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스무번째 말씀
깨어진 거울들 외전II
-선택하게 하는 참 믿음
0. 저번 주 이야기
우리는 지금 룻기로 들어왔습니다. 룻기는 '외전'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말씀이 아담을 지나 여호수아에게 까지 흘러왔고, 거센 말씀의 강물은 기드온을 지나 굽이 굽이 삼손도 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거룩한 계보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말씀의 강에 발을 담그려는 한 사람의 이방인을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이름 룻입니다.
우리는 저번 주 룻기의 배경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때는 사사시대, 장소는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일은 기근이었습니다. 이 기근은 우연적인 자연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심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고, 그 사랑이 흘러흘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서로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중 엘리멜렉의 가족은 하나님의 회초리를 피해, 머나먼 모압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던 그들은, 그 우상을 따라 모압에 이르렀고, 그 길은 생명없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엘리멜렉은 그 이름도 무색하게, '하나님이 왕이셔도 먹고는 살아야 겠다'고 삶으로 외치다가 모압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번 주에 했던 내용입니다.
1. 새로운 가족
집안의 가장이 죽어서 휘청거리는 가정을 나오미와 두 아들이 힘겹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아마도 나오미는 두 아들의 결혼을 서둘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은 곧 재산이었거든요. 지금도 물론이지만, 당시는 노동력의 차원에서 재산이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나오미가 하나님께 묻고 이방사람이랑 결혼하지 말라는 율법을 깊이 생각했다면, 쉽게 아들들을 이방 여자와 결혼하게 하지 않았겠죠. 그러나 나오미는 급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방도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결혼합니다. 말론은 룻이라는 모압 처자와, 기룐은 오르바라는 모압 처자와 결혼합니다. 새로운 가족이 두 명이나 늘었습니다. 이제 노동할 사람들도 많아지고 이제 소원대로 먹고 살만해지려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룻기 1장 5절입니다.
룻기 1:5
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두 아들마저도 죽습니다. 말론은 질병, 기룐은 황폐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과 같이 두 아들의 죽음은 나오미의 마음의 영원한 질병이 되었고, 그 집안을 황폐하게 했습니다. 아...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없는 인생이라는 것. 끊임없이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걸음을 절망으로 이끄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먹고 살기 위해 했던 결정들이 다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 똑똑히 확인해야 합니다. 첫번째는 모압땅에 가는 결정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엘리멜렉의 죽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은 두 아들의 이방 여자와의 결혼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두 아들이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살기 위해 결정한 모든 일들이 결과를 분명히 확인합시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제 세 명 남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피가 흐르고 있던 남자들은 하나하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작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룻과 오르바만이 가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가족이 모든 가족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핏줄을 대신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따라서 모압으로 거처를 옮겼던 엘리멜렉 가족, 아니 이제 나오미 가족이죠. 이들은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은 1장 6절의 소식입니다.
룻기 1:6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먹고 사는 문제를 따라서 이 가족은 다시 짐을 쌉니다. 다시 모압을 떠나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이게 뭐에요? 기근 때문에 벗어난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냥 돌아갑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나서 돌아갑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이것은 절망 중의 절망이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생각하던 일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뼈에 새기는 절망입니다.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절망하나 이 절망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선택했던 인간에게 그 절망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 절망은 나오미를 비롯한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자처한 일입니다. 이 스스로 절망을 자초한 절망자가 다시 짐을 싸고 처음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어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처음에 장미빛 인생을 꿈꾸며 이 길을 함께 걸었던 남편은 이제 없습니다. 그 옆에는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아들들도 없습니다. 대신에 과거에는 완전 남남이었던 두 여자만이 동행합니다. 그렇게 세 여자가 길을 걷습니다. 그 길은, 한 여자에게는 왔던 길이요, 두 여자에게는 새로운 길입니다. 그 땅은, 한 여자에게는 돌아가기 창피한 그 땅이요, 두 여자에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땅입니다. 세 여자가 걷습니다.
이 걸음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지금 이 세 여자의 어깨와 발목에 힘이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나 이 절망 중의 절망속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를 남겨 두십니다. 그것도 그 누구도 희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곳에서 바로 그 선하신 뜻을 이뤄가십니다. 이것은 나오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혈안이 되었던 나오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오미가 예상하지 못한 완전한 반전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가 이제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이방인의 바른 선택
길을 걷던 시어머니 나오미가 말합니다.
룻기 1:8, 9
...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며느리들이 큰 소리로 울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단호하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이제 며느리들에게 선택의 순간이 왔습니다. 시어머니를 좇아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자기 동네인 모압에 남고 시어머니와 작별할 것인지. 우리는 이 장면에서 처음 엘리멜렉의 장면이 오버랩됩니다. 또 다시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삶과 죽음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엘리멜렉 때와 동일합니다. 먹고 살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냐. 만약 며느리들이 먹고 살기만을 위한다면 모압에 남아서 다시 시집가면 됩니다. 남편도 없는 시어머니 따라 타국 땅에 가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유리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리한 것이 아니라 유리해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면 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택입니다. 여자 셋이 살 생각을 하니 고생길이 훤하고, 자꾸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이 늙은 여자를 따라가는 것은 불안합니다. 아니 불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우리는 갈라진 선택을 봅니다.
룻기 1:14
그들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
여기서 주목합시다.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났고, 룻은 시어머니에게 더 달라붙었습니다. 누가 옳은 선택을 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저번 주와 살펴본 그림과 정 반대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떠났던 엘리멜렉의 가족과 지금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룻의 그림은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룻의 선택의 이유를 잘 생각해봅시다. 지금 룻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입니까? 다시 한 번 룻의 말을 들어봅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느낍시다. 이 룻의 말속에 들어 있는 룻의 마음을 느껴봅시다.
룻기 1: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엘리멜렉 가족이 보여주지 않았던 바른 선택을, 새로 들어온 이방인 가족이 보여줍니다. 이것은 제가 미국 사람이랑 결혼해서 저희 집에 갔더니, 미국인인 제 와이프가 고스톱을 가장 잘 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방인에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선택을 볼 수 있고, 또 그를 통해서 이제 새로운 회복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선택에 의해서 말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선택한 그 이방인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우리는 다음 주에 확인할 것입니다. 오늘은 좀 더 이 선택에 대해서 집중해봅시다.
3. 선택하게 하는 믿음
룻과 오로바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왜 둘의 선택이 달라졌습니까? 오르바와 룻의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다음의 세 가지 도식을 가지고 이 고대문서를 함께 풀어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입니다. 모든 선택은 이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말이 다소 어렵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다지 어려운 얘기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라면을 사러간다고 가정해봅시다. 이제 슈퍼마켓에 다 왔어요. 이제 라면을 '선택' 해야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 때 저는 '신라면 블랙'이 출시 되었다는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이것이 지성입니다. 아는 것, 어떠한 정보를 아는 것이 곧 지성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뭘 느껴요. 뭘 느낄까요? 아. 맛있겠다. 먹으면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느낍니다. 즉, 감성입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지성으로 알고, 감성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뭐에요? 신라면 블랙이 나왔음을 알고, 이제 그것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죠. 이제 신라면을 '선택' 위해서는 이제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먹어야 겠다' 이 먹어야 겠다를 가리켜 '의지'라고 부릅니다.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어떤 일을 이루려는 굳은 마음'이라 쓰여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것을 알고, 그것을 느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굳은 마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라면을 알고, 기대하고, 먹고자 하는 이가 신라면을 손에 집어 계산대 앞으로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인간의 모든 선택은 이 지성-감성-의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면을 살 때도, 심지어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무수한 선택 속에서 하는 인간은 언제나 알고, 느끼고, 하고자 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럼 이제 룻과 오르바의 경우를 연구해봅시다. 지금 오르바도 룻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지금 나오미를 떠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단순히 시어머니와의 이별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헤어지는 얘기하면서 계속 민족과 하나님을 언급하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지금 나오미를 떠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이면에는, 어떤 신을 섬길 것인가와 어느 백성이 될 것인가의 문제가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섬기는, 당대 문화에서 유별나리 만큼 독특한 유일신. 그 하나님을 섬기며,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지, 아니면 모압의 신을 섬기며 모압의 백성으로 남을 것인지. 그래서 1장 15절처럼 나오미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룻기 1:15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헤어짐은 곧 그 사람이 어느 백성이 될 것인지, 그 사람이 어떤 신을 섬길지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는 것은, 그 시어머니의 민족이 되는 일이고, 곧 그 민족, 이스라엘의 신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반대로 모압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압의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말이고, 곧 모압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것을 룻과 오르바는 모르고 있을 리 없습니다. 즉, 이것은 지성의 문제입니다. 오르바와 룻의 지성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둘 다 이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이제 룻과 오르바는 감성적 차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이제 그들은 느낍니다. 무엇을 느낍니까? 시어머니와 헤어지는 것에 대한 아픔을 느낍니다.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가정했을 때, 하나님을 섬기고, 그 백성되지 않은 자신들을 가정했을 때 그들은 슬픔에 잠깁니다. 아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둘 다 펑펑 울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룻기 1:9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그것도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펑펑 웁니다. 룻도 오르바도 말입니다. 둘 다 지성적 차원과 감성적 차원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둘 다 이 헤어짐의 의미를 알았고, 충분히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둘의 선택은 달라집니다. 똑같이 알고, 똑같이 느꼈지만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합니다. 왜요? 이제 우리는 이 부분에서 집중해야 합니다. 그 둘의 차이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의지'입니다. 의지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어떤 일을 이루려는 굳은 마음' 룻에게는 바로 이 의지가 있었습니다. 오르바에게 없던 이 '의지'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야 말겠다'는 굳은 마음이였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룻기 1: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나더러 떠나라고 강요하지 마십쇼. 나 이스라엘로 갈겁니다. " 영어로 하면 "I will" 이죠.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 마음 굳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의 의지입니다. 룻은 하나님께 선택된 거룩한 민족의 일원이 되려는 굳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룻에게 있어, 이 문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시아버지가 죽고, 남편이 죽고, 집안의 기둥들이 모두 사라진 이 폐허와 같은 집안이라 할찌라도 여기를 결코 떠날 수 없는 분명한 이유. 그것은 나오미의 겨례인 이스라엘, 나오미의 하나님이신 바로 그 하나님. 그 분이 계신 곳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룻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가 느꼈던 바로 그 문장을 다시 읽어봅시다.
룻기 1: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4. 당신의 믿음은 선택하게 하는가?
우리는 저번 주에 시험 봤습니다. 시험을 충격적으로 잘 본 몇몇 친구들도 있었고, 충격적으로 이상하게 적은 친구들도 눈에 보였습니다. 시험은 왜 보는 것일까요? 이것이 측정할 수 있는 영역은 무엇이겠습니까? 네. 지성의 영역.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게 믿음이에요? 많이 알고 시험 다 맞으면 그 사람의 믿음에는 문제가 없는거에요?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시험을 본 아이가, 마음으로 느꼈어요. 하나님을 향한 감정적 동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눈물이 주르륵 났어요. 그럼 그 아이는 정말 믿는거에요? 느꼈으니까 끝난거에요?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진짜 믿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주르르 나는 것은 한 낯 드라마를 봐도 가능한 일입니다. 눈물 콧물 다 쏟아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많이 봤고 저 역시 많이 겪었습니다. 감정에서 그치는 믿음은 역사가 없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의지'입니다. 하겠다는,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마음. 똑같이 알고, 똑같이 느껴도, 이 의지없으면 선택은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느끼며, 그 뜻대로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마음입니다. 여러분 안에 의지가 있습니까? 이 말씀을 향한 의지. 살아내겠다는 굳은 마음. 여러분이 알고 느낀 것에 대한 의지가 있냐는 말입
니다.
성경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조화를 믿음이라 부릅니다. 안다고도 믿음이 아니요, 느낀다고 해서 진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행동만 하고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 알고 느끼고 하려고 하는 의지가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자 해야 할 것이요, 느끼지 못하는 자는 더 기도해야 할 것이요, 의지가 없는 자 더욱 더 입술을 깨물고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알고자 하기를 그칠 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느끼지 못하면서 느끼려고 하지 않는 것이 화인맞은 양심인 것입니다.
의지가 없어 행함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알고, 느끼고, 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선택하게 하는 마음의 구조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하고자 해야합니까? 하나님을요. 이것만이 바른 선택입니다. 오늘 오르바가 보여주지 못했던, 룻이 보여주는 선택 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분을 정말로 알고 싶은 지성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 분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 분을 느끼는 감성입니다. 그래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찬양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느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성령님에 대한 믿음은 그 분의 뜻대로 살려는 굳은 의지 입니다. 그래서 삶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선택입니다. 말씀을 선택하게 하고, 찬양을 선택하게 하며, 기도를 선택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게 합니다. 참된 믿음은 선택하게 합니다.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거 가짜 입니다. 선택하게 하는 믿음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지성, 감성, 의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선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거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생각해봅시다. 내가 알고, 느끼고, 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내가 신라면을 끓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만 저는 신라면을 끓이는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신라면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맛있겠다고 느껴야 하며, 그것을 사겠다는 의지가 없이 어떻게 슈퍼에서 신라면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알고 느끼고 하고자 하는 것은 선택의 필수요소 입니다. 이 말은 곧, 알고 느끼고 행하는 것. 여러분의 믿음에 이것들 중 하나라도 빠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신라면을 선택한 것과 동일한 메카니즘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을 마음에 떠올려 보십시오. 여러분의 예배, 여러분의 기도. 여러분의 찬양. 여러분의 하루하루의 삶, 여러분 정말 믿음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며, 하나님을 느끼려고 하며, 하나님을 살아 내려고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 하게 하는 믿음이냐는 겁니다. 혹여나 병들고, 조화가 깨져버려서 삶속에서 하나님의을 선택하지 않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늘 자신의 구원을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기에 말씀이요, 참 믿음은 하나님을 느끼고자 하기에 찬송과 기도요, 참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기에 매일의 사람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아멘이십니까?
'2011年 > 2. 창조와 타락, 그리고 예표와 불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어진 거울들 XII - 언제나 사랑과 죄의 갈림길(마태복음 25:32~46) (0) | 2014.05.04 |
---|---|
[외전] 깨어진 거울들 외전 III - 생명의 법 아래로(룻기 2:2~4:10) (0) | 2014.05.04 |
[외전] 깨어진 거울들 외전 I - 먹고 사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룻기 1:1~3 ) (0)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XI -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걸음(잠언 16:1~10 ) (0)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X - 쓰임받고 버림받는 자 (0) | 2014.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