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 주일학교 서른 여덟번째 설교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의 기도 II
-하나님 우리 아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무리 원고를 또 쓰고 이리 저리 고쳐 봐도 내가 하는 말들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제 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는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그러나 중요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다른 집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과 각자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주일 만에 모였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메이플 좀 하다가 부모님이 주시는 간식이나 챙겨 먹으면서 유희왕 카드 모으는 재미로 평생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운 정신병원, 아니 소아과를 추천해드립니다. 그런 사람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거에요? 우리가 오늘 들었던 이 질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왔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서 살던 사람들 역시 이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는 사람들끼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담아 기도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기도문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기도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넣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이루려고 생각했지, 정작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겁니까?” 이 질문은 사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나로호를 설계한 사람이 나로호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듯이,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해 올바른 답을 주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그 하나님께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예수님, 우리에게도 기도문을 가르쳐주세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6장 9절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도하라는 것은 무릎 꿇고 중얼거리기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질문이 단순히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되냐고 물었듯이,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수준을 넘어서 결국 이렇게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너희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니까 바로 이렇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그 다음에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얼마 전 어떤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전하고 나서 이제 기도하려고 아이들에게 마음의 무릎을 꿇으라고 하고 저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입술을 떼어 기도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래 아버지" 저는 그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우스운 친구들. 물론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서 저는 기도를 하다 말고 눈을 번쩍 떴죠. 그리고 아이들을 쥐어박고 다시 처음부터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아이들이 웃든 말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사실, 이 아버지라는 말은 다소 어색한 번역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우리가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바꿔서 아빠가 아니라, 그저 말 그대로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쓰셨던 아람어에서 아빠는 아빠abba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부르실 때에 우리와 똑같이 아빠라는 발음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아빠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말해주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독일에 사는 '요'자로 시작하는 어떤 아저씨의 연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답니다. 즉,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셨고, 그것은 당시 충격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을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자꾸 하나님이 자기 아빠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신이신데 자꾸 자기가 신의 아들라고 하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기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안불렀다? 아니, 못 불렀다. 죽을까봐. 그리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 엄청 중요하다.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 그럼 왜!?
왜긴 왜야?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시기 때문이지. 너희는 누가 목에 칼을 대면서 아빠더러 “아빠라고 부르지마. 아저씨라고 불러.” 그럼 "아저씨" 그럴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원한 거야. 그 관계는 죽어서도 깨어지지 않아.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시고,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십니다.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감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물어봐야죠. "그럼 우리는요?” 니넨 당연히 아들이 아니지. 아 물론 딸도 아니지. 아들은 예수님뿐이야.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이 우리는 애시당초 하나님의 아들, 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직한 현주소를 보자.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아비는 마귀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죄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자기의 삶을 곰곰히 반추해보면 알겁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죄인이고, 그래도 좀 깨달아지는 죄인은 좀 덜 죄인이고, 어쨋거나 죄인은 죄인일 뿐 의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명을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했습니다. 새싹을 돋아내기 위해 씨앗은 썪어야만 했고, 생명을 낳기 위해 부모는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무지개가 뜨기 전에는 폭풍우가 몰아쳐야 했습니다. 지구의 모든 믿는 자들의 영생을 위해서 죄 없는 어린양의 죽음이 필요했습니다. 종이었던 우리가 아들 되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가짜 아들의 생명 얻음에는 진짜 아들의 생명 버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잘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C.S.루이스라는 아저씨가 말하길, 우리는 예수 분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한 아들이 아닙니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야.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진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분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야곱이 몸에 털을 붙이고 아버지를 속이듯, 우리는 지금 늑대들인데 양의 털을 뒤집어쓰고 있는 거라는 소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아들로 '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양의 털을 뒤집어쓰고 있는 늑대들입니다. 의인이라고 칭함만 받은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럼 얘들아 하나만 물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를 누구로 보시겠어? 양의 털을 뒤짚어 쓰고 있는 우리를 양으로 보시겠다는 거니. 늑대로 보시겠다는거니? 양으로 보시겠다는 것이지. 그럼 그 말은 여기 서있는 윤재덕을 누구로 보시겠다는 거냐. 시계 팔아서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생각만 가득했던 윤재덕으로 보시겠다는 거니 아니면 나를 덮고 있는 피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으로 보시겠냐. 그래. 하나님은 나를 윤재덕으로 보고 계시지 않아. 나를 예수님으로 보고 계신거야. 나는 하나님에게 있어 또 하나의 예수야.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살거야. 여러분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아이를 하나님은 누구로 보시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 보십니다. 남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 갖는 것이 너무나 힘든 우리로 보시지 않으시고, 나를 모두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들이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어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신 진짜 아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너희 아빠야." 그럼 지각이 있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누구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전지전능하신 분을 아빠라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 이것이 제가 처음에 여러분들에게 물어봤었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의 시작입니다. 이것부터 시작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빠 되심을 인정하는 것. 여기서부터 크리스챤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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