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 주일학교 서른 아홉번째 설교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의 기도 III

-그 이름의 거룩


  우리는 지금 어려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 길 하나뿐이라면, 다른 길은 없다면, 우리는 그 길에 아무리 돌 뿌리가 많아도, 물웅덩이가 깊게 패여 있어도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늘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몸은 흠뻑 젖어 찝찝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합니다. 집에서 빨리 더운물로 샤워하리라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걷고 또 걷습니다. 

  설교는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돈, 밥, 건강, 출세에 관해서 말하면 알아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 하자는 것은 사람의 계명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래서 좁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확실하다면 어려운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길이 쉽냐, 어렵냐가 아니라 끝까지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길이 좋다고 4차선 도로로만 다니면 집에 갈 수 없습니다. 때로는 골목길을, 때로는 비포장도로를 가야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껏 배운 것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봅시다.

  

  이 땅은 사탄이라는 이 세상 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탄은 탐욕과 이기심의 화신입니다. 그 유혹자가 처음의 사람이었던 하와에게 가르친 것은 바로 탐심(1.탐내는 마음 2. 부당한 욕심)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탐심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사람들의 변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탐심은 전염병처럼 인간을 좀먹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땅인 이 지구는 그러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어느 순간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에는 진정한 자유가 사라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좇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쫒아 쉼 없이 달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하나 둘씩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아들, 딸들이 또 그렇게 달리고, 또 지쳐 쓰러졌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는 이 땅은 곧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쉼을 잃어버린 사탄의 땅이었습니다. 

  그러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땅에 거짓과 탐욕을 몰아내시고, 다시 참되고 옳은 뜻을 가르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버려진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뜻을 가르치십니다. 마치 일본의 지배 아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과 같이,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독립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기도문! 이 주기도문은 사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입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탄의 나라가 되어버린 이 땅에서, 혁명을 일으킬 거룩한 독립군(resistance 점령군이나 침략자에 대한 저항 운동)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작전 명령입니다.


  그 작전명령은 그 작전명령을 내리신 분을 이렇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빠!"

  하나님의 작전은 사람이 보기에 그 시작부터 너무 허무맹랑한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자식이었던 우리를 통해 사탄의 나라를 뒤집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본 앞잡이였던 사람을 갱생시켜 일본을 이기시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사탄의 하수인에 불과했던-성경에서는 사탄의 아들들이라 말하는- 우리를 아들의 피로 덮으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인 우리를 '너는 이제 내 아들이다' 말씀하십니다. 피노키오에게 가죽옷을 입히고 “너는 사람이니 사람답게 살아라” 말하는 제페트 할아버지처럼, 늑대의 새끼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어린 양을 죽여 그 가죽을 덮어 주십니다. 그리고 너는 내 양이라 불러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아빠!"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해 가죽을 내어 주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방주가 되시사 세상의 거친 물보라의 채찍을 홀로 맞으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구원자가 되시사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셔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예전에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십계명은 십자가다> 연속설교 제3편이죠. 십계명 제3계명이 뭐에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십계명 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이 세상 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길과 빛과 진리 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2계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 말은 곧 예수님만 섬겨야 하는데, 그 분은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명이 드러납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지칭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물체나 사건이 아닙니다. 이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믿습니다. 그 이름에 구원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이라는 말의 의미는 '완전히 분리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거룩'은 하나님은 사람과 완전히 다른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조금 잔인한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어렸을 때 돋보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큰 아버지 집에 가면 어른들이 신문볼때 쓰시는 진짜 좋은 돋보기가 있었습니다. 좋은 돋보기와 나쁜 돋보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불을 금방 낼 수 있느냐, 없느냐, 그래서 밖에 나가서 검은색 색종이에다가 돋보기로 태양빛을 집중시키면 종이가 슬슬 구멍이 나고 타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불연듯 어린 재덕이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 개미도 검은색이잖아" 그래서 저는 그 날 이후 돋보기를 들고 밖에 즐겨 나갔습니다.

  그럼 개미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어떤 제 정신이 아닌 아이 하나가 돋보기를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개미집이란 개미집을 모두 부숩니다. 그리고 집밖으로 뛰쳐나온 개미들을 향해 돋보기로 레이져 광선을 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개미들의 절박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요? 여러가지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미는 지금 개미의 상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미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돋보기를 든 어린 아이 하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수준이시면 안됩니다. 개미가 개미를 구할 수 없듯이 사람은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분이셔야 합니다. 인간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분이셔야 합니다.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는 있겠죠. 하지만 율법의 저주를 감당해야할 운명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시체가 될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는 것. 죽음과 정면 대결해서 그것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 그것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분의 거룩입니다. 그 분은 거룩하십니다. 우리와 완전히 분리되신 죄가 범접할 수 없는 높으신 곳에 좌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는 말은 곧 하나님은 사람과 완전히 다르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보고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하다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여러분, 그럼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인간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시다’ 라는 말이 어떻게 느껴지세요?


  저는 대단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나님과 내가 너무나 달라서 그것은 마치 우주의 끝에서 우주의 또 다른 끝처럼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내가 만날 수 없으신 분만 같습니다. 그 분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내 삶을 봤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죄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너무나 멀리 계신 당신이셨던, 인간과 완전히 분리 되어 계신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저에게 다가오십니다. 아.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좁힐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거룩을 무너뜨리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아빠가 되어줄게”


  아니, 아빠가 되어주신다니요. 거룩하시어 우리와 완전히 다르신, 우리와 완전히 분리되신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한 분께서 나의 아빠가 되어주신다니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와 아빠라는 단어는 어울리는 단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도 많이 써서 우리 입에 붙어버린 이 단어, 거룩하신 아버지, 거룩하신 아빠.라는 말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결합입니다. ‘거룩’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빠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친근합니다. 아빠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의 볼에 얼굴을 부비시며, 우리를 번쩍 안아주시는 아빠는 우리와 너무 친합니다. 여기 아빠랑 안친한 사람있어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아빠랑은 친해야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아빠는 나랑 너무 닮았거든요. 나랑 좋아하는 게 닮았거든요. 나랑 먹는 것도 닮았더든요. 나랑 생각도 닮았거든요. 나랑 생긴게 너무 닮았거든요.


  그런데 우리와 완전히 다르신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빠’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닮지 않은 그 분께서 우리와 닮아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느낄 수 있게, 우리가 알 수 있게 우리가 볼 수 있게, 우리가 들을 수 있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그 거룩을 넘어오십니다.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께서 그 분리를 없애십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십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을 뒤로하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가 되어주십니다. 우리와 가족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아빠가 맞습니다.


빌립보서 2:6~1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거룩이란 말과 아빠라는 말. 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빠지만 거룩하신, 친하지만 다른, 낮은 곳에 내려오셨지만 가장 높으신, 그 분을 인정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시작이고, 이제 그 시작을 지난 사람들은 더 깊은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것은 ‘나라에 임하옵시며’ 즉 ,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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