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 주일학교 마흔 여섯 번째 설교


누가복음 4:24~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예수님의 기도 외전 1

- 사르밧 과부 이야기


0. 삶의 자리에서 '호외'요!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호외!'했어요?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나요?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손길을 내미셨나요?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나요?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을 지나 그 위대한 '누가복음 4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다가 누가복음 4장 26절에서 턱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옛날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설명하셨는데, 우리는 이 옛날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을 말씀하셨을 때 하셨던 그 옛날 이야기를 우리도 같이 들어보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시돈에 살고 있다는 사렙다의 과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 엘리야 '선지자'의 등장!


  옛날, 이스라엘에 엘리야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이에요. 이 사람 선지자 입니다. 선지자는 먼저 선, 알 지, 먼저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서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에게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거요."

  

2.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왜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을까요?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어떤 우상이냐 하면 생산의 신. 풍요의 신입니다. 즉, 사람을 부자 만들어 주는 신입니다. 원래 바알은 이스라엘의 신이 아니었어요. 아합이라는 왕이 왕비로 들인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열렬한 바알의 숭배자였어요. 그래서 그 여자를 통해서 이스라엘도 바알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바알의 뜻은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거에요. 그게 전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제사지내고, 그 제사가 나중에 어느 정도까지 악해지냐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산채로 죽여서 그것으로 제사지내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잘 살수 있다면 그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렘19:5).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럼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만 섬기자' 이렇게 했느냐.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 없는 민족이에요.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구름기둥, 불기둥등 수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잊을리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눈 앞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그럼 여러분들이 그걸 잊어버릴리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식들은 그걸 또 모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계신 걸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어요.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착각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오해한 거에요. 그러나 그 하나님을 다른 분으로 착각하는 것, 오해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까지 고백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바알이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오해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신 겁니다. 하나님을 착각하는 것.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신 거에요.

  그래서 우리도 우상숭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거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을 오해한다면, 잘못 알고 있다면,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 못한 것, 그것은 바알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엘리야를 보내 비를 내리지 않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왜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비가 안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곡식이 안자라겠죠? 그럼 부자가 될 수 있겠어요?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이 원했던 것처럼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어요? 풍요와 생산의 신인 바알한테 숭배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어? 이게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이 바알인 줄 알고 열심히 섬기면 잘 먹고 잘 살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네? 이렇게 오랫동안 비가 안오는 걸 보니 우리가 뭔가 잘못했나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신가보다.' 이래야 정상 아니겠어요? 하나님께서 비가 안내리게 하시는 것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바알은 내가 아니야. 난 너희들을 부자로만 만들어주는 그런 신이 아니야. 너희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야" 그걸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엘리야의 이름의 뜻,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처럼, "바알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시는 여호와께서 진짜 하나님이다" 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어요. 비가 내리지 않는동안, '아 하나님은 풍요롭게 해주는 바알과 다른 분이시구나' 이걸 깨달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엘리야가 비를 못오게 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합니다.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했던 엘리야를 쫒아냅니다. 그리고 계속 바알을 섬깁니다. ‘언젠가는 잘 먹고 잘 사는 날이 오겠거니...’하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계속 헛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을 바꿀 생각을 안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엘리야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옳은 말했다가 죽임 당할지도 모르는 지경에 처했어요. 그래서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이 곳을 떠나서, 동쪽으로 가거라. 그리고 거기 요단 강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지내며, 그 시냇물을 마셔라. 내가 까마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게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말했지만, 사람들의 미움을 받은 엘리야는 숨어지내면서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보내주시는 빵과 고기로 연명했어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삽니다. 바른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어떤 친구를 괴롭힙니다. 그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그러면 안돼!"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괴롭히는 친구들은 오히려 나를 미워할 지도 모릅니다. 나를 괴롭힐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지 언정 그 뒤는 하나님이 보장해주십니다. 그것이 엘리야의 까마귀 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세상의 멸시 천대 받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위로와 돌봄. 그것이 엘리야의 까마귀인 것입니다. 그 엘리야의 까마귀는 진리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서, 그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한 일들, 못된 일들을 말하는 사람은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합니다. 엘리야가 경험했던 까마귀와 같은 위로를 경험합니다. 


4. 느닷없이 이웃 나라의 과부에게로 보냄 받은 엘리야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시던 하나님께서 느닷없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이라는 동네에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어."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로 갈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갔다가는 맞아죽을지도 모릅니다.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왜 비를 안오게 했냐고, 당장 엘리야를 죽일 심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동네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하셨고, 그 외의 다른 민족들은 다 불결하고, 더럽고,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들이 더럽다고 말하는 그 이방동네로 가야했습니다. 자기가 가야할 곳에서 선지자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나만 잘되길 바라는, 자기 배만 불리려는 왕과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불결하다 여기고, 가기를 원치 않는 곳으로 엘리야는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사르밧이라는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에,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불러서 말했어요. "마실 물을 한 그릇만 좀 떠다 주십시오."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여인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다시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그 밀가루 한줌과 기름으로 빵을 만드시요.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당신과,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그럼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했습니다. 음식을 만들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였던 엘리야를 먼저 대접했고, 과연 그 여인과 엘리야와 그 여인의 식구가 여러 날 동안 먹었지만,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시켜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5. 하나님 뜻대로 사는 한 사람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이 왜 였다구요?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죠. 그런데 그러한 이유로 비가 내리지 않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웃 나라 사람도 고통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사람이든 상관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닌 그 사르밧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 한 사람을 위해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르밧을 더럽다고 했습니다. 거긴 불결한 곳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뿐이고, 다른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의 착각이었습니다. 가장 더럽다고 생각했던 곳에, 가장 누추하다고 생각했던 곳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한 곳에서 남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과 자식이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했던 그 식량을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주었던 그 사람. 남을 위해서 마땅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 이 사람,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서 구해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 이스라엘을 벌주시는 와중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에 있는 한 사람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는, 그러나 남들이 무시하고 천대했던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부를 지켜주셨습니다. 언제까지? 비가 내릴 때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훈계가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는 한 끼도 굶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 그 뜻은 내가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도 잘되고 너도 잘되자는 게 아닙니다. 내가 너 대신 죽을테니 너는 살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 대신 손해 볼테니까, 너는 잘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망합시다. 내가 세상의 미움을 받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내가 굶더라도 다른 사람을 먹여서 우리는 망할지언정 다른 사람이 잘 되는 모습을 봅시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4장 12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쟁이의 마음입니다. 곧 우리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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