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 수요예배 오전설교
고린도후 3:6~18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Not Must, But Will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날의 약속이 있고 새로운 약속이 있습니다. 옛날의 약속은 구약이고, 새로운 약속은 신약입니다. 옛날의 약속은 글자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 글자대로 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법입니다. 이것을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를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1장 입니다.
출애굽기 21:12~17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지키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사망의 법입니다. 율법이 뭔지 알았죠?
그리고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이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모두 감당하시고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는 기쁜 소식이 곧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우리 죄를 사하시려 죽임당하시고 3일만에 살아나신 그 아들에 대해 기록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지금 말했던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해 놓은 성경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과 13절을 봅시다.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법. 곧 율법에 대한 내용이 옛 약속. 즉 구약이고,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아 받아야할 저주를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하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마당쇠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당쇠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주인마님이 마당쇠에게 말합니다. "마당쇠야! 저기 김대감댁에좀 갔다오렴" 여러분 이것은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 주인 마님의 종인 마당쇠는 이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키지 않으면 아마도 쫒겨날 것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그 명령은 율법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마님이 은혜를 베풀어서 종이었던 마당쇠를 아들삼습니다. 그래서 마당쇠는 하루 아침에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집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마님이 마당쇠를 불러 말합니다. "아들아. 저기 김대감댁에 좀 갔다오렴" 여러분, 마당쇠가 그 말을 안지키면 쫒겨날까요? 안쫒겨날까요? 안쫒겨납니다. 만약 엄마 말씀을 안듣는 아이는 무조건 집에서 쫒겨나야한다면 여러분들은 다 어디서 잡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이었던 마당쇠. 매일 무시당하고 천대받던 마당쇠. 그 마당쇠가 주인마님의 은혜로 아들이 되었는데 주인 마님의 말씀을 안지키고 응석부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그 명령을 지킬 것입니다. 주인마님에 대한 감사로 그 마음은 가득할 것입니다. 그깟 김대감님 댁에 갔다오는거 열번이면 어떻고 백번이면 어떻습니까? '자유'로 지켜낼 것입니다. 이 자유로 지키는 법이 '복음'입니다.
성경에는 수백가지의 지켜야할 율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아들삼아 주심으로 그 수백가지의 법을 하나로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봅시다.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여러분들에게 사랑, 남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을 그동안 계속 이야기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을 완성시키고 우리가 종이 아닌 아들임을 확인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식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종입니다.
요한일서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이제 이걸 알면 고린도후서 3장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이는 율법이 아닌 새 언약. 아들에게 주시는 자유로 지키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일꾼을 삼으셨다. 그런데 이것은 글자로 하지 않으시고 '영'으로 함이니 글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은 글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의문이라는 표현은 구약. 옛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쓰여있는 대로 지키지 않으면 죽는 그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후서 3장6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글자로 쓰인 율법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은 살리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사 삼일만에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으로 지키는 법은 죽이는 법이 아닙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살리는 법입니다. 강제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돌에 써서 죽게 하는 글자. 무엇이겠습니까? 네.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율법적으로,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이는 법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 우리를 죽게하는 옛 언약도 영광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28~33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율법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죽을까봐 억지로 지키는 그 법도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율법을 받아서 산에서 내려 올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 광채는 곧 율법의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쳐다볼 수도 없는 강한 빛이 모세의 얼굴에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종이라서 억지로 지켜야하는 그 율법도 얼굴이 빛나는 영광이 있는데 하물며 아들이 지키는 그 자유의 법. 사랑의 법은 어떠하겠습니까?
고린도후서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정죄는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죽이는 그 법도 영광이 있는게, 아들이 자유로 지켜내는 그 의의직분은 영광이 더욱 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그리고 그것은 영광의 끝. 궁극의 영광입니다. 자유로 지켜내는 사랑의 법은 영광중의 영광입니다.
고린도후서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모세의 얼굴 빛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끝났습니다. 그 끝날, 없어질 율법도 영광이 있었는데,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그 복음도 영광 가운데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후서 3:13,14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영광을 추구하고 강제로 하는 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 자유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없어질 것입니다. 십자가로 모든 율법의 속박을 끊어내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사도바울이 두 번이나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율법의 저주는 끊어지고 우리는 종이 아닌 아들이 되어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살수 있게 되었는데 오늘까지! 오늘까지! 모세의 글들을 읽으며 강제로 속박으로 율법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위안하는 단어가 보입니다. 언제든지. 언제든지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질 것입니다. 주께 돌아가면 그 must의 해야한다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니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에게 자유를 부어주십니다. 그 자유는 진짜 자유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우리의 공로 없이 의에 이르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수건을 벗읍시다. 수건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자유를 맛보는 그 사람은 점점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 변하여 율법의 영광에서 복음에 영광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Must가 아닙니다. Will입니다. 해야한다가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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