힘을 발휘하여", 죽이는 일을 반복하게 한다. 나를 죽이고, 너를 죽인다. 모든 것을 먹으려 하는 괴물. 어떤 것도 그 삐뚤어짐을 결코 제어할 수 없다. 이 삐뚤어짐이 해결되지 않는 한, 글과 문법의 사슬은 언제나 미봉책일 뿐이다. 임시적일 뿐이다.
*율법 :그 임시적 글과 문법이 곧 율법이다. 바울은 이것이 우리의 옛남편이라 말한다. 우리는 이 남편과 관계하며 삐뚤어짐을 바로 잡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사랑과 영원을 약속했던 이 남편은, 여자의 삐뚤어짐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삐뚤어짐을 해결할수도 없으면서 오히려 여자를 붙잡고서 놔주질 않았다. 여자는 안으로는 삐뚤어짐에 의해 밖으로 글과 문법에 의해 조임살이 커졌다.
*남편 아래 있는 여인 : 지금이야 이런 표현을 쓰면 큰 일 나겠지만, 당시 사회적 정황을 고려한 번역이니 이해해야한다. 게다가 본문 해석의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표현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는 남편 아래서만 생계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남편의 형제가 부인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모세 율법이 이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비윤리가 아니라 복지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고대사회에서 남편이 없는 여자가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떄문이다. 그래서 당시 과부는 사회의 가장 빝바닥에 놓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살아있다면, 여자는 이혼을 요구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간음죄로 여겨졌다. '남편 아래 있는 여인'은 그러한 의미. 남자에게 묶인 몸이다.
바울은 이 '사랑과 전쟁'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사람을 얽매고 있는 글과 문법이 죽지 않으면, 이 여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 글과 문법이 죽으면 사람은 삐뚤어짐을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벌어진다.
*여러분도 율법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죽임 당했습니다 : 누가 죽었는가? 남편이 죽었는가? 이 구절은 어떠한가?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붙들어 놓았던 것 속에서 죽어버렸으니'. 남편이 죽지 않았다. 여자가 죽었다.
예수와 바울을 오해했던 이들은, 그들이 율법 폐기론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다고 말씀하셨고, 바울 역시 율법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율법 안에서 죽었다. 즉 바울의 이야기 방식대로 말하자면, 옛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아무도 죽지 않고, 여자가 죽고, 여자가 다시 산 것이다. 그래서 더이상 옛 남편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들은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말이다.
그럼 삐뚤어짐은 어찌 되겠는가? 여자의 부활은 살몸으로 부활할 것이 아니니, 살몸의 죽음과 함께 삐뚤어짐도 소멸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죽었다'의 의미) 그리고 이제 남자 아래 있던 여자는, 살아서 남자(글과 문법)을 지배한다. 글과 문법을 참으로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글이 당시 사회 상황 속에서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율법보다 큰 사람을 설명하기 위한 유비가, 죽었다 살아난 여자, 살아서 남자보다 위에선 여자라니!
*인격의 새로움 속에서 : 오늘 어휘 설명은 의도적으로 '글과 문법'에서 시작해서, '영의 새로움'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정리하면 이러하다. 인간의 삐뚤어짐. 이것을 위해 주어진 율법(글과 문법). 그러나 글과 문법은 삐뚤어짐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을 옭죄는 옛남편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죽고 산다. 삐뚤어짐을 해결하고, 율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율법이 약속한 바를 이루며 산다. 말과 글을 위에 서는 것이다.
그렇다. 말과 글 위에 선 것이 인격이어야 한다. 인격의 위치는 본래 거기다. 하나님 말씀하신 것을 잘 듣고 실천할 수 있을 위치가 인격의 위치이지, 삐뚤어짐과 말과 글에 종노릇 하는 인격이 참 인격 아니다.
여자가 이 참 새로운 인격을 받았다. 자기 속에서 삐뚤어짐 옆에 돋아난 한줄기 새로운 인격. 나와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인격, 그러나 내 속에 있는 나의 인격. 곧 신실함의 시작. 믿음. 이 인격이 그녀에게 부활의 미래를 보장한다. 삐뚤어짐과 싸우고, 남편을 이루며, 새롭게 사는 날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글자에 전전긍긍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자신을 고쳐보려는 낡은 방식과는 상관이 없다.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아직 살몸 속에 있기에, 삐뚤어짐도 남아 있다. 살몸의 소리 아래로 인격을 끌어 내리려는 힘을 느낀다. 그러나 삐뚤어지지 않고 인격을 붙들 수 있는 확실한 가능성, 완성으로 가는 자라남, 부활의 미래를 얻었다. 이제 미래로 달려간다.
그 인격을 따라, 이제 사회가 강요하는 글과 문법도, 삐뚤어짐도, 심지어 죽음도 그녀를 종삼지 못한다. 달려가는 그녀는 참 자유인이다.
3. 제소리
11403日. 하나의 인격을 따라 죽고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 이렇게 글과 문법 위에 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