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스물 네번째 말씀
깨어진 거울들XV
-성령을 소멸치 말며
0. 저번 주 이야기
1. 다윗에게 기름 부음
2. 사울과 타락한 사회
3. 의를 행하다
4. 사울과 타락한 사회는 다윗을 죽이려한다
5. 십자가가 아닌 밧세바
우리는 저번 주에 다윗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을 임명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기름 부음은 곧 성령 부음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집니다. 그 사람은 진리 없는 이 땅의 선지자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말씀의 실행자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제사장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망과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한 사람에게 부어진 바 됩니다.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이 바뀝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안은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중에서도,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과 성령을 지키는 사람. 자신이 어디인지 생각해봅시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리고 오늘은 성령을 이미 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하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1. 성령받은 자가 만나는 것.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래요. 이제 다윗의 인생이 잘 풀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성령 받고, 왕이 되었으니 이제 탄탄대로의 인생을 걸으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기름 부음을 받고, 그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절대 고난없는 장미빛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16:13~18
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병을 들고, 그의 형들이 둘러선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 사무엘은 거기에서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 사울에게서는 주님의 영이 떠났고, 그 대신에 주님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 신하들이 사울에게 아뢰었다.
"임금님,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지금 임금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에게,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하나 구하라고, 분부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임금님께 덮칠 때마다, 그가 손으로 수금을 타면, 임금님이 나으실 것입니다."
사울이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찾아 보고, 있으면 나에게로 데려오너라."
젊은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제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그런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직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울이라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사울이라는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사울 왕은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왕이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명하신 '왕'의 의미에 대해서 말입니다. 왕은 말씀의 실행자에요. 하나님의 명령을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습니다. 사울 역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함께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임금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이미 임금님을 버리셔서, 임금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있을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기름부음 받았으나,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자의 최후가 이것입니다. 그는 버림받았습니다. "왕께서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이미 왕을 버리셔서!" 그리고 지금은 그는 악한 영에 의해 놀아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받은 성령을 시시각각 소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닙니다. 왕의 자리에 앉아 있을지언정 왕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성령받았으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 그에게 성령은 무의미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있어 그러한 그 역시 무의미 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기름부음 받고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이 악한 왕,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울이 군림하고 있는 타락한 사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십니다. 마태복음 3장을 확인합시다.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다" 하였다.
성령의 기름부음심을 받은 예수님. 그래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 땅의 선지자로, 왕으로, 제사장으로 임명되신 예수님. 그 분께서 기름부으심 다음에 만나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1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죠. 누구에게 이끌려? 성령에게 이끌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만난 것은 바로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군림하고 다스리고 있는 타락한 사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2. 성령 소멸자와 성령 순종자
다시 정리해봅시다. 성령 받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만나는 것은 이 세상 주권자인 사탄과 타락한 사회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악한 왕이 다스리는 타락한 사회에 바로 자신이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풀밭에서 아기 염소들과 뛰어놀 때 이 사실을 알았겠어요? 안다한들 무슨 소용이에요. 그러나 기름 부음 받은 이후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는 선지자에요, 왕이에요, 제사장이에요. 더 이상 타락한 왕과 타락한 사회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으로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골리앗 이야기를 보려고 합니다. 성령받은 다윗이, 타락한 사회 안에 있으면서, 타락하지 않은 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장으로 돌아갑시다. 여기는 지금 '엘라' 평지입니다. 멀리 갑옷 입은 모습을
보니 블레셋 군대군요. 이 사람들도 지긋지긋합니다. 삼손 이야기 기억나요? 그 때 삼손에게 당한 민족이 바로 이 민족입니다. 지금 수백년에 걸쳐 계속 싸우고 있는 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눈 앞에는 키가 3미터 가까이 되는 어떤 아저씨가 보입니다. 그 아저씨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이러합니다.
블레셋 진에서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싸움을 걸려고 나섰다. 그는 키가 여섯 규빗 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었다. 머리에는 놋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이나 되었다.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차고, 어깨에는 놋으로 만든 창을 메고 있었다. 그의 창자루는 베틀의 용두머리만큼 굵었고, 그 창날의 무게는 쇠 육백 세겔이나 되었다. 그의 앞에서는 방패를 든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 골리앗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릅니다.
"너희는 어쩌자고 나와서 전열을 갖추었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고, 너희는 사울의 종들이 아니냐? 너희는 내 앞에 나설 만한 사람을 하나 뽑아서 나에게 보내어라. 그가 나를 쳐죽여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쳐죽여 이기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겨야 한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 군대를 이처럼 모욕하였으니, 너희는 어서 나에게 한 사람을 내보내어 나하고 맞붙어 싸우게 하여라."
고대 사회에는 적군의 장수와 우리 편의 장수가 일대일로 싸워서 전쟁의 승패를 정하는 전투방식이 있었습니다. 삼국지에도 등장하고, 일리아스에도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편에도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둘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웬걸, 우리의 주변에는 타락한 사회의 병사들과 벌벌 떠는 사울이 있을 뿐입니다.
사무엘상 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그 블레셋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
이 때, 다윗이 등장합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윗이 당시 했던 말을 다시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는가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한 말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려는 것은, 다윗과 사울의 태도, 즉,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과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의 완전히 다른 태도 입니다.
사무엘상 17:45,46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주님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 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또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
사울과 타락한 사회의 사람들이 떨고 있을 때, 다윗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성령을 소멸하는 자와, 성령에 순종하는 자. 그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럼 반대로 물어봅시다. 사울과 타락한 사회의 사람들은 왜 떨고 있는 것입니까? 무서워서. 네 무서워서. 왜 무서울까요? 질까봐. 골리앗에게 죽임당할까봐. 그런데 다윗은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왜요? 안질꺼니까. 그러니까 안무서워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들과 성령을 지키는 자들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다윗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 군댕 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즉, 모든 일의 결과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는 것. 이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여러분일 경우,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만을 의지하고, 모든 일의 결과가 여러분에게 달려있다고 믿는다면,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겨도 문제가 되고, 져도 문제가 됩니다. 사울의 경우가 그래요. 만약,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여러분 자신이라면, 여러분의 승리는 교만이 되버리고요, 여러분의 패배는 좌절이 됩니다. 잘나갈때는 끝없이 자기가 잘난 줄 알고, 힘들 때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싶은 만큼 낙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끝없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해!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어. 이것이 우리가 믿는 말씀이고,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바인데, 이것을 소멸하고, 우리 자신을 우리 삶 속에 왕으로 세울 때, 우리는 진짜 왕이 아니에요. 버림 받은 왕. 사울이 되는 거에요.
반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을 실행하는 진짜 왕의 모습으로 내가 그 분 앞에 섰을 때, 나의 승리는 기뻐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해서 승리했기 때문에. 따라서 절대 교만이 되지 않아요. 왜요? 그 분의 능력으로 이긴 것이지, 나의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기뻐요. 왜요? 그 승리에 내가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성령 받은 자의 승리는 곧 기쁨과 겸손이에요. 그럼 패배했을 경우? 그런 경우는 생각할 가치도 없어요. 하나님에게는 패배가 없기 때문이에요. 결국 그 분이 이기시니까. 패배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섬기는 왕들의 몫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 살펴볼 수는 없어도, 동일한 역사가 예수님에게도 벌어집니다. 그 분도 성령을 받으셨고, 성령받은 진정한 왕은 사탄과 타락한 사회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 분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하지 않으셨으며, 그 분은 패배의 두려움을 모르셨습니다.
3. 세상을 이기는 믿음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그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의 무용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성경 보다 지루하지 말라고 넣어놓으신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령 소멸자와, 성령을 지키는 자의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사울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울도 타락한 사회 안에 살고 있습니다. 다윗도 타락한 사회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성령을 소멸하여 그 사회에 흡수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성령에 순종하여, 그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이 극명한 차이는 무엇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까? 타락하지 않은 채, 타락한 사회에서 사는 삶의 시작은 어디서 부터 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결과를 그 분께 맡기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아, 하나님 한 번 믿어볼까? 의지해볼까? 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발목만 물에 담가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온 몸을 물에 잠그는 것입니다. 내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던져드리는 것입니다. 내 목숨이 그 분께 있음을 인정하고, 그 분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새 삶을 얻는 것입니다.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또한 결과를 그 분께 맡기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승승장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패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을 믿고 나아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타락한 사회는 지금 두려워합니다. '자기의 일이 안될까봐'. 왜요? 사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이 되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그의 자식들이 하는 걱정은 모두 '자기의' 일이 안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울과 그의 백성이 왜 골리앗 앞에서 떨고 있었습니까? 왜 그러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했기 때문이요,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두려움에 동참해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가 아닙니다. 다시 기억합시다. 여러분의 주인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삶이라는 전쟁은 여러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믿음으로, 타락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합시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2011年 > 2. 창조와 타락, 그리고 예표와 불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어진 거울들 XVII - 나는 타락했습니다(이사야 14:12~15) (0) | 2014.05.04 |
---|---|
깨어진 거울들 XVI - 의를 행하다("창조" 요한복음 16:7~11, 시편 104편) (2)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XIV - 기름부음은 성령부음(사도행전 19:2) (0)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XIII - 외모가 아닌 마음. 그리고 기름부음(사무엘상 16:1~13) (0)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XII - 언제나 사랑과 죄의 갈림길(마태복음 25:32~46) (0) | 2014.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