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바(Φ)리새인들이 떠나서 회의를 취했다, 어떻게 그이를 말 안에서 덜미를 잡을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은 그이에게 자신들의 제자들을 헤롯들과 함께 보냈다.
"선생이여, 우리는 당신이 참이라는 사실과 당신이 참 안에서 님의 그 길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누구에 관한 것도 관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들의 얼굴을 위해서 보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말하시오. 당신은 어찌 여깁니까. 카이사르에게 인두세를 주는 것이 적법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이에게 데나리온을 앞으로 가져왔다(봉헌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바로 이 형상과 새김이 누구에게 속했느냐?"
그들이 말한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때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신다.
"그러면 너희들이 그 카이사르의 것들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리고 듣던 이들이 기겁했고, 그이를 내두고 떠나버렸다.
[2]
바로 그 날에 ('다시 일어남'은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인들이 그이 앞으로 왔다, 그리고 그이에게 답변을 요구하며 물었다, 말하길,
"선생이여, 모세가 말했소.
'만일 누구든 자녀들을 갖지 않고 죽는다면, 반드시 그의 형제가 그의 여자와 관계를 가질 것이고 그가 그의 형제에게 씨를 다시 일어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칠 형제들이 우리 곁에 있었는데, 첫째가 결혼했다가 죽었고, 씨를 갖지 않았기에 그의 아내를 그의 형제에게 보냈소. 이와 같이 둘째도 셋째도, 일곱째들까지 그랬소. 그런데 모든 것들 이후 여자가 사망했소. 그러면 그 다시 일어남 속에서 여자는 그 일곱 중 누구의 것이오? 즉 모두가 그녀를 가졌는데 말이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답변하며 말하셨다.
"너희들이 속았다, 그래서 기록된 것들을 보지도 못하고, 그 님의 잠재력도 보지 못한다. 즉 그 다시 일어남 안에서는 (아내를) 취하지도 (딸을) 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하늘에의 님의 천사들처럼 있다. 그런데 그 시체들의 다시 일어남에 관하여 그 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그 이야기를 너희들이 깨닫지 못했느냐?
'바로 내가 아브라함의 님, 이삭의 님, 야곱의 님이다. 시체들의 님이 아니라, 산 사람들의 님이다.'
그리고 그 군중들이 듣고서 그이의 가르침 곁에서 충격을 받고 있었다.
[3]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그이가 사두개인들을 입다물게 했다는 것을 듣고서 바로 거기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한 율법연구자가 그이를 시험하며 답변을 요구하며 물었다.
"선생이여, 이 율법에서 어떤 류의 계명이 큽니까?"
그런데 그이가 그에게 말하셨다.
"'너는 주 너의 님을 사랑할 것이다, 너의 온 가온으로 그리고 너의 온 프쉬케 안에서 그리고 너의 온 생각 안에서.'
바로 이것이 큰 첫째 계명이다. 두번째는 이것과 같다.
'너는 너의 이웃을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할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 계명들 안에서 온 율법과 예언자들이 매달려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답변을 요구하며 물으셨다, 말씀하시길,
"당신들은 어찌 여깁니까, 그 메시아에 관하여. 그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그들이 그이에게 말한다.
"다윗의 아들이오."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신다.
"그러면 어찌 숨결 안에서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 부릅니까? 그가 말하길,
'주께서 나의 주께. 나의 오른편들로부터 앉으라, 너의 원수들을 너의 두 발들 아래 놓을 때까지.'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 부른다면, 어찌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이겠습니까?"
그리고 누구도 그이에게 말을 대답해줄 수 없었고, 바로 그 날로부터 누구도 그이에게 답변을 요구하며 묻기를 감행한 바가 더 이상 없었다.
그때 예수께서 그 군중들과 그이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말씀하시길,
"그 모세의 의자에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앉았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들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너희들은 행하고 지켜라, 그런데 그들에게 속한 그 일들에 따라 행하지는 말아라.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지만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거운 짐들을 묶고 이 사람들의 어깨들 위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자신들은 전혀 욕망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손가락으로 그 짐들을 움직이는 것에는. 그런데 그들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일들을 이 사람들의 보이는 곳을 향해 행한다...
오늘 본문은 '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말에 관련된 표현이 나오면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1]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말'로 붙잡고자 회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제자들을 헤롯 지지자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이 못된 놈들은 본인들이 가면 되는데, 본인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꼭 아랫 사람을 시킵니다. 게다가 그들더러 같이 가라는 헤롯당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유대인도 아닌 에돔 사람 헤롯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유대인들만의 세상을 꿈꾸는 바리새인들과는 물과 기름 관계인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바리새인이라면 헤롯당과 같이 있고 싶지 않을텐데, 본인들이 싫어하는 일을 제자들이랍시고 말로 잘도 시켜 먹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보낸 바리새인 제자들과, 또 그들과 함께 동행한 헤롯 지지자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예수께서 말을 잘못 했다간 덜미를 잡을만한 난처한 질문으로 말입니다. 바로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게 인두세를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2000년 전 유대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주제였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인구조사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머릿 수대로 세금을 걷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구조사를 하신 하나님의 백성이잖습니까?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니요. 이 일에 분노해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에 세금 내는 문제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헤롯 지지자의 입장은 어떨지 생각해봅시다. 바리새인은 민족주의자입니다. 당연히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인간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이 부당한 상황 앞에서 분연히 일어나자고 주장하겠지요. 반면 헤롯 지지자는 어떨까요? 헤롯 지지자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다름 아닌 헤롯 가문이 로마가 임명한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세금 논쟁에 대해서 정 반대편에 있는 두 집단이 예수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획한 이들의 속셈이 보입니다. 아마 이 두 집단이 함께 예수께 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 : '예수가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예수를 헤롯당과 마찬가지로 민족 반역자 취급하면 되겠구나.'
헤롯 지지자 : '예수가 세금을 내지 말자고 하면, 로마 황제에게 반역자하는 자로 신고해버려야지. 저 못된 바리새인 놈들과 한패일 거 아냐?'
예수를 죽이자는 공동 목적이 있어서 잠시 연합하게 된 이 견원지간의 사람들이, 일단 예수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입에 발린 말부터 시작합니다. "선생이여"라고 부르고, "당신이 참이니, 하나님의 길을 가르친다니" 합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겨진 욕망을 예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을 "휘포크리테스(ύποκριτης)"라 부르십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연기자'라는 뜻입니다. 휘포크리노마이(ύποκρινομαι)라는 동사에서 왔는데요. '휘포(ύπο)'는 '아래'라는 뜻이고, 크리노마이는 '판단하다, 결정하다(κρινομαι)'의 의미입니다. 즉 아래에서 이미, 결정한 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치미떼다', '연기하다', '~한 체 하다'로 해석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상황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단어가 있을까요? 그들은 이미 판단을 끝내고서, 겉으로는 연기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위선 뿐입니다.
이 속셈을 가지고 연기하는 이들을 호통 친 예수는 "인두세를 내도록 법으로 구별된 것(το νομισμα)"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뭔가 말하려나 보다. 무엇을 말하든지 너는 이제 걸려 들었다!' 그리고 얼른 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인두세로 내는 돈은 '데나리온'이라는 동전입니다. 성전에 내는 세금은 데나리온이 아닌 '세겔'로 냅니다. 왜냐하면 이 데나리온이라는 동전은 그 자체로 우상숭배적이기 때문입니다. 데나리온에는 카이사르의 얼굴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고, 그 얼굴 주위로 '신의 아들 카이사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즉 카이사르의 형상과 글귀는 명백한 십계명의 위반입니다.
출애굽기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런데 그 우상숭배적 동전을 가져오라는 예수의 말에 그들은 실천으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던 그 동전이 바로 그들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우상의 형상을 새긴 은붙이를 늘 가지고 다녔던 것이지요. 그들이 예수께 돈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 충실한 우상숭배자임을 증명한 꼴이나 다름 아닙니다.
그 동전을 "봉헌받은(이 표현도 재미있습니다. 어쨌든 그러한 동전도 예수는 받으셨습니다)" 예수는, 그들 주머니에서 나온 그 우상숭배적 동전을 마치 초등학교 때 체변 검사를 위해 변을 봉지에 담듯이 꺼리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 주머니에서 나온 이 동전의) 형상과 새겨진 글이 대체 누구에게 속한 것이냐?"
바리새인들이 답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이때 옆에 서 있던 헤롯 지지자들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실실 웃고 있지 않았을까요? 바리새인들은 그토록 세금내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반대 하더니만, 그 동전을 늘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우리와 다를 것 없네' 하지 않았을까요? 카이사르의 동전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바리새인과 헤롯 지지자들의 대통합이 성사되는 순간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돌려주기'의 그 유명한 말을 남기십니다.
"그러면너희들이 그 카이사르의 것들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흔히 이 구절은 '종교는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 때 사용됩니다만, 전혀 그런 맥락과는 무관합니다(A.D.1세기의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 문제가 하나였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만, 정작 부각되어야 하는 표현은 "그러면 너희들이...돌려주어라"입니다. 그 우상숭배적 동전은 너희들의 것이니, 너희들이 돌려주라는 말입니다. 더불어 이 "너희들"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책임 또한 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카이사르 본인이 찍어낸 이 우상숭배적 동전입니다. 이건 도대체가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끔찍한 것이니 버리든가 해야겠습니다. 아니면 이걸 만든 놈에게 돌려줘야겠습니다. 아, 마침 그 놈이 세금을 걷는다며 자기가 만든 동전을 걷는다니까, 세금 걷을 때 얼른 내버리면 되겠군요. 세금을 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를 자행하던 로마 권력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낸다고 해서 모두 민족 반역자 취급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이 더러운 물건을 만든 놈에게 돌려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렸는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다니면서도 씩씩대는 저 데나리온은 아님에 분명합니다.
[2]
"바로 그 날에" 있었던 두 번째 사건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예수와 헤롯 지지자들 앞에서 얼굴이 벌개진 이후,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제사장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다윗 때의 대제사장인 '사독' 가문의 사람들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모세오경, 즉 토라만 신뢰합니다. 그리고 모세오경을 이룬 사람이 '다윗'이고, 그리고 그 다윗에 의해 임명된 '제사장직(자신들입니다)'의 복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무엘하 8:18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었다. '다윗의 아들들은 제사장 일을 보았다'.
그러니까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다윗 때 제사장 가문인 우리가 최고다' 이 말 아니겠습니까?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혁명성은 이 보수적인 사람들과 들어맞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 왕조를 복권시키고, 자신들로 구성된 제사장 가문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그림에, 부활은 들어맞지 않는 퍼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부활이라는 미신을 믿고 있으니 큰 일입니다. 이러다가 우리 사두개인들의 입지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이들도 예수께 찾아와 "답변을 요구하며 물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정말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이유를 '신명기 25:5'에서 찾았습니다. 거기보면 남편이 죽은 아내를, 그 남편의 형제가 아내로서 부양해야 한다는 법이 등장합니다('형사취수제'라고 부릅니다). 사두개인들은 불가능하지만 그럴듯한 사례를 만들어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야기를 쓰려거든 '가능하지만 그럴듯 하지 않은 것'보다는, '불가능하지만 그럴듯 한 것'이 더 설득력있다고 했는데, 사두개인들은 이야기 짓기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부활이후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며냈는데, 그 이야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납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첫째에게 부인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형사취수제에 의해 그 부인은 둘째 형제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형제도 죽고 셋째 형제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형제도 죽고 넷째 형제의 부인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형제들이 차례대로 죽어서 그 첫번째 형제의 아내가 모든 형제의 아내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뒤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일까요?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이 하고픈 말은, 율법에 기록된 형사취수제가 진리라면, 부활은 말이 안된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리지 않느냐. 이런 것이지요.
이렇듯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결국 불가능한 결론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예수께 제시했는데, 사실은 여기에 또 그들만의 사연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인용한 구절에는 '부활'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24, 개역한글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본문에 '장가들다'라고 고상하게 번역된 부분은 '남자가 여자에게 사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신명기 25:5에서는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가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후사'는 원문으로는 '스페르마(σπερμα)'라고 읽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씨"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세울찌니라"가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본래 '위로 일어나다, 다시 일어나다'라는 의미의 '안히스테미(ανιστημι)'의 번역어인데 여기서는 "세울찌니라"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즉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토라에 부활이 나오긴 나오는데, 그 부활은 그저 살아생전에 남편의 형제를 통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말이지,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확인해봅시다. 예수는 일단 "너희들은 속았다(πλανασθε, 개역한글에서는 '오해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단어를 이미 앞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2,13, 개인번역 만일 어떤 이에게 100마리의 양들이 있고 그것들로부터 하나가 속게 되었다면(πλανηθη), 99마리를 산들로 보내버리고 속임당한 것(το πλανωμενον)을 찾으러 떠나지 않겠느냐?
양 한 마리가 속아서 길을 잃어버렸듯, 사두개인들도 속아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을 보아도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이 길을 잃어버린 모퉁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관계는 없다 이 사두개인들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할 때 사용하는 동사를 잘 보면 '가지다'입니다. 그리고 이 '가지다'는 명백히 성관계의 늬앙스로 읽어야 합니다. 즉 사두개인이 만들어낸 사례는, '여자는 일곱명의 형제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누구의 아내라고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누구와 관계를 했는지에 관심을 갖다가 사두개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만든 이야기 안에서 여자는 일곱 번 사별한 사람, 세상에 둘도 없는 비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결혼 관계를 성관계만으로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곱 명의 남자들과 관계했음에도 여자에겐 남편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요한복음 4장의 남편 여덟있는 여인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그녀를 가졌는데, 그녀는 누구의 것이냐?'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부활 안에서는 '성관계는 없다'입니다. 여자를 성관계의 대상으로 갖지도 않고, 따라서 그 여자에게 씨를 주어 혈통을 이어가도록 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의 아들 '오난'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형사취수제에 의해 형의 부인을 아내로 얻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8:8, 개역개정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그런데 오난은 체면상 그 여성을 아내로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 씨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죽은 자기 형의 것이 되는 것이 싫어서 줄곧 체외사정을 했고, 하나님은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은 진정한 씨가 나타날 때까지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사취수제는 당시 남편 없는 여성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길을 잃고, 이 형사취수제의 목적을 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어떻게 소유하는지의 관점에서 형사 취수제를 부활이 없는 이유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30절에 "아내를 취하는 것"이든, "딸을 받는 것"이든 모두 남자의 입장을 말해주는 동사들이 쓰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합니다.
따라서 모세에게 명하신 형사취수제는 부활 때에는 아무 실효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형사취수제 때문에 부활이 없는게 아니라, 부활하면 형사취수제는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활 때에는 더 이상의 혈통을 이어나갈 이유도, 또 성관계를 통해서 여성을 소유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성관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부활 못할 시체들이더냐?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들이 유일하게 믿고 있는 토라는 모순에 빠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시체들에 지나지 않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산 자들의 하나님"이라 소개하시면서(출애굽기 3:6),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언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그들은 분명 죽었지만, 그들이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두개인들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토라 안에서 "산 자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고,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의 말과 부활을 믿어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말 속에서 혼란을 느끼던 군중들은 이러한 가르침 곁에서 충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3]
그리고 사건은 이어집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이가 사두개인들마저도 입다물게 했다는 소리를 듣자, 예수를 말로 붙잡으려고 했던 이 말쟁이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2차 회의를 거쳐 어느 율법연구자가 예수를 붙잡고자 출정합니다. 이들이 선택한 무기는 다시 말입니다. 그가 물었던 것은 "율법에서 어떤 류의 계명이 가장 큽니까?" 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당대 뜨거운 감자였듯이, 또한 '큰 계명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논의'도 이스라엘 안에서 줄곧 논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떤 계명이 큰 계명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걸 누가 결정하는지일 것입니다. 저 큰 계명 논쟁이 확산된 이유는, 율법을 해석할 권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큰 계명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나 정당이야 말로 계명 아래 사는 이들에게 지배자가 될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율법 연구자들이 중요하다고 결정한 계명이 23장에 열거됩니다. 다음 주에 살펴보게 될 거에요. 미리 말씀드리면 그들이 결정한 큰 계명은, 제물, 봉헌, 십일조, 정결의식, 죽은 자들의 비석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는 오늘날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3:23,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이것은 하면서 저것은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을 하는 이유는 저것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에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예외를 두지 말아야 할 큰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유대인들이 아침마다 외우는 '쉐마'라고 부르는 신명기 6장을 인용하셨는데, 어떤 강조점을 가지고 말씀하셨는지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너의 온 가온으로, 너의 온 프쉬케 안에서, 너의 온 생각 안에서."
그냥 '사랑하라'가 아니라, 어떤 사소한 계명도, 삶의 어떠한 측면도 배제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크고 작은 계명을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온 삶을 점령해야 할, 조금의 잔여도 남기지 않는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웃을 사랑하는 자신은, 어떤 배제, 예외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하는 이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큰 계명이 따로 있고 작은 계명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면, 이웃 사랑에도 큰 이웃이 따로 있고, 작은 이웃이 따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조금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과 그런 사람이 하는 이웃 사랑'인데, 바로 여기에 온 율법과 예언자들이 매달려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라고 말하면,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저것이 구약성경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예외를 만들고, 또 사랑하지 못할 예외 이웃을 만들고 있다면, 즉 구약성경이 말하는 사랑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대체 어디에 매달려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예외로 만들어놓은 바로 그것에 매달려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예수께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자신에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것과 꼭 같은 동사로, 예수는 "그들에게 답변을 요구하며 물으"십니다.
"당신들은 어찌 여깁니까, 그 메시아에 관하여. 그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메시아'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모든 민족 위에 올라서고 싶은 지배 욕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대표자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대표자 '아래' 메시아가 나타냅니다. 그 메시아는 모든 민족을 통치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위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이스라엘의 자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니 더더욱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에 대한 원망이 폭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구절을 인용하십니다(시편 110편입니다). 그럼 다윗과 메시아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지요.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이라고만 알고 있을 때는 다윗 아래 메시아가 있었지만, 메시아는 다윗 아래만 있지 않습니다. 다윗 위에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메시아 아래 있고, 그 메시아 아래에는 모든 민족들이 있습니다. 모든 민족과 이스라엘은 누가 높다할 수 없이, 메시아의 발 아래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원수들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이스라엘에 대한 자부심은 다른 민족보다 높다는 상대적인 자부심이었는데, 그리고 이런 자부심을 성경이 보증해주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상대적 자부심이 성경 안에서 아무 정당성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부터였습니다. 누구도 예수께 답변을 요구하며 물으려 하지 않게 된 것은 말입니다. 예수께 말하면 말할수록, 그들이 저지른 실천의 과오만 드러날 뿐이니, 그 과오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들은 말을 안하기로 했습니다. 말하지 않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그 과오를 드러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추악한 실천의 그림자가 스물스물 예루살렘을 덮고 있었습니다.
다음 주 내용에 대해서 짧게 코멘트하겠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십니다. 모세의 의자에 앉아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분하는 권력이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것이 중요하므로 누구든 그들의 말을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듣고나서는 그 들은 것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말'에 있지 않고, 그들의 '말뿐임'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듣고 실천한다면,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남의 실천의 짐'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말대로의 실천'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실은 감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수족처럼 대신 움직여줄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볼 때는 하는 척 합니다. 자신이 정작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보일 때만 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