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종이배들의 항해
우리는 지금 주기도문에 대해서 배우고 있죠. 그리고 여기에는 종이배들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해봅시다. 이 종이배들이 모여서 항해를 시작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여기 있는 종이배들이 이렇게 항해를 시작하려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가 발생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먼저는 배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 내부의 엔진이 고장이 나서, 배가 앞으로 가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겠죠. 둘은, 배 끼리의 문제입니다. 배들끼리 간격을 ‘서로’ 잘 조절하지 않으면, 배들이 서로의 암초가 되어, 서로 부딛힐 것이고, 마치 타이나닉처럼 좌초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배 끼리 서로 너무 멀리도, 혹은 충돌하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배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군선의 목적지가 어디인가?
오늘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배 내부의 문제. 이것은 내가 구속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의 문제입니다. 타락한 배는 이 위대한 항해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타락의 끈적끈적한 오염 속에서 항해를 시작하지 못한 채 점점 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를 믿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제사임을 믿는 사람들만이 그 죄책과 오염의 기름 덩어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 사람을 죄책에서 건져내고, 그의 마음에 피를 뿌려 마음은 죄책감이 아닌 순결함으로 변해갑니다. 죄책으로 더럽혀진 몸은 맑은 물로 씻겨집니다. 그리고 위대한 항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억지로요? 아니, 자원하는 마음으로, 죽을 사람을 살려주신 그 거저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항해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은 배 끼리의 문제입니다. 구속받은 자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위대한 항해에 동참하게 된 사람들은 어떤 열매를 맺습니까? 사랑. 그 사랑은 곧 서로의 간격입니다.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적정한 거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서로의 노력. 다른 사람의 잘 됨이 기준 되어 끊임없이 나를 바꾸는 자기부인.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느 배 하나가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배는 다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구속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위대한 항해를 떠났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의 엔진도 잘 돌아가고 있고요, 서로의 거리도 친밀하지만, 상처주지 않는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다음 질문이 나와야죠? 그럼 어디갈껀데?
그 어디갈껀데? 에 대한 답변이, 주기도문입니다. 이 공동체에게 주신 기도. 이 공동체의 목적과 뜻을 밝히는 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 이 기도가, 구속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지도에요. 위대한 공동체에게 주어진, 목적지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위대한 항로의 지도인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고 원피스를 찾아가는겁니다.
(종이를 새로 나눠주려는데, 자신의 아바타인 이 배를 아름답게,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만드십시다. 이것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진열해놓을 거거든요? 근데 이게 너무 크더라고요. <천로역정> 책 상품)
1. “하늘에 계신”
그리고 우리는 그 시작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웠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던 말과 다소 다르다는 이야기 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저기 구름 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하나님을 그려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수염이 덥수룩한, 그리고 구름 위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하늘에만 계시지도 않습니다. 여기의 하늘에 계신 이라는 의미는 “거룩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 는 거룩하신 아버지!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거룩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하늘에 계시다” 라고 표현했었던 그 거룩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이 ‘거룩’이라는 말이 성경에 참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거룩의 의미를 잘 몰라요.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거룩하신 분”
이사야 40:24,25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풀포기와 같다. 심기가 무섭게, 씨를 뿌리기가 무섭게, 뿌리를 내리기가 무섭게, 하나님께서 입김을 부셔서 말려 버리시니, 마치 강풍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예수님도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분은 거룩하십니다. 그럼 거룩이 뭔데요? 거룩은, “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관계가 없다” 는 의미입니다.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관계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 즉, 사탄으로부터, 악으로부터, 죄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계신 그 분은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죄와, 죄인과, 모든 악한 것을 미워하십니다. 이것이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박국 1:16
주님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은 그러한 뜻입니다. 하늘이 땅에서 떨어져 있듯이, 모든 죄와 악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계시고, 그것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즉,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에 계시다고 유대인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 우리 아빠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너무 충격적입니다. “우리 아빠”. 거룩하신, 즉, 그 어떠한 죄와도 섞이지 않으시며, 그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이고, 더럽고, 추악하고, 사랑할 줄 모르며, 말씀의 배신자인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니요!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괜찮습니다. "사랑이 많으신"과 "우리 아빠"는 괜찮아요. 이 말은 전혀 이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과 "우리 아빠"는 달라요. 마치 “뜨거운 얼음” 처럼 들립니다. 어떻습니까? 말이 되요? 말이 안되요. 뜨겁다는 말과, 얼음이라는 말은 같이 있을 수 없는거에요. 말이 안되니까. 이건 어떻습니까? “추운 여름”.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과 ‘우리 아빠’ 는 마치 그러한 겁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분께서 죄인인 우리 아빠가 되어주시다니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들었을 때, 정말 이상한 말이었어요. 어떻게 죄와 완전히 떨어져계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죄인인 인간들이 어찌 아버지, 아니 아버지 정도가 아니라 아빠라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느냐! 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18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지 말라는거에요. 그건 말이 안된다는 거에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말이 안되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그 분께서 토한 것에 넘어져 있는 나의 아버지라는 것이 말이 안되요. 그러나 그 말이 안되는 것이 말이 되게 되었어요. 무엇 때문입니까? 하늘에 계신과 우리 아빠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정리해봅시다. 예수 공동체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을 주기도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주기도문의 시작은, 하나님을 우리 아빠라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공동체에 들어온 이들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사탄의 아들, 딸들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책임을 모두 감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입양된거에요. 그 분의 양아들, 양딸이 된거에요. 그래서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된거에요. 누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위대한 제사의 어린 양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3. 너희도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16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제사의 공로로, 하나님을 아빠라 인정하게 된 사람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거룩이 뭐라 그랬어요? 죄와 완전히 떨어져 있는 상태, 죄를 미워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왜요? 우리는 아들이니까, 딸이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딸들은 이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양자 됨으로 거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맙시다. 거룩은 기도하는 척, 예배하는 척, 나는 깨끗한 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 라고 고백하는 모든 이들은 모든 삶속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죄와 떨어져,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 그리고 그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하나님의 영광과 전혀 상관이 없는 모든 상태와 행위들. 이것들에서 벗어나고, 이러한 것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를 생각하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위하여 사는 것. 그렇지 않은 모든 일에서 벗어나고, 그러한 일들을 미워하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빠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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