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열 아홉번째 말씀


깨어진 거울들 외전

-먹고 사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0. 그 동안의 이야기


  오늘 우리는 새로운 인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그 동안 우리가 배워왔던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배웠던 내용들은 모두 '연결' 됩니다. 어느 하나 전체와 상관없는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되기를 자처했고, 그로 인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하신 그 분께서는 그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 중에서,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처음 배웠던 인물이 여호수아 입니다. 물론 이 사이에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우리는 공과의 순서를 따라 여호수아부터 다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여호수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게 하셨습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표'와 '불완전'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난 인물이 기드온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이에도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있지만, 우리는 공과의 순서를 따라, 여호수아 이후 기드온을 다루었습니다. 기드온 역시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예표와 불완전의 인물이었습니다. 그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   했습니다. 그것도 사사로서의 그리스도. 완전한 선지자이자, 완전한 왕이신 그 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한 체, 기드온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낯 인간에 불과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만난 사람이 삼손이었습니다. 삼손도 기드온과 마찬가지로 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사사이자, 마치 스케치북을 검정색 크레파스로만 칠해놓은 것 같이 가장 어두운 사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두운 삼손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예고하셨습니다. 즉,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손과 같이, 사탄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삼손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예표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며, 반드시 그것을 성취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 일의 주인공이 아님을 또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한 인간의 끝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계보는 거룩한 계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이 계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거룩한 계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거룩한 계보를 따라, 지금 걸음마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계획한 것을 버리고, 이 하나님의 위대한 걸음에 동참하기 위해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오른발을 내딛은 아이가 곧바로 왼발을 내딛지 않으면 쓰러지듯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일에, 말씀에 집중하는 일에 멈춰서는 아니됩니다. 다시 이 고대문서로 돌아갑시다. 이 고대문서들의 글자들을 해독하고, 우리의 삶을 위대한 분의 손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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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사시대와 기근


  그렇게 만난 새로운 인물은 '룻'입니다. 이 사람 여자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이 거룩한 계보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이제 글자들을 따라 차차 확인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그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 떄와 장소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룻기 1장 1절을 함께 봅시다.


룻기 1:1

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때는 언제입니까? 사사 시대에. 즉,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사사에 대해서는 소성하 양이 잘 알고 있습니다. 네. 그 사람들이 다스리던 때의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 땅에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그 땅'은 어느 땅일까요? 이스라엘 땅입니다. 즉, 정리하면,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스라엘에 기근, 흉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진 것입니다. 


  기근이라는 상황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각해봅시다. 농사가 흉년이 나서 평소의 생산량의 반의 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들 굶어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왜 기근이 일어났는가? 둘은 이 기근에 어떻게 반응해야겠는가?


하나. 왜 기근이 일어났는가?

  이 기근은 왜 일어난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힌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명탐정 코난이 되어 단서들을 밟아나가야 합니다. 그 단서들을 밟고 사건의 명쾌한 진술을 해내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기근이 일어난 이유. 그것의 힌트는 '사사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저번에 이런 그래프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유, 사사에 의해 통치된 이스라엘은 점점 내리막길로 치닫습니다. 다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보시는 앞에서 죄를 저지르고, 또 다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보시는 앞에서 죄를 저지르고... 그리고 우리는 삼손을 통해 이 내리막길의 끝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즉, 사사시대가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민족이 부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죄로 가득한 암흑.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기근을 일으키십니다. 농작물들은 말라가고, 땅은 황폐해지기 시작합니다. 동네마다 밥 달라고 우는 아이들 소리와 신세를 한탄하는 어른들의 한숨소리로 가득 찹니다. 사사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 벌어진 기근은 누가 일으키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럼 왜요? 이스라엘이 미워서 그들이 굶어 죽기를 바라셨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댓말은 미움이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무관심하시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기근을 내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둘. 이 기근에 어떻게 반응해야겠는가?

  그럼 이스라엘은 이 기근에 어떻게 반응해야 했습니까? 기근이 일어났을 때, 서로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칠 때,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것으로 다른 사람을 아낌없이 먹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기근의 탈출구입니다. 다른  사람을 내 것으로 아낌없이 먹이는 것.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즉, 기근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 입니다. 기근이 가속화되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이 굶어 죽어도, 움켜진 손을 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를 움켜진 자들이 사랑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나갑니다. 그렇게 기근은 장기화됩니다.


  북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전 세계에서 지원해주는 식량과 자원을 누군가가 손에 쥐고 놓치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아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누군가 때문에, 북한의 인민들은 오늘도 토끼풀로 연명하고 배를 부여잡은 채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그 기근의 땅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 보면, 그들에게 무관심한, 사랑과 정 반대인 동포들이 있습니다.


  북한 뿐입니까? 21세기의 오늘 날에도 지구상에 굶어죽는 사람은 우리나라 인구보다도 많습니다. 매년 죽어가는, 다른 이유 아니라 굶어서 죽는 어린이만 우리나라의 인구 만큼입니다. 북한이나, 아프리카 아닌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어느 도시든, 노숙자 없는 도시가 없고, 지금도 나눔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지금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네 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은 양의 자원을 주시고, 그 적은 자원 속에서 우리에게 치열하게 경쟁하라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미 지구의 자원은 너무나 풍족하고, 지구의 면적 또한 넉넉 합니다. 오늘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을 인형 뽑기하듯 들어서, 미국 땅에만 다 집어넣어도 우리나라 인구 밀도보다 높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면 그 날로 기근은 끝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남습니다. 꿈 같은 이 이야기는 통계 자료를 근거로 한 사실입니다. 사랑은 기근의 유일한 해답입니다. 기근이라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듣길 원하시는 답변은 사랑입니다. 제 것의 나눔입니다.


2. 위기의 가정


  다시 정리해봅시다. 지금 우리는 사사시대의 어느 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기근 속에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악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기근의 상황에 직면한 한 가정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모압'으로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했었던 이스라엘의 남자가 자기 민족을 버리고 모압으로 떠납니다. 왜 갈까요? 네. 먹을 것 때문에. 누구와 갑니까?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것이 우리가 룻기를 보기 위한 배경입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이스라엘에 흉년이 났고, 이스라엘의 한 남자가 그 흉년을 피해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이란 지역으로 이사한 것. 이것이 룻기의 시작입니다. 


  이제 그 다음 절을 보면, 그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룻기 1: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에브랏 가문 사람인데,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살았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히브리어로 '엘'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뒤에 '리'가 붙으면 '나의'가 되거든요. 그래서 엘리하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셨을 때 엘리가 바로 이 엘리입니다.  '멜렉ㅎ'은 왕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엘리멜렉하면 어떻게 되요?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로 번역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 있죠.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명탐정 코난 여러분들, 지금 사람들의 이름의 뜻을 공부하는 것은, 이 룻에 대한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의 이름의 뜻은 그렇게 가볍게 지나 버려도 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무게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은 두 아들 이름의 뜻도 살펴봅시다. 말론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이름은 질병입니다. 기룐이라는 둘째 아들의 이름은 '황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이름부터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죠.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할 차례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버리고 모압으로 향했던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요? 옳지 않다면 왜 옳지 않은 것일까요? 자기 공동체를 버리고 '먹고 사는 문제'를 따라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이, 기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답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고 이 가족은 지금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댓가를 뼈가 저리도록 겪어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기근을 겪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는 아버지의 회초리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 가족은 그 회초리를 맞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변화에 참여하기는 커녕, 그 회초리를 피해버립니다. 기근으로 고생하는 이웃들과 친지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섬기는 모압으로 건너갑니다. 선택받은 민족,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는 지금 이 가족에게는 두 번째 문제 입니다. 그럼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 먹고 사는 문제.  


3. 먹고 사는 문제?


  이 먹고 사는 문제가 엘리멜렉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네 삶을 돌아보십시다.


  이 장면은 강남의 초등학생들 공부하는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들 공부할까요? 몇몇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요즘은 학원 안다니는 친구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골목을 제 집처럼 헤집고 달리고 또 달려도 지치지 않을 어린이들이 이처럼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하는 이유는 어디에 무엇이겠습니까? 네.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먹고 살기 힘들 때일수록, 사람은 자기 밥그릇만 보입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좋은 직장 들어가서, 내가 내 밥줄은, 내가 책임져야겠다. 그러나 미안한 얘기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야 할 특권이 있습니다. 그 어린이의 나이 때에는 그 나이에 누려야 할 자유와 꿈이 있습니다.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 보다 한 시대 새로운 사람입니다...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습니다.' 지금 어른들은 어린이를 잘 키우고 있습니까? 어린이들은 잘 자라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은 새싹과도 같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새싹을 죽이는 나무는 곧 나무도 죽게됩니다. 새싹을 살리는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린이를 바르게 길러내는 공동체의 미래는 아름드리 나무입니다. 무수히 셀 수도 없는 새순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들은 잘 자라나야 합니다. 참 된 것을 배우고, 올곧게 자라나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세상의 정직의 대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문제, 이 먹고 사는 문제는 아이의 눈도 가리고 어른의 눈도 가립니다. 옳은 것이 아니라 배 부른 일을 찾게 만듭니다. 사랑이 아니라 이기주의를 가르칩니다. '너'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은 관심 밖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오늘 내 인생 꾸려나가기에 바쁩니다. 이것은 참 된 어린이의 모습이 아닙니다. 기근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는 커녕, 먹을 것을 찾아 이스라엘을 떠난 엘리멜렉의 가족처럼, 어쩌면 이 땅의 어린이들은 삶의 뒷편에서 이야기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모압 땅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른들은 이것을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을 때,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사람의 뜻으로 달려간 그 곳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집니까? 


룻기 1: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간단하게 한 줄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거 생각해보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일어나, 먹고 살려고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다 모압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살고자 갔던 그 타향 땅에서 아버지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늙은 어미와 철없는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만 남았습니다. 이 가정은 '살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뒤로 모압으로 향했지만, 그 길은 살기 위한 길이 아닌 죽음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이 죽습니다. 뉴스 기사는 이것을 간단하게 자살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거 생각해보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취업 대란이 일어나, 먹고 살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카이스트라는 우리나라 제일의 명문 대학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살고자 갔던 그 타향 땅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뒤따라 죽습니다. '살기위해' 명문대학에 들어갔지만, 하나님 없는 공허한 인생은 죽음의 입속에서 그 끝을 맞이했습니다.


4. 먹고 사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엘리멜렉들을 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엘리멜렉의 가정들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따라가야 할 것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직업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보다 커지면 그것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우상'!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 만큼 커져서, 그 분을 외면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먹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지, 먹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는 일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사는 것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처럼, 먹고 사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 주 외웁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주실 것을 믿는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다른 사람을 먹이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먹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까? 그것은 이 땅의 티비가, 광고가, 영화가, 음악이 이 땅의 새싹인 어린이들에게까지도, 먹고 사는 문제가 전부인 것 마냥 거짓말을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른들을 집어삼키고 이제는 어린이들까지도 입시와 취업을 걱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겁내지 마십쇼.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굶기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여러분이 가지게 될 직업은 의미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근의 때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의 생수를 찾기 어려운 영적 기근임과 동시에, 삶이 점점 핍절해가는 육적 기근이기도 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인정하는 것은, 점점 살기 어려운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모압으로 갈 것인가? 그 길은 당장은 먹을 것이 있어 보이지만,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모압이 아니라면 또 다른 선택이 우리의 앞에 있습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길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이 있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바로 그 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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