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교회 초등부 여덟번째 말씀
깨어진 거울들II
-완전한 인간은 없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0. 지난 이야기 - 예표
우리 지난 주 이야기들을 생각해봅시다. 구약의 인물들을 살피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도덕책도 아니고 위인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사람의 불완전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가지 중, '예표'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예표라는 말은 예고와 같은 말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그들을 통해서 완전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예고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선택되어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순종하든, 순종하지 않든 그리스도는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단, 순종했을 경우, 그 순종한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며, 그 순종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 즉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경우, 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며, 말씀에 불순종한 그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과 불순종의 경계에는 자기부인이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곧 예수 인정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이 예수를 인정할 수 있고,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의 진정한 순종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구약의 첫번째 사람으로 여호수아를 만났습니다.
1. 여리고 성 이야기를 통한 예표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선택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의 다른 말입니다. 자기부인은 곧 예수인정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만,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여호수아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여호수아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자신은 그 승리 가운데 동참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여리고성 이야기입니다.
대적과 싸우려 할 때에
여리고성 정복에 앞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과 싸우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신명기 20장 10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신명기 20:10~13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어떤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먼저 화평을 선언한다.
둘째, 화평하기를 원한다면 그 성 주민들로 말씀 받는 자를 섬기게 한다.
셋째, 만약 화평하기를 거절한다면, 성읍을 에워쌓고
넷째, 하나님께서 그 성을 우리의 손에 넘기시면, 그 때 전쟁하여 다 멸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호수아는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었죠.
출애굽기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외우고 지키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당연히 우리가 읽었던 신명기 20장을 모를 리 없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알고 있죠. 하나님께 선택받은 여호수아는 말씀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네. 순종해야죠. 자기를 부인함으로 말입니다.
2. 여리고성 전투에는 말씀과 자기부인이 있었다
이제 여호수아가 신명기 20장의 말씀을 알았다는 사실을 염두해두고 여리고성 전투를 살펴봅시다. 여호수아 5장 13절입니다.
여호수아 5: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에 눈을 들어서 보니, 어떤 사람이 손에 칼을 빼 들고 자기 앞에 서 있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의 원수 편이냐?"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났습니다. 여호수아가 질문합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 원수의 편이냐?" 이 말은 곧, "너는 우리와 화평하길 원하는냐? 아니면 우리와 적이 될 것이냐?" 를 묻는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만난 사람이 여호수아와 화평하길 원한다면, 전쟁을 치르지 않을 것이요, 싸우길 원한다면 이제 여호수아는 그 성읍을 둘러 쌓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여리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왜 여리고 앞에서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만났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와 싸우려고 하십니다.
그 다음 6장 1절을 봅시다.
여호수아 6:1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자손을 막으려고 굳게 닫혀 있었고,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여리고는 이스라엘과 화평하려고 해요? 싸우려고 해요? 네. 싸우려고 합니다. 이제 그 다음 플랜을 밟아야죠. 그 다음 플랜은 무엇입니까? 성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요?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6장 2절부터 5절까지 봅시다.
여호수아 6:2~5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너의 손에 붙인다. 너희 가운데서 전투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엿새 동안 그 성 주위를 날마다 한 번씩 돌아라. 제사장 일곱 명을, 숫양 뿔 나팔 일곱 개를 들고 궤 앞에서 걷게 하여라. 이레째 되는 날에, 너희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동안 성을 일곱 번 돌아라. 제사장들이 숫양 뿔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백성은 그 나팔 소리를 듣고 모두 큰 함성을 질러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때에 백성은 일제히 진격하여라."
어때요? 말씀대로 해요? 안해요? 여호수아는 이미 말씀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지금 명하시는 것은 하신 말씀 그대로 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것은 여리고 성을 그저 빙빙 돌기만 하는, 상식을 벗어난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자신의 방법과 고집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에 자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셨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승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리고성 전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여호수아는 자기부인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를 통해,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수아의 삶을 통해 예고되셨습니다.
3. 아이성 전투에는 말씀도 자기부인도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이와 정 반대의 경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아이성 전투를 통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살펴볼 때 반드시 기억해야할 두 번째 특징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 특징은 바로 '불완전' 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이름처럼 예수님을 예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함으로, 말씀에 순종했던 여호수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예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예수님이 예고되었을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여리고성 전투입니다. 그러나 아이성 전투는 다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예고편이지, 본편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아이성 전투가 보여줍니다.
여호수아서 7장을 봅시다. 여기보면 아이성이 등장합니다. 7장 1절에서부터 5절까지 읽어보세요.
여호수아 7:2~5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베델 동쪽 벳아웬 곁에 있는 아이 성으로 사람들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고 지시하니,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 성을 정탐하였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천 명이나 삼천 명만 올라가도 아이 성을 칠 수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성을 치느라고 다 수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백성 가운데서 약 삼천 명이 그리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아이 성 사람에게 패하여 도망쳐 왔다. 아이 성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을 서른여섯 명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추격하여 비탈길에서 그들을 쳤으므로, 백성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안에서 우리가 조금 전에 읽어봤던 신명기 20장의 원칙들, '대적과 싸우려 할 때에' 주신 말씀의 흔적을 찾아 봅시다. 찾을 수 있습니까? 아이성을 만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아이성 사람들에게 화평을 청했습니까? 그리고 나서 싸우게 되었다면. 아이성을 포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는 것을 신경이나 썼습니까? 아닙니다. 아이성 전투에는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죠. 정확히 말하면, 말씀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여호수아는 자기부인으로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여호수아 앞에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십니다. 여리고성과 싸울 때 가장 처음 나오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서 6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입니다. 그러나 아이성과의 싸움에는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씀 앞에 자기부인할 줄 모르는 여호수아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뿐입니다. 그렇게 사람에게 말씀이 말씀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전투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충격적인 패배. 너무나 작고 초라한 아이성조차 하나님 말씀 없이는 이길 수 없었던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몰랐던, 그리고 말씀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여호수아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던 인간은 그리스도께 인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여호수아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수아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수아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죠? 그리고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즉 한 명이 아닌, 다수가 여리고성 때 얻은 물건을 마치 가지 것인양,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중에 갈미의 아들 아간도 끼어 있었습니다.
4. 여호수아는 버림받았는가?
그리고 우리가 배운 바대로 하면, 여호수아 함께 범죄한 이스라엘은 버림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하려 했던 여호수아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버림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말씀이 여기서 이렇게 끝난다면, 우리는 대단히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대로 완전히 살아낼 수 없잖아요. 우리도 여호수아와 별반 다르지 않잖아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 역시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이성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그에게는 또다른 시작이 주어졌습니다. 왜요? 다음 구절을 확인해봅시다.
여호수아 7:6,7
여호수아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주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저녁때까지 있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그를 따라 슬픔에 젖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여호수아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우리 백성을 요단 강 서쪽으로 잘 건너게 하시고는, 왜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기어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차라리 우리가 요단 강 동쪽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좋을 뻔하였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이 원수 앞에서 패하여 되돌아왔으니,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나안 사람과 그 땅에 사는 모든 주민이 이 소식을 듣고 우리를 에워싸고, 이 땅에서 우리의 이름을 없애 버릴 터인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위대한 명성을 어떻게 지키시겠습니까?"
아이성 전투에 패배했던 여호수아는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잘 읽어봅시다. 지금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땡깡 부리고 있습니다. 정작 말씀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본인에게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를 지게 하셨습니까? 왜긴 왜입니까?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여호수아의 잘못입니다. 즉, 지금 여호수아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옳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대목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7장 9절입니다.
여호수아 7:9
가나안 사람과 그 땅에 사는 모든 주민이 이 소식을 듣고 우리를 에워싸고, 이 땅에서 우리의 이름을 없애 버릴 터인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위대한 명성을 어떻게 지키시겠습니까?"
주님의 위대한 명성! 이것이 전쟁의 이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여행의 이유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삶의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 전쟁하는 것은 여호수아의 이름을 위해서 치르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잘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아지는 것. 여호수아가 실패했을 때 붙잡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명성, 주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부당한 기도 속에 드러났던 단 하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한 분만 높임받으시는 것.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버림받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주의 이름. 그것에 의지했을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 여호수아에게는 이것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이러한 견지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불완전한 인간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어요. 그 때 우리는 버림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에게 다시 말씀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또 다른 자기부인의 이름은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의지했을 때, 그 이름의 공로와, 그 이름에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다시 한 번 완전을 향한 모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 이름만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말씀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보여줍니다. 자기 부인에 실패한 인간에게 새로운 시작은 개인의 공로나 결단이 아닌,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주어집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에 의지하여 기도했을 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기회 역시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 했을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명성을 위한 것임을 고백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인정한 자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성결하라!" 그 말씀을 통해서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십니다. 다시 한 번 아이성을 칠 수 있게 하십니다.
5. 심판자 그리스도
한편으로는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실 차례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심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간이 누구입니까? 여리고성 전투때 얻은 전리품들을 자신을 위해 챙겼던 '자기 의'의 화신입니다. 사람은 알지 못했던 아간이,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 하셨을 때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의 죄를 드러냈고, 그렇게 드러난 아간은 아간은 말씀 앞에서 심판 받았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죄들이 드러난다는 것, 둘은 그렇게 말씀 앞에 드러난 죄는 반드시 심판자이신 그 말씀 앞에서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와 아간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여호수아나, 전쟁을 통해 얻은 물건들을 탐내고 숨겨뒀었던 아간이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말씀 앞에서 불순종했다는 사실은 매양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와 아간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의 공로입니다. 여호수아는 비록 불순종했으나, 그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생긴 패배에 대해서 가장 먼저 걱정했던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아간은 정 반대입니다. 아간은 말씀 없는 자의 전형입니다. 말씀대로 싸워 이겼을 때, 아간이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자신의 이름과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싸웠던 아간의 최후는 말씀 밖으로 쫒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정죄당해 죽임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간은 말씀 없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인간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의 경우와는 다르게 아이성에서의 여호수아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판단을 믿고 3000명을 아이성으로 보냈을 뿐입니다. 그 결과, 말씀없는 전투 속에서 이스라엘은 참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패배의 전범이었던 여호수아는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의 이름!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도 자기부인이요, 말씀대로 행하지 못했어도 자기부인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쎄컨 찬스를 부여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인정하는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부인의 위대한 여정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2011年 > 2. 창조와 타락, 그리고 예표와 불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어진 거울들 VI - 그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사사기 7:1~22 ) (0) | 2014.05.04 |
---|---|
깨어진 거울들 V - 다른 이름은 없다(사사기 6:7~28) (0)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IV - 주님이 보시는 앞에서(사사기 6:1~15 ) (0)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III - 불완전한 자가 외치는 완전한 이름(로마서 10:13) (0) | 2014.05.04 |
깨어진 거울들 I - 자기부인은 곧 예수인정(누가복음 9:23, 디모데후서 2:13 ) (0) | 2014.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