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 주일학교 서른 여섯번째 설교
고린도후서 3:9~18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장 V
-영광에서 영광으로
오늘은 고린도후서 3장 이야기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애시당초 2번 내지는 3번으로 계획되었던 고린도후서 3장이야기는 무려 다섯번이나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중에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고 또 전할 말씀이 늘어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기 앞서 우리 이제까지 배운 것을 복습해봅시다. 우리는 첫 날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긴 그 복음이 귀하다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믿는다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대로는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치 천하의 명검을 집에만 걸어놓는 미련한 왕처럼, 진정한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자 자신 인생을 걸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복음의 가치를 모를 것이고, 이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도 정말 복음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헤깔려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혼잡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혼잡스럽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바로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보낸이, 하나님, 받는이, 세상 모든 사람들, 전하시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릴위해 죽으셨다는 그 아들의 복음을 우리를 통해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의문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문자로 써서 강제로 지켜야하는 헌 언약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너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으라고 윽박지르고 등 떠밀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자유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얻는 참된 자유를 전하는 편지를 억지로 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과정과 목적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싸구려 결과주의가 아닙니다. 자유는 자유로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저번 주에 모세의 얼굴에서 헌 언약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없어질 율법의 영광입니다. 없어질, 헌 언약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억지로 강제로 시키는 것도 때로는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에 비할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복음의 영광의 빛은 율법의 빛을 삼킵니다. 자유는 강제를 압도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봅시다. 고린도후서 3장 9절에서 18절입니다.
고린도후서 3:9~18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제 우리는 이 고린도후서 3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장 9절에는 두 개의 직분이 나옵니다.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죄의 직분은 무엇이겠어요? 네. 헌 언약. 율법입니다. 우리를 죽이는 사망의 법입니다. 억지로 지키는 법입니다. '정죄'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유죄판결 내리다'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발견하게 합니다. 그래서 정죄의 직분입니다. 우리는 이 율법이 없이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영광이 있습니다.
로마서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의의 직분은 이것을 초월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할 뿐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죽일 뿐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고 또 원하는 것, 우리가 갈망하는 그것은 의의 직분이고 이 의의 직분은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자유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어 마땅한 우리에게 의롭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사도행전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고린도후서 3장 10절을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영광이었던 율법은 더 큰 율법이 나타나서 이제 영광될 것이 없습니다. 마치 형광등이 태양밑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져온 진정한 자유는 모든 율법과 강제를 뛰어넘습니다. 영광이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나중 영광은 이전 것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없어질 율법도 영광이 있었는데, 영원히 있을 그것, 새 언약, 복음의 자유는 더욱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고후 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모든 율법을 뛰어넘어 찾아오는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입니다. 저 또한 이것을 간절이 바라며 여러분 앞에 담대히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번 주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안경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러분들에게 두 개의 안경을 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헌 언약의 안경이고, 다른 하나는 새 언약의 안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안경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의 율법, 글자로 쓰인 그 헌 언약을 받아서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은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 얼굴을 가린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이 없어질 영광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없어질 그 영광,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없는, 우리를 오히려 죽이는 그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얼굴에 수건을 드리웠습니다. 3장 14절을 읽어봅시다.
고린도후서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 옛 언약을 읽을 때 복음의 안경을 쓰고 보지 않고 율법의 안경, 헌 언약의 안경을 쓰고 본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율법의 없어질 영광을 감추기 위해 썼건 그 수건을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 위에 드리우고 율법에 갇혀 헌 언약에 갇혀 그리스도의 자유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자유로 해야할 일들을 억지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을 누군가를 시켜서 정죄해야 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의의 직분을 정죄의 직분으로 오해하는 것, 이것이 모세의 수건의 정체입니다.
사랑하는 얘들아, 그리고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이 수건을 거두어야 겠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예수를 믿으라 강요할 수 없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7살밖에 안먹은 아이의 마음을 바꾸는 것조차 저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하여 호소합니다. 마음을 바꾸십쇼. 이것은 그 누구도 해줄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사도바울은 이례적으로 두 번이나 말합니다. 14절에 이어 15절에서 반복하는 그 말은 '오늘까지' 오늘까지 '모세의 글'은 십계명이 율법을 대표하듯이 '모세의 글'이란 말 또한 구약, 율법, 헌 언약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오늘까지 구약을 읽을 때 마음에 수건을 드리워놓고, 율법의 안경을 쓰고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그러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그 희망은 바로 '주께 돌아가면',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질 것입니다. 강제로, 억지로, 율법으로 지켜야할 것이라 생각하던 그 모든 것들속에서 자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하지 않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리고 몸에 전율이 흐르게 하는, 바라기를 마다하지 않는, 18절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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