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전체적인 맥락
우리가 지난 8개월 간 배웠던 것들을 정리해봅시다. 다음의 순서에 따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창조와 타락
2. 예표와 불완전
3.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
4. 예수 공동체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인간이 창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빼앗으려 했던, 피조물들은 모두 아담 안에서 썩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아담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빛을 만드신 분께서 빛을 비추십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비추어진 그 빛은 온전히 반사되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도, 기드온에게도, 삼손에게도, 다윗에게도. 그 빛은 굴절되고 소멸되어, 사람의 영원한 희망이 되지 못했습니다. 빛을 온전히 반사하지는 못했으나, 어디에선가 빛이 비춰지고 있음을 세상에 밝힌 그들은 ‘깨어진 거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불완전한 반사체들이 지나가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에, 빛 그 자체이신 그 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위대한 빛은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빛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땅의 모든 그림자는 빛 속에서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위대한 제사. 한 번의 영원하고 그 유효한 제사는 모든 사람들의 죄책을 완전히 소멸하였습니다. 죄인과 관계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온 우주에 선언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하나님의 육신을 입은 말씀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입니다. 그 다음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위대한 구속은, 그저 우리의 관념에서, 우리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앞으로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으나- 4번 항목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공동체입니다. 창조되었으나, 타락했던 인간. 그러나 예표의 빛을 따라 완전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은 타락에서 벗어나 구속된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 공동체 곧 예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건물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모임. 예수를 믿기에 ‘먼저 죽으려는 사람들의 모임’. 이 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이제 풀어졌던 마음의 신발 끈을 다지 조여매고, 다시 말씀의 배낭을 짊어 맵시다. 이 공동체의 탁월함.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앎의 의지를 불태우십시다. 그리고 그 위대한 미래를 오늘의 현재로 가져옵시다.
우리가 새로 시작하려는 시리즈의 이름은 이렇게 붙여봤습니다. <예수 공동체의 기도>.
<예수 공동체의 기도> 는 주기도문에 대한 설교입니다.
1. 공동체와 기도
주기도문. 예배 시간에 으레 드리는 기도. 너무 흔하게 쉽게 외고 있는 기도.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이 주기도문가 가지고 있는 깊은 뜻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 생각해봅시다. 먼저 이것부터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왜 주셨을까요?
주기도문은 예배의 형식을 위해서 주신 기도문이 아닙니다. 아니면, 외기만 하면 효력이 있는 주문으로서 주신 것은 더더욱 아니죠. 주기도문을 왜 주셨는가?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이 질문에 대해서 말씀으로 답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1: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적에, 제자 중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여쭤봤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세요” 여기서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제자가 말한 ‘그것’을 아는 것이, 주기도문을 왜 주셨는지를 알 수 있는 첩경입니다.
여기 나오는 요한은 성경에는 여러 요한 중 세례요한 입니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깨어진 거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 세례요한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무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편의상 요한 공동체라고 부르십시다. 물론 요한 공동체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무수한 공동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들은 모두 세상의 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11:31~33
그의 군대가 성전의 요새지역을 더럽힐 것이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없애고,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을 그 곳에 세울 것이다. 그는 속임수를 써서, 언약을 거역하여 악한 짓을 하는 자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기 있게 버티어 나갈 것이다. 백성 가운데서 지혜 있는 지도자들이 많은 사람을 깨우칠 것인데, 얼마 동안은, 그 지혜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얼마가 칼에 쓰러지고, 화형을 당하고, 사로잡히고, 약탈을 당할 것이다.
세상의 끝. 우리에게는 대단히 생소해보이는 이 말이,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읽은 이 예언의 말씀 때문입니다.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이 세워지면, 벌어지는 멸망과 재앙에 대해서 다니엘 서는 예언하고 있었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이, 그곳,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졌습니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라는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단 위에 제우스의 동상을 세워버린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다니엘 11장의 예언이 이뤄질 것을 두려움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즉,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이 그 곳에 세워짐으로, 이스라엘은 끝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 저 공동체들이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의 끝을 맞이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공동체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바리새인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율법을 다 지켜서 온전해지자는 중산층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엣센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또한 사두개파도 있었죠. 이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이면서도, 전혀 종교에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강대국에게 아첨하고, 잘 보여서 자기 배만 부르면 장땡이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셋파라는 집단도 있었죠. 이 사람들은 멀리 광야로 나아가 속세와 단절하고, 자기들끼리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것으로 세상의 끝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심당이라는 당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력으로 외세를 몰아내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 전에 언급한 요한 공동체도 있었죠. 그리고 예수님과 열 두 제자를 주축으로 한 예수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공동체들은 각 공동체 마다 그 공동체의 목적과 뜻을 담고 있는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공동체들은,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기도문들을 배우고, 함께 기도하고, 그 공동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요한의 공동체도 그러했습니다. 제자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요한 공동체에도 기도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문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은 곧,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우리 공동체의 목적과 뜻이 무엇입니까?”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물어봅시다. 주기도문은 개인에게 주신 것입니까? 공동체에게 주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은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무엇을 해야하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밝히신 것이 곧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기도문을 배웁니다. 왜 입니까? 이제 답할 수 있죠. 그것은 우리가 예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 공동체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적과 뜻을, 이 위대한 기도가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가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바로 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동일한 것을 바라며, 이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에게 주신 기도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2. “하늘에 계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한 마디를 아는 것으로 오늘의 강론은 족합니다. 이 말을 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하늘에 계신입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기 위에 구름을 지나 성층권에 가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땅에는 계시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뭔가 이상합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이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하나님을 언제나 하늘에 비유했고, 그들에게 ‘하늘’은 거룩함, 신성함의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신성하신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는,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떨어진, 거룩하신 하나님 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이라는 의미가 거룩과 신성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경우를 이 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천국. 천국은 하늘 천, 나라 국인데, 그럼 저기 구름 뒤에 무슨 왕국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은 거룩함, 신성함을 의미하는 유대인들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하늘 나라, 천국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하늘에 둥둥 떠있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나라, 신성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천국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해 쓰인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
하늘에 계신, 어떤 아버지 입니까? ‘우리’ 아버지. 내 아버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공동체에게 주어진 기도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공동체의 목적과 뜻을 밝혀주는 기도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고백합니다.
즉, 정리하자면, 그 분은 거룩하며, 신성하시고,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이 공동체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4. “아빠”
3년 전, 다른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전하고 나서, 이제 기도하려고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입술을 떼어, 이렇게 운을 땠습니다. “아버지..” 그랬더니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래, 아버지” 저는 그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우스운 친구들. 물론, 그 아이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적어도 예수 공동체의 시작.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이 진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죠. 그래서 기도하다 말고 눈을 뜨고, 그 아이들을 쥐어박고, 다시 처음부터 말씀을 다시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웃든, 말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라는 번역은 사실 다소 어색한 번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쓰신 말은 히브리 사투리인 아람어입니다. 그런데 아람어로 아빠는 발음이 abba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우리와 같이 아빠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말도는 당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5:18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즉, 거룩하시고 신성하신 그 분을 너무도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일. 그것은 유대 사회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죽음과 직결되어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기를 그만 두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요일4:15)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십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댄다 하더라도 내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듯,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십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썩고 죽어가던, 아니 죽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 밑에서 중노동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리는 사탄 아래서 신음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의 구덩이에 빠진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결단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반역자이지, 절대 그 분을 아빠라 부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그 분의 말씀을 어김이, 우리가 그의 아들과 딸은 커녕, 하나님의 적임을, 그 분의 저주와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3: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 사탄의 욕망대로 움직였던 우리, 살인자에게 속했던 우리, 타락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구속함을 얻은 우리가 되었습니다. 무엇으로?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 그러나 오해해서는 아니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래야 할 수 없는 오염의 극한으로 달려가던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 안에 믿음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에배소서 2장이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감격스러운 선물은 무엇을 믿게 하는 것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제사가 바로 나의 제사. 제물 되신 예수께서 나의 모든 죄책을 감당하셨음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것을 믿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사탄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거룩한 양아들, 양딸이 된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된 것입니까?
새싹을 돋아내기 위해 씨앗은 썩어야 했고, 생명을 낳기 위해 부모는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무지개가 뜨기 전에는 폭풍우가 몰아쳐야 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영생을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아들도 딸도 아닌 자 들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기 위해서 진짜 아들이 죽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기 까지 한 사람의 죽음이 있었음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용서받은 것은, 한 어린양의 영원한 제물되심이 있었음을 있지 맙시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들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으려 했던 반역자들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로 인해, 그 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 변화.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피조물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보혈을 지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위대한 제사를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일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일은 곧, 십자가를 인정하는 일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6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제사를 지난 여러분. 이제 그 십자가의 제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십시다. 십자가의 제사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아들, 딸들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아닌 자는 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은 종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광입니다. 보혈을 지난 아들과 딸만이 얻을 수 있는 자격.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하늘에 계신, 지존하시고, 신성하신 그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그 일이 예수 공동체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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