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스물 두번째 말씀
깨어진 거울들XII
-언제나 사랑과 죄의 갈림길
0. 저번 주 이야기
오늘 공과 공부 시간에는, 선생님들께서 우리가 그동안 배웠던 '룻기'를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번 주 암송구절에 대한 연구입니다.
로마서 8: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법 다음에는 당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또한 죄와 죽음의 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릴 수 있습니다.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요, 사랑만이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법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기근입니다. 자기만 살겠다는 죄.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찾아오는 모두의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1. 정신승리법
성경은 말합니다. "당신은 해방되었다. 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넘어갔다." 이 말은 이 구절을 그저 알고 있으면 우리가 해방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 구절을 달달 외우면 우리는 해방을 얻은 것입니까?
류신이라는 사람이 쓴, <아큐정전>이라는 중국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 주인공은 당연히 아큐입니다. 아큐는 머리가 붉고 그 붉은 머리 사이에는 부스럼 자국이 있는 중국 청년이었습니다. 이 아큐의 성격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상대를 어림봐서 말이 서투른 놈이면 욕을 퍼부었고, 기운이 약한 놈이면 때리는 비겁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런 아큐가 건달을 만났습니다. 평소에 거들먹거리는 아큐를 건달들이 우습게 보고 그를 흠씬 패주었습니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패주고나서야 건달들은 돌아갔습니다. 얻어맞은 아큐가 한참 서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자식놈에게 맞은 거야. 요즘 세상은 정말 꼴 같지 않어" 하고서 의기양양하게 자기도 갈 길을 갔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아큐는 사람들이 아큐를 욕해도, 때려도 언제나 의기양양하게 오히려 그 사람들을 업신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큐에게는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방법의 이름은 '정신승리법'이었습니다. 이 정신승리법은 자신이 얻어맞고 업신여김 당할 때, 오히려 상대를 더욱 같지 않게 여기고 자신은 지지 않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큐의 ‘정신승리법’ 이었습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아큐가 정리승리법을 시전했어요. 그럼 아큐가 정말 이긴겁니까? 아큐는 건달들에게 안맞은겁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망상이죠.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정신승리법이 아닙니다. 당신은 해방되었다. 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넘어왔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이 말을 믿었어요, 그럼 그 믿은대로 살아야죠. 어떻게 살아요? 예수 그리스도 밖 아니라 안에서, 남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야죠. 그래요? 안그래요? 말씀 들을 때는 믿는다. 그것이 옳다 말하지만, 혹시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도, 사탄에게 끊임없이 얻어맞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 나는 예수님을 아니까" 하고 정신승리법을 시전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탄을 박살 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정신승리가 아닙니다. 우주적 승리,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들을 송두리째 바꾸는 실제적인 승리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정신의 방에 갇다 모셔놓는 아큐들은 들으십쇼. 정신승리에 익숙해서 삶의 패배를 인정하고 살아왔던 사람은 오늘 말씀 앞에 다시 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서로를 진지하게 바라봄으로, 그 사람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기근의 허덕임이 아닌 사랑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승리의 전리품인 것입니다.
해방을 얻은 사람. 죄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은 어느 쪽입니까? 이쪽입니다. 참 해방을 얻는 사람은 이쪽을 ‘선택’합니다. 이 쪽은 하나님의 법 아래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말씀 공동체 이스라엘로 가는 길입니다. 보아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입니다. 예수, 사랑, 성령. 이쪽이 옳습니다. 기근에서의 해방입니다. 그러나 나의 유익, 사탄을 선택하는 자 기근입니다. 죽음입니다.
2. 모든 선택은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이다.
마태복음 25:32~46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어디가 양이고, 어디가 염소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칠판을 돌려놓고, 본문 설명) 양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한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른편이 있는 자들이 했던 일은 그렇게 눈에 띄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이 했던 일은 작은 일이었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랑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일은 곧 영생의 일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6: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 일에도 충실한 법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지금 당장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잘되게 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선택할 것입니까? 당신의 입에 들어갈 음식입니까? 당신의 몸뚱이를 감쌀 옷입니까? 당신이 좋아하는 물건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예수요, 오른편이요, 양이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사랑입니다.
예수를 만나본 적 없는 저의 스승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남의 도움이 될 사람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슨 일을 할 때 그것이 올바른 행위가 되겠느냐, 옳지 않은 행위가 되겠느냐, 훌륭한 사람이 할 일이냐, 나쁜 사람이 할 일이냐 하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위험까지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당신의 모든 작은 선택은 모두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입니다. 우리의 생에 놓여진 모든 선택은 생명과 죽음의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갈림길에 우리는 끊임없이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작은 선택의 큰 결과
이제 그 작은 선택들의 결과를 살펴봅시다. 룻은 어떠합니까? 룻이 시어머니를 좇아 이스라엘이 되었던 그 선택은 작은 선택입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선택이고, 큰 선택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인간의 모든 역사, 모든 피조물들을 놓고 생각하면 작은 점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선택의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이 마태복음 1장은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에 이방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룻의 이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외조모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됩니다.
그럼 오르바는 어떠합니까? 랍비 문헌에 보면 오르바의 뒷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뒤로하고, 하나님을 뒤로하고 모압으로 돌아간 오르바는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사생아는 정식 부부가 아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오르바를 통해 나온 사생아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골리앗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과 대결해서 목이 잘리는 거인. 그 골리앗 말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우리는 오르바의 선택을 볼 이유가 없습니다. 룻의 선택의 결과에 집중합시다. 왜나하면 우리의 갈길은 오른편이요, 양의 길이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괴물을 낳는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모든 선택. 그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임을 말입니다.
누가복음 16: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2011年 > 2. 창조와 타락, 그리고 예표와 불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어진 거울들 XIV - 기름부음은 성령부음(사도행전 19:2) (0) | 2014.05.04 |
---|---|
깨어진 거울들 XIII - 외모가 아닌 마음. 그리고 기름부음(사무엘상 16:1~13) (0) | 2014.05.04 |
[외전] 깨어진 거울들 외전 III - 생명의 법 아래로(룻기 2:2~4:10) (0) | 2014.05.04 |
[외전] 깨어진 거울들 외전 II - 선택하게 하는 참 믿음(룻기 1:5~16) (0) | 2014.05.04 |
[외전] 깨어진 거울들 외전 I - 먹고 사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룻기 1:1~3 ) (0) | 2014.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