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 주일학교 서른 두번째 설교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린도후서 3장 I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자


  우리는 그 동안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들은 말씀만 자그마치 서른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로 시작해서 <십계명은 십자가다> 시리즈를 지나 저번 주 <바람아 불어라>까지, 우리는 많은 설교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저의 삶을 바라봅시다. 선포되고 전해진 말씀 뒤에 덩그러니 남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체같은 나의 삶을 바라봅니다. 많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해진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우리는 삶에 실패했습니다. 말하기 두렵지만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허울 좋게 말씀을 전하고 있으나 그 말씀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말씀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것이 나의 삶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저는 오늘 고린도후서 3장을 강해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설교의 청중은 여러분들이기 이전에 바로 저 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송장같은 나의 삶에 고린도후서 3장을 선언합니다. 이전까지 많은 말씀을 들었으나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진단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수술대위에 올려놔야 합니다. 수술은 아프고 견디기 괴롭습니다. 우리의 살을 자르고 피를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생은 수술이 아니고서는, 삶을 절개하여 그 악성 종양과도 같은 죄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메스를 우리의 삶의 환부에 깊이 찌르길 원합니다.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본문에서 말하는 '수다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말이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수가 많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 이것이 어떤의미 일까요? 

  '혼잡하게 하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장사하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을 보고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전도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들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참 가치를 가리는 사람들입니다. 

  

  '혼잡하게 하다'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이것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말씀의 질을 떨어지게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진짜 귀한 전설의 명검이 있습니다. 이 명검은 요정의 숲에 사는 드워프들이 저 멀리 어둠의 광산에서만 채굴할 수 있는 알류미늄을 가지고 수십년간 제작한 검중의 검이요. 전설의 검입니다. 가볍고 날카롭습니다. 그 어떤 것도 자를 수 있습니다. 이 검을 소유한 자는 천하를 지배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이 검의 위용은 대단합니다.

  이 검을 갖기를 사모하던 어떤 왕이 아주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검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그 검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 아끼고 돌봤습니다. 매일 닦고 문지르고 혹여나 기스라도 날까 조심조심 다뤘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벽에다 걸어놓고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 왕의 손에 들어간 검은 제 기능을 온전히 하고 있습니까? 그 검의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검의 가치는 기사의 손에서 드러납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드러납니다. 피로 젖지 않은 검은 검이 아닙니다. 애지중지 다루느라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검은 검이 아닙니다. 그저 벽에 걸어놓은 장식에 불과합니다. 그 천하의 명검은 벽에 걸려 그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오늘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저 일주일마다 한 번씩 듣는 지루한 교장선생님 훈화 같은 그런 이야기입니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어른들의 말들로 가득한 어려운 책입니까? 들어도 그만 듣지 않아도 그만, 듣는다 할지라도 살아낼 엄두는 나지 않는 그런 무미건조한 이야기 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그것을 외운 친구도 있겠죠.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대로 살아내지 않으면 벽에 걸린 명검과 똑같습니다. 살아내지 않는 복음은 그 가치를 상실합니다. 말씀은 그대로 살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름아닌 이 말씀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헤깔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나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헤깔리게 하고 논쟁거리가 생기게 합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합니다.


  얼마 전, 전교인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설교 때 목사님께서 여러가지 퀴즈를 내셨죠. 그리고 그 퀴즈에 대해 유초등부는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베드로가 예수님을 몇번 부인했냐는 질문에 2번이라고 말할 정도니까 말 다했죠. 그런데 여러분, 그게 중요합니까? 베드로가 2번 부인했든, 3번 부인했든,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이 무슨 차이를 가져옵니까? 바울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몰라도 됩니다. 베드로가 낚은 고기가 몇마리였는지 몰라도 되요. 괜찮습니다.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모두 통달한 귀신같은 사람 그러나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남을 사랑하는 사람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살아 내려는 애씀이 없는 말씀은 죽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설교자의 입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그 말씀을 들은 자가 그대로 살아내려 할 때 그 가치를 회복하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구장창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지난 8개월동안 들었던 것을 아주 짧게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남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을 갖자.” 

  그런데 누가 감히 나에게 이렇게 명령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감히 나에게 사랑해라 마라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그럴 수 없습니다. 말한다 한들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분이 와서 나에게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한들 그 사람은 나와 관련이 없다면 그 사람이 시키는 일을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곤 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따라가면 안돼. 말 걸어도 대답하지마" 네. 그 말씀은 아주 지당합니다. 옳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명령을 들을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으로 나를 사신 분의 말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나에게 영생을 주신 유일하신 그 분의 말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분의 말씀이라면 들어야합니다. 순종해야합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합니다. 이것이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분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자신을 아들로 받아준 주인 마님에 대한 마당쇠의 충성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 자연스러운 충성이 없는 사람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것이라는 이 자명한 진리가 인정되지 않는 사람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 처음은 마당쇠가 정말 주인 마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단계입니다. 즉,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삼아주셨나? 내가 신의 자녀인가? 라는 물음에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에 있어 반드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되었음을 딸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이 우주에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요나의 표적입니다. 십자가. 이것이 유일하지만 완벽한 증거입니다. 

  즉, 십자가를 증거삼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되었다는 이 사실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이 지금 전 우주가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기로이자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작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나셨습니까? 보혈을 지나셨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인정하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과 상관있으십니까? 여기 예수님과 남남인 분은 안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과 상관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상관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분이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십자가의 사건을 믿으신다면, 마땅히 그 분의 말씀에 삶으로 순종합시다. 우리의 자유로 기꺼이 순종합니다. 믿으신다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지 않으신다면 그렇게 하지 않하셔도 좋습니다. 단, 그렇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거짓말을 하지는 마십쇼.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나 복음대로 살지 않는 진실하지 않은 삶이 논쟁을 가져오고 변론을 가져옵니다. 세상 사람들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듭니다. 믿으면 순종하고 믿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믿으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균형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가짜입니다. 살아내지 않는 복음은 우리가 외우고 있는 구구단만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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