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아홉번째 말씀


깨어진 거울들III

-불완전한 자가 외치는 완전한 이름


로마서 10: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0. 지난 이야기


  우리 이때까지 배웠던 내용들을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이야기 이후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사실 이 새로운 시리즈의 이름을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드디어 괜찮은 이름을 만들어냈습니다. '깨어진 거울들' 입니다. 구약 사람들을 저는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깨어진 거울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인물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예표입니다. 예표는 곧 예고입니다. 누구를 예고하고 있습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이 사람들은 거울입니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온전한 거울들이 아닙니다. 깨어진 거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언제나 옳은 선택만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불완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깨어진 거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지만, 완전하게 보여줄 수 없었던 깨어진 거울들. 우리는 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에 첫번째로 여호수아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다음의 그림을 볼까요?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것들을 한 눈으로 정리해봤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제 그 선택받고 말씀받은 인간은 그 말씀에을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하나님께 선택받고, 말씀받은 자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을 인정하지 않고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설령 행동은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순종이라 볼 수 없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 좀 밖에 버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가기가 싫어요. 지금 메이플 렙업하는 중이거든. 그런데 자꾸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 좀 밖에 버리고 오라고 그러십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음식물 쓰레기를 손에 쥐고 나가죠. 기분은요? 더럽습니다.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죠. '아. 왜 자꾸 나만시키냐?' 이거 누구 얘기게요? 제 얘깁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이것을 참된 순종이라고 부를수 있는가? 아닙니다. 몸이 움직이고 있다고 순종이라면, 억지로 시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그것이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마음으로부터! 말씀의 순종은 어떤 마음으로 부터 시작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순종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진정한 순종은, 말씀을 그 예수 그리스도로를 사랑함으로 시작된 마음과 그 마음으로부터  움직이는 행동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듣고 믿어서 행동하는 것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의 요체입니다. 무엇을 듣습니까?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진짜 모습입니다.


  여호수아는 오늘 이 그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그저 몸만 움직이는 기계가 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 순종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여호수아, 그리고 그 여호수아가 만난 것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1. 전쟁은 누구의 손에 있는가?


여호수아 6:18

너희는, 전멸시켜서 바치는 희생제물에 손을 댔다가 스스로 파멸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라. 너희가 전멸시켜서 바치는 그 제물을 가지면, 이스라엘 진은 너희 때문에 전멸할 것이다. 모든 은이나 금, 놋이나 철로 만든 그릇은, 다 주님께 바칠 것이므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님의 금고에 넣도록 하여라."


  여러분, 이것은 여리고성 전투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여리고성을 다 멸하고, 얻게 되는 제물을 다 주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난하거나 돈이 필요하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어떠한 필요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분은 그 분 자체로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리고 성 전투를 통해 얻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가르쳐주십니까? 여리고성 전투의 승리를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여리고성 전투의 시작은 말씀이었고, 그 끝도 말씀이었습니다. 그 전투의 처음과 끝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전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셨고, 또한 이 전쟁의 승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리고성 전투를 통해 얻은 모든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이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사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싸우셨습니다. 사람은 승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단, 사람은 승리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구원의 그림입니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늪에서 사람은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죄로 가득한 삶은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단지 인간은 누군가, 다른 존재가 완성해 놓은 구원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반드시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신 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다. 그것만이 사람의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전투의 승리로 기뻐할 때 혼자 비밀스럽게 무엇을 숨기고 있던 자가 있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자가 하나님임을 온 몸으로 부인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자의 이름은 '아간'입니다.


여호수아 7:1

이스라엘 자손이, 전멸시켜서 주님께 바쳐야 할 물건을 잘못 다루었다. 유다 지파에서,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전멸시켜서 주님께 바쳐야 할 물건을 가져 갔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셨다.


  이것은 단순히 아간이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라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서두에도 얘기했지만, 성경은 바른생활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아간을 통해서 우리가 봐야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닙니다. 구원의 그림입니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곧 자기 인정입니다. 하나님 부인입니다. 지금 아간의 모습은 단순히 도적질을 했다 정도가 아닌, 하나님이 승리자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리고성 전투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처음과 끝이십니다. 이 전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분만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실 수 있었습니다. 설령 아간이 이것을 머리로 인정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의 행동은 전면적으로 이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나, 방구석에서 마우스만 누르고 있는 행동만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는 어떤 아이처럼 말입니다. 말이 아닌, 행동이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전쟁의 전리품들을 몰래 숨겼던 아간의 행동은 하나님을 이 전쟁을 이끄신 단 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몫을 챙긴다는 것은, 그 전쟁의 공로가 하나님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인정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자기가 높아집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여러분이 한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을 학생들에게 던졌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돌아오는 답변이 "네" 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는가를 여실히 보려줍니다. 여러분, 이것은 기독교 진리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힘겹게 골고다를 오르셨을 때 여러분은 무엇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죄의 무게에 짓눌려 계실 때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구원의 처음과 끝입니다. 구원의 모든 공로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멘?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공로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그 승리에 우리가 참여할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취가 아닌 참여입니다. 무엇으로요? 믿음으로요. 그러나 아간의 그림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도 있지만, 자기가 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영생을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유일한' 이라는 말에 다른 존재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 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아간은 구원의 전리품을 취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승리자의 것입니다. 구원의 영광. 이것은 사람이 받아서는 아니됩니다. 


2. 자기를 인정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아이성 전투


  그리고 이제 문제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아이성 전투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간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아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수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저번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여호수아는 신명기 20장에 나오는 전쟁의 원칙들을 무시했습니다. 대적을 만나면 먼저 화평을 청해고, 화평에 응했을 경우에는 말씀의 통치, 그러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성을 둘러싸고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멸시킨다는 원칙이 아이성 전투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여호수아 7:1)" 아이성을 정탐하고 돌아왔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여호수아 7:3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천 명이나 삼천 명만 올라가도 아이 성을 칠 수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성을 치느라고 다 수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간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도, 정찰갔었던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이 전쟁이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에 의한 자신들의 전쟁이라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인하여,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해야할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을 인정하여,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그 결과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철저한 패배. 그 큰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기세등등했던 이스라엘은 사람도 많이 살고 있지 않았던 아이성 앞에서 혼비백산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요?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이성에게 패하게 하셨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이성과 이스라엘을 통해 인간의 구원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보여주려고 하는 바, 인간의 구원은 결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승리를 쟁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끝은 끝이 아닙니다. 끝이 없는 끝. 오직 시간을 넘어서시는 그 분만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게 하십니다. 그 분의 공로입니다. 그 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지 우리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승리에 참여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때, 인간은 썪습니다. 


3. 불완전한 자가 외치는 완전한 이름


  좀 더 내용을 깊게 살펴봅시다. 아이성 전투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을 인정하며,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죽임당하고, 여호수아는 다시 아이성을 공격할 수 있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상합니다. 왜요? 무엇 때문입니까?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 똑같이 불순종의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선택하신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를 통해 보여주시려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다음 우리가 읽으려는 구절은 아이성 전투 패배 직후 입니다.


여호수아 7:6~9

  여호수아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주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저녁때까지 있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그를 따라 슬픔에 젖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여호수아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우리 백성을 요단 강 서쪽으로 잘 건너게 하시고는, 왜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기어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차라리 우리가 요단 강 동쪽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좋을 뻔하였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이 원수 앞에서 패하여 되돌아왔으니,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나안 사람과 그 땅에 사는 모든 주민이 이 소식을 듣고 우리를 에워싸고, 이 땅에서 우리의 이름을 없애 버릴 터인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위대한 명성을 어떻게 지키시겠습니까?"


  지금 이 기도는 바르지 않죠? 지가 잘못해 놓고서는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슬픔의 이유를 잘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이 패배했습니다. 그것이 뭐요? 왜 이스라엘이 패배했는데, 여호수아는 죽을 것처럼 슬퍼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여리고성 전투에 승리한 뒤 등장하는 구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수아 6:27

주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의 명성이 온 땅에 두루 퍼졌다.


  온 땅이 여호수아에 대한 소문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며? 글쎄, 싸우지도 않고, 성을 돌았데.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나라에서 나라로, 민족에서 민족으로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명성, 여호수아의 명성은 곧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성과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명성은 곧 하나님의 명성이었습니다.


  아이성에서 패배한 뒤 여호수아는 슬퍼했습니다. 자신이 졌기 때문에요? 자기가 세상의 놀림이 될까봐요?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슬퍼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로 인해, 하나님의 명성을 잃은 것. 그것이 여호수아를 슬프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쇄가 아닌, 하나님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죽을만큼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구원의 그림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의 이름. 여호수아는 완전히 순종할 수 없었던 불완전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여호수아는 완전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자의 입에서 선언되는 완전한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이것입니다. 여기에 아간과 여호수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했을 때, 아간이 잡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배했을 때, 여호수아가 잡았던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명성, 주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인간이 말씀 앞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던 것은,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아간과 여호수아. 이 둘이 보여주는 구원의 그림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깨어진 거울입니다. 누구나 말씀에 순종할 때도 있지만, 불순종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표하나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완전이 확인되었을 때, 우리가 승리할 수 없는 사람임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버림받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쎼컨 챈쓰, 새로운 시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여호수아의 부당한 기도 속에 드러났던 단 하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한 분만 높임 받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버림받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그 위대한 이름에 의지했을 때 우리에게는 다시 새로운 시작이 주어집니다. 불완전한 인간, 여호수아에게는 이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오늘 예수쟁이들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한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의 가슴을 찢고,  오직 주의 이름의 영광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다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다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시작하게 하실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주의 이름에 의지하여 다시 예표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불완전을 완전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내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내 걱정이 변하여 내 노래가 되고, 내 수치가 나의 영광이 되는 것.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불완전을 완전케 하시는 그 분은 쉬지 않으십니다. 그 분의 역사에 우리는 참여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한 그 이름을 의지함으로 말입니다.  


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아이성 전투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 전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아이성 전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성을 포기하신 것이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의 위대한 명성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지 않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이성 앞에서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성과 연결되있던 이스라엘의 명성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덩달아 하나님의 명성도 같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왜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시면서 까지 이스라엘을 아이 앞에서 패배하게 하셨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며, 하나님만이 불완전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그 분은 자기의 명성을 포기 하십니다. 그 분은 낮아지십니다. 그리고 그 낮아지심은 곧 십자가의 예수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확인시켜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그 분을 우리는 높여드려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더불어, 우리가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절망의 돌덩이에 맞아 질식사해야하는 아간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힘든 사람들이 있음을 제가 압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하찮은 사람의 위로나, 싸구려 동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사람에게 지금 위대한 이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우리의 반석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절망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을 깨달았을 때, 당신은 불완전을 완전으로 이끄시는 그 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건지시는 그 분의 이름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불완전을 완전으로 이끄시는 그 분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어봅시다. 우리의 삶을 다 드려 높여드려야 할 단 하나의 이름. 그 이름,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름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버림받지 않는, 율법의 저주를 관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명성을 버리신 그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0: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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