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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1~39, 개인번역

[1]

  그때 예수께서 그 군중들과 그이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말씀하시길,

 "그 모세의 자리에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앉았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들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너희들은 행하고 지켜라,
그런데 그들에게 속한 그 일들에 따라 행하지는 말아라.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지만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거운 짐들을 묶고
이 사람들의 어깨들 위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자신들은 전혀 욕망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손가락으로 그 짐들을 움직이는 것에는.
그런데 그들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일들을
이 사람들의 보이는 곳을 향해 행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킴표(φυλακτήριον)'들을 넓게 하고
옷술들을 크게하며
그들은 식사들의 첫 번째 자리들과
모임들의 첫 번째 의자들과
시장들의 인사들과
사람들에 의해 '랍비여'라고 불리는 것을.

그런데 바로 너희들은 불리지 말아라, '랍비'라고,
왜냐하면 너희들의 선생은 하나인데,
너희들 모두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 위의 너희들 중 '아버지'라 불리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희들의 하늘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인도자'라 불리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희들의 인도자는 하나, 메시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들 중 큰 사람은 너희들의 섬김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높이려는 누구든지 낮아지게 될 것이며,
그리고 자신을 낮추려는 누구든지 높아지게 될 것이다.

[1]

1. 진리를 글자로 바꾸었더니

  오늘은 '자리'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모세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 없어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자리입니다.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모두의 자리여야 하고, 실천(실천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요)이 아닌, 몇 마디 말로 대체 되어서는 안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입법이 되어 공포되면(말), 그 법대로 집행이 되어야 합니다(실천). 즉 한 사람의 인격에는 말과 실천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는 이 균형이 박살났습니다. 누군가는 말만 담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만 실천이 부과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을 하면 할수록, 말 없는 사람들의 어깨만 무거워집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앉았습니다. 모두의 자리였던 그 자리를 이 사람들이 독점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진리를 글자'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자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그 권한을 넘겨주었고, 이 글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흔히 독재자하면 히틀러를 연상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지도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이 차지한 권력도 그들이 특별히 수를 썼다기 보다는 사람들의 인식에 기반해 있습니다. '바리새 운동'은 제사장 가문에서 시작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중산층 경건 운동'이었습니다. 우리가 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 제국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제 님의 뜻대로 철저히 살아보자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경건'이 '글자를 연구해야만 알 수 있는 것'으로 오해되었고, 글자를 연구하는 사람들만이 경건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모세의 자리에 삶이 아닌 글자가 들어앉는 순간입니다. '진리'의 자리가 '글자'의 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진리의 자리에 앉은,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십니다. 진리를 글자로 바꾸어버린 그들의 특징은 '세 가지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1) 좀 더 큰 것 사랑 
  먼저는 큰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오늘날에도 성경 구절을 적은 종이를 넣은 상자를 이마나 손목에 매달고 다니는데, 그 성경 구절은 다름 아닌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봤던 신명기 6장의 쉐마입니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율법학자가 가장 큰 계명을 물어봤을 때, 예수께서 답변하신 구절입니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지킴표'를 이마에도 손에도 '넓게' 맵니다. 아마 남들이 매는 것보다 '좀 더 넓게' 이겠지요. 이 지킴표를 넓게 했을 때 생기는 효과는 무엇일까요? 글자를 남들'보다 더 넓게' 드러낸 것은, 자신들이 이 말씀을 남들보다 더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시 자체가 이미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어기고 있던 것이니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온 가온과 온 프쉬케와 온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글자를 어루만진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어루만질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가, 자기 자신으로서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시는 과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글자가 커진 만큼, 그들이 진리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잘 감춰졌습니다.

  지킴표 뿐만 아니라, 옷술도 크게 합니다. 이 옷술에 대한 구절은 민수기에 나옵니다.

민수기 15:37~39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대대손손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어야 하고,
  그 옷자락 술에는 청색 끈을 달아야 한다.
  너희는 이 술을 볼 수 있게 달도록 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실천할 것이다.
  그래야만 너희는,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너희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아니할 것이고,
  스스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도 자기 겉옷에도 이 옷술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의 12년이나 자궁하혈에 시달리던 여인도 예수의 옷술을 붙잡지 않았습니까?(이 여인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예수의 옷술을 붙잡았습니다. 마태복음 14:36) 그러니까 옷술을 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고자 옷술을 달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옷술을 그저 다는 것과, 옷술을 '남들보다 좀 더 크게'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옷술을 좀 더 길게 하는 의도는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자기 옷의 옷술은 자기 눈보다 타인의 눈에 더 잘 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술을 남들보다 더 크게 한 것은, '너 이 옷술을 보고 말씀대로 실천해라'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옷술이 길어진 만큼, 말씀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부과하게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지킴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감출 수 있습니다. 설마 저렇게 옷술을 길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지 않는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설마는 계속 사람 잡고 있었습니다. 남들 보다 크게 하는 이들은, 책임지지 않으면서 책임지게 하기 위한 속임수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2) 첫 번째 자리 사랑
  이런 사람들이 차지하고픈 자리는 첫 번째 자리입니다. 이 첫 번째 자리가 이들의 두 번째 사랑입니다. 식사에 초대되거나 모임 자리에 가게 되면 진리를 글자로 대신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들이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미 주변에서 이들을 그 자리로 안내해줍니다. 안내해주는 사람은 말씀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에, 그를 첫 번째 자리로 안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이의 속내는 그와 다릅니다. 그가 그 자리를 사랑하는 이유는, 남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누군가 도시를 다스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곧장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재물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몇 차례 고사하다가 앉는 사람은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그 자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첫 번째 자리'도 감추는 기능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마에 지킴표를 크게 하고, 옷술이 길게 달린 옷을 입고, 또 첫 번째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 사람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분명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이 '그렇게 보임' 때문에 아주 잘 감출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은 자신의 자리를 자랑하면서도 자신은 그 자리에 걸맞지 않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 입니다.


3) 많은 이들의 알아줌 사랑  
  세 번째 사랑은 '많은 사람들이 알아줌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영어단어 rich는 라틴어 '렉스(rex)'에서 왔습니다. 렉스는 '타인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 정치인과 비슷합니다. 시장에 나가니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너도 나도 이 사람을 '랍비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그러나 이때 '랍비'라는 호칭은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호칭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본인도 책임질 수 없으면서 남들의 삶에 책임을 부과하고,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자리를 이용하고, 결국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렇게 오염시켰습니다. 오늘날 진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이렇듯 진리를 글자로 바꾸어, 글자를 다루는 이들이 '랍비님', '랍비님' 불리고 있다면, 오늘날 진리는 무엇으로 바뀌었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르며, 무엇 때문에 그들을 남들 위에 군림해도 되는 예외적 존재로 인정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2. 세 가지 '말아라'

  이 '세 가지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 하지 말아라'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말아라'는 모두 '호칭'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불리고 있는 '호칭'은 내가 서 있는 '글자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글자의 자리는 진리의 자리와 다를 뿐만 아니라, 내가 숨을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랍비들이 '랍비'라는 호칭 뒤에서 자신을 과시하면서도 자신을 감추었듯이, 우리는 우리가 불리고 있는 호칭 속에서 과시하면서도 우리 자신들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않은 것처럼"
  그이는 자신의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랍비'라 불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다 말씀해주셨지요. 그 '랍비'라는 이름 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말씀해주셨으니까요. 그런데 만일 그 군중들 틈에 랍비 지망생이 있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랍비라 불리지 말아라'는 예수의 저 말씀은 '랍비가 되어선 안된다'는 말씀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리지 말라는 말과 그것이 되지 말라는 말과는 다릅니다.(그리고 이미 예수도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리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겐 고린도전서의 구절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 개인번역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내 말은 이것입니다. 카이로스가 함께 놓여있습니다.
지금은, 아내가 있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것처럼 살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것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고,
현시대에 쓸 것이 있는 사람은 현시대에 쓸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왜냐하면 현시대의 스케마가 (과거의 유물로)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은 충격적입니다. 현시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뒤집으라는 요청입니다. 현시대가 선망하는 자리를 새롭게 이해하라는 요청입니다. 현시대에서의 결혼생활이 진짜 결혼생활이 아니며, 현시대에서 슬퍼해야 할 일을 슬퍼하지 않으면서, 또 현시대에서 기뻐해야 할 일에 대해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으로 조직되어 있는 현시대 안에서 쓸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살라는 요청은 급진적입니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오는시대를 산다"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랍비가 되려는 사람은 '랍비가 아닌 것처럼 사는 랍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랍비로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통념은, 랍비로 하여금 자신을 속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그런데 랍비는 그 공간을 스스로 없애버려야 하는데, 그 랍비는 랍비답지 않은 랍비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불리는 호칭들에 대해서, 그 호칭이 일반적으로 가진 가치를 전복시키면서도 그 호칭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것처럼 사는"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으로 모일 수 있습니다. 바로 "형제"입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글자의 자리를 빗겨나가는/초과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형제들"을 이룹니다. 형제라 불리지 않아도, 이들은 형제들 '입니다.'

2) 현시대가 규정한 아버지다움
  두 번째 그이의 '불리지 말아라'는 '아버지라 불리지 말아라'입니다. 이 충격적인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 당연한 권위처럼 여겨졌던 부권을 부정해버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부정한다고 읽어선 곤란합니다. 이때 부정되는 것은 현시대가 규정한 '아버지다움'입니다. 따라서 '오는시대의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않은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현시대가 규정한 아버지라는 글자의 자리 안에서, 누군가가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책임을 지우면서도, 스스로 자신은 자신이 부과한 것에 대해 본인은 짊어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도 모르게 숨길 수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예수는 '아버지답지 않은 아버지들'이 '되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모두 님의 아들들입니다. 아버지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중동 사회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권위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권위 아래 모이는 새로운 가족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3) 보이지 않는 인도자
  세 번째 예수의 '말아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우리는 '인도자'라 불리지 말아야 합니다. 현시대가 만일 우리를 인도자라 부른다면, 그들이 바라는 목적지로 데려갈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인도자라 부른 것일테니 말입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현시대의 통념에 의해 빚어진 지배의 자리일테니 말입니다. '랍비의 자리'는 '카이사르의 자리'와 다르지 않고, 야고보와 요한과 그의 모친이 요구했던 '예수의 좌편 우편의 자리'는 마태가 버렸던 세관의 자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 세관의 자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자신이 토색한 재물의 4배를 갚아주는, '세관답지 않은 세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닌 것 처럼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인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보이는 것을 부정하면서 그 분을 알 수 밖에 없고, 우리는 보이는 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것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도자는 우리가 그 인도자를 그런 방식으로 따라오게끔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의 예외자를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방식이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인도자는, 현시대의 통념을 뒤집는 세 줄로, 우리가 사는 방식을 일러주셨습니다.

그런데 너희들 중 큰 사람은 너희들의 섬김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높이려는 누구든지 낮아지게 될 것이며,
그리고 자신을 낮추려는 누구든지 높아지게 될 것이다.

[2]

(1) 그런데 화로다 너희들에게,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이 사람들 앞에서 하늘들의 통치를 잠그기 때문이다.
즉 바로 너희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들어가는 이들을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2) 화로다 너희들에게,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이 유대교 입교자(προσήλυτος)를 만들려고 바다와 뭍을 다니다가,
(입교자가) 되었다면, 너희들이 그를 게헨나의 아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너희들보다 두 배로.

(3) 화로다 너희들에게, 시각장애인들의 안내자들아,
그들이 말한다.

  '성전 안에서 맹세하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성전의 금 안에서 맹세하면, 효력이 있다.'

불경한 이들과 시각장애인들아!
즉 누가 크더냐, 금인가, 아니면 그 금을 거룩케하는 성전인가?
그리고 (그들이 말한다).

  '번제단 안에서 맹세하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위의 선물 안에서 맹세하는 이는, 효력이 있다'

시각장애인들아,
즉 누가 크더냐, 선물인가, 아니면 그 선물을 거룩케 한 번제단인가?
그러므로 번제단에서 맹세한 이는
번제단과 그 위의 모든 것들 안에서 맹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맹세한 이는
성전과 성전에 거주하시는 이 안에서 맹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 안에서 맹세한 이는
그 하나님의 왕좌와 하늘 위에 앉으신 이 안에서 맹세하는 것이다.

(4) 화로다 너희들에게,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이 허브와 약초와 채소의 1/10은 드리는데,
그 토라의 무거움들과 그 심판과 그 긍휼과 그 신실함을
이미 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바로 그들이 행해야 했고,
저것들도 내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눈 먼 안내자들아,
너희들이 포도주의 날벌레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고 있다.

(5) 화로다 너희들에게,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이 그 잔과 그 접시의 바깥으로부터는 정결하게 하지만,
그 안쪽으로는 빼앗음과 무력함으로부터 가득하다.
눈 먼 바리새파들아!
너희들은 먼저 그 잔의 그 '안'을 정결하게 하라,
이는 그것의 '바깥'이 깨끗게 되게 하기 위함이다.

(6) 화로다 너희들에게,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이 회반죽을 바른 무덤들 곁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한 편으로 '적기(ὡραῖοι)'인 것처럼 드러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시체들의 뼈들과 모든 정결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하다.
이처럼 너희들도 한 편으로 바깥으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데,
다른 한 편으로 안 쪽으로는 외식(연기)와 무질서로 채워져 있다.

(7) 화로다 너희들에게,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들을 건축하고,
그 의인들의 기념물들을 질서잡으면서(κοσμέω),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아비들의 날들에 있었다면,
  우리는 결코 그 예언자들의 피 안에서는
  아비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너희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너희들이 그 예언자들을 살해한 이들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너희들이 너희 아비들의 그 방식을 이루고 있었다.
뱀들아, 독사들의 후손들아,
어찌 너희들이 그 게헨나의 심판으로부터 달아나겠느냐?
이것을 통하여 보라,
바로 내가 너희들에게 예언자들과 지혜자들과 문법학자들을 보낸다.
그들로부터 바로 너희들이 죽이고 말뚝에 매달 것(σταυρόω)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너희들이 너희들의 회당들 안에서 채찍질할 것이고
(이) 도시로부터 (저) 도시로 추격할 것이다.
이처럼 이 땅에 쏟아진 모든 의로운 피가 너희들에게 온다,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바라키아스의 아들 자카리아스의 피까지.
(그를 성전과 번제단 사이에서 너희들이 살해했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세대에게 도래할 것이다.


[2] 일곱 가지 화

  예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2장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율법학자가 예수를 차례대로 찾아왔고 그들이 모두 예수의 대답에 반박할 수 없었을 때, 그이는 "군중들과 자신의 제자들에게(23:1)"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보게 될 23:13~36의 말씀은 그 연장선입니다. 예수는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문법학자와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로 모여 있는 이 군중들의 안내자이며 선생 노릇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릇'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신랄하게 평가하십니다.   그이가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바로 포도원에 마침내 당도한 아들이기 때문이고, 예루살렘에 마침내 찾아오시겠다고 하셨던 ‘나귀의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위’ 없이 감히 예루살렘 전체에 화를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교회 전체에 대해서, 혹은 이 나라 전체와 이 문명 전체에 대해서 무언가 말한다면, 바로 그 권위에 힘입어서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하는 여러분!  "화로다"라는 표현은 전형적인 예언자들의 표현입니다. 하박국 2장을 읽어보면 이 "화"라는 단어가 다섯 번 등장합니다. 이사야 5장에는 무려 여섯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는 화가 일곱 번입니다. 그럼 그 내용을 함께 살펴봅시다.

(1) 하늘들의 통치를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지금껏 마태복음에서 "하늘들의 통치"라는 단어가 어찌 쓰였는지 살펴봅시다.   그 통치는 숨결에 있어서 짓눌린 사람에게 찾아오며, 그 짓눌렸던 이들로 하여금 의를 위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도록 만드는 그러한 통치입니다(5장). "주님, 주님"이라 말한다고 들어가는 통치가 아니라, "하늘들 안에 계신 아빠의 원함을 실천하는 이"가 들어가는 통치입니다(7장).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실천을 위해 힘쓰는 이들이 차지하게 되는 통치입니다(11장). 그 통치 안에서는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18장), 긍휼한 마음으로 빚진 것을 탕감해주는 자의 통치입니다(18장). 그 통치는 끝사람의 사정을 돌봐주는 세심함이고(20장), 그 통치는 실천의 옷을 입은 이들과 함께 기뻐하는 통치,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초대장이 보내진 통치입니다(22장). 그 통치는 사소한 계명을 통해 의를 이루는 통치인데, 그 사소한 계명을 실천하고서 가르치는 이는 큰 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5장). 이처럼 그이는 “하늘들의 통치”를 예수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쓰셨습니다. 즉 성육신하신 그이는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런데 문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를 거절했고, 또 사람들이 그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그 예수를 통제하려 합니다. 그 점이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시각 장애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자, 그 사람의 부모를 찾아 추궁하고 그 시각장애인 본인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는 다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요한복음 12:10). 예수께서 하신 일은 말로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의 실천인데, 그 실천이 자신들의 글자와 맞지 않는다고 그 사랑의 실천을 거절하고, 그 사랑의 실천을 따르는 이들에게서 정죄거리를 찾았습니다.

  즉 그들은 그들의 권위를 가지고 다름 아닌 예수를 잠그고 통제하려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화입니다.

(2) 게헨나의 아들을 낳고 있기 때문에

  두 번째 화는 그들의 ‘전도’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토라에 준수하겠다는 이방인이 있으면, 유대교인으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유대교 입교자를 자신들보다 두 배나 끔찍한 "게헨나의 아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게헨나의 아들들은 속으로는 탐욕이 들끓고,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손과 발로 죄짓다가, 로마와 갈등을 일으키는데 동조하고, 결국은 이스라엘을 불바다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3) 맹세의 효력을 세부 규정으로 보증하려고하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에 대한 호칭을 "시각장애인들의 안내자들"이라 바꾸십니다. 이때 시각장애인들이란 바리새인과 문법학자들을 따르는 이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이 예루살렘의 군중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 스스로 이 사람들을 이끄는 "안내자"로 자처했습니다. 이는 로마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2:17~21
  그러나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유대사람'이라 칭한다면 말입니다. 즉 당신이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자랑하고, 그 미래에 이뤄질 바를 알며, 율법에 의해 지시된 것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스스로를 가리켜 믿기를, "나는 율법 안에 있는 앎과 진리가 구현된 자라서, 눈먼 사람의 인도자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야" 라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안내자라 자처한 이들이 안내한 곳은 맹세의 효력에 대한 다음의 규정들이었습니다.

-맹세의 효력은 성전이 아니라 성전의 금에 있음
-맹세의 효력은 번제단이 아니라 번제단의 예물에 있음

  그러나 예수는 이 바리새인들의 세분화를 뒤집으십니다. 맹세의 효력은 금이 아니라 성전에 있습니다. 맹세는 번제단에 올라간 예물이 아니라 번제단 전체에 있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은 성전에 속해 있고, 성전으로 맹세하는 이는 성전에 사시는 님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전을 벗어나서 하늘을 두고 맹세한 이도, 그 맹세는 하늘에 앉으신 님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맹세는 효력이 있습니다. 그 맹세의 효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맹세는 다른 맹세가 아니라 토라를 이루겠다는 맹세입니다. 이 맹세는 그렇게 살겠다는 자기 결단입니다. 문제는 그 효력 있는 결단이, '밖으로 어떻게 보여 지느냐'에 매몰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맹세에 대한 세부 규정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람의 맹세가 밖으로 어떻게 보일지'의 문제는 금과 예물을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제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렇게 밖에다 기준을 둔 맹세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맹세는 자기 결단으로 끝나야 합니다. 거기에 무언가 덧붙이는 것 자체가 그 맹세를 거짓 맹세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는 이미 5장에서 맹세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5:33~37
다시/새롭게 너희들은 들어라, 옛 사람들에게 말 되었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덧붙인 맹세(거짓 맹세)'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주께 자신의 맹세들을 돌려드릴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전적으로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에서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이다.
땅에서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땅은 그의 두 발의 발등상이기 떄문이다.
예루살렘 속으로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권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리 안에서도 너는 맹세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는 머리카락 한 올도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들의 말은 '네'는 '네', '아니오'는 '아니오'가 되게 하라.
그런데 그것들보다 더 한 것은 악함으로부터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한 확언,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언가 제물을 들먹이고 성전을 들먹이고 하나님을 들먹여서 우리가 한 말을 보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우리 말은 우리 속으로부터 나온 '예', '아니오' 면 족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 속에서부터 나온 ‘예’와 ‘아니오’로 사람을 안내 하기는커녕, 잡다한 세부 규정들 속에서 맹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세부 규정들 속에 묶이게 만듭니다.

(4) 토라의 세부 규정들을 지키다가 토라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법이었습니다. 이 십일조로 성전을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들이 바로 그 동료들의 십일조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세부 규정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문법학자들은 십일조를 제대로 지켜야 한다면서, 정원에 있는 작은 풀들에 대한 십일조도 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은 "박하, 회향, 근채"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왜 이 번역어를 고집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어려우니까 뭔가 있어 보이잖아요? 그러나 문맥은 '별 것 아닌 것들에 대한 십일조'라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병행 본문(누가복음 11:42)에는 "박하, 운향, 모든 채소"라고 되어 있는데, '박하'만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단어들이고, 신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정원에 있는 작은 풀들에 대해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목청 높일 때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는, 저 세부 규정 자체가 아닙니다. 세부 규정들에 신경 쓰느라 정작 토라의 본질을 놓치게 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문법학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채소에서 1/10을 떼는데 열심을 내지만, 정작 토라가 가진 막중함과 그 심판과 긍휼과 신실함은 내다버렸습니다. 고백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와 사랑은 고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토라가 막중한 만큼, 자신이 토라에서 빗나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죽어야 마땅한 자신이 새로운 태양과 함께 기회의 아침을 맞았다는 사실이 긍휼로 다가옵니다. 신실함은 바로 그 긍휼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놓치고서, 세부 규정에 자신과 타인을 모두 옭아매는데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후자를 포도주의 날벌레로, 후자는 낙타로 비유하십니다. 물론 포도주의 날벌레도 걸러내야지요. 그런데 포도주의 날벌레를 걸러 내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가, 목구멍으로 낙타가 넘어가는지도 몰라서 되겠습니까? 그 낙타란,

(5) 속에 그릇된 욕망이 여전하기 때문에

  속에 있는 '탐욕'과 '무력함'입니다. 그래서 바깥을 아무리 신경 쓰고 깨끗하게 해도(날벌레) 저 속이 더럽다는 더 큰 문제(낙타)를 줄곧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저 탐욕과 무력함이란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탐욕(ἁρπαγή)'은 '하르파게'란 단어인데,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강탈'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은 속에서부터 강탈합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갖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이 강탈은 이웃의 문제입니다. 내가 강탈하고 싶은 것은 내 것이 아닌 이웃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에서부터 강탈하고 싶은 욕망은 새롭게 된 욕망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의 욕망입니다. 이 욕망의 문제와 싸우지 않고서는, 진정한 싸움은 시작조차 못한 것입니다. 토라의 막중함과 심판과 긍휼과 신실함은, 이 타락한 욕망의 문제와 맞서기 위해 님께서 주신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무기를 가지고 타락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화가 있습니다.

  같은 단어에 대해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쓰였습니다.

히브리서 10:34. 개인번역
그리고 너희들은 이 포로된 이들과 함께 겪었고,
그리고 너희들의 소유한 것들의 '강탈'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들이 더 나은 소유와 머묾을 가질 것을 인식하면서.


  에클레시아에게 강탈은 속이 아니라 밖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고, 그 강탈마저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더 나은 소유와 머묾을 가질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문제와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욕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력함(ἀκρασία)'이라 번역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 등장합니다. '아크라시아'라고 읽습니다. 크라시아는 통제력인데, 그 통제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같은 단어가 고린도전서에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7:5, 개인번역
서로 거부하지 마십시오. 만일 더 많이 기도할 기간을 갖기 위해 합의한 기간 동안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나약한 의지(ἀκρασία)' 때문에 사탄이 여러분을 시험하지 않도록, 그 뒤에 다시 합치십시오.


  저는 여기서는 '나약한 의지'로 번역했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관계하는데 있어서 거절하지 말라는 바울의 당부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성관계하지 않는 것을 영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이교도 제사 때 벌어지는 매음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바울은 결혼 관계를 벗어난 성관계를 금하면서, 다시 음행으로 돌아가려는 나약함을 끊어내고 결혼 관계 안에서 성관계가 이뤄져야 함을 말합니다. 이때 '자기 절제가 안됨', '의지박약'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크라시아'입니다.

  즉 무언가 올바른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 앎은 자기 통제력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 통제력 없이는 죄와의 싸움도, 토라의 이룸도 없습니다. 오늘날은 욕구, 욕망이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것은 어쩔 수 없고, 사람은 변하지 않으며, 성적 욕구는 자연스럽기만 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속에서부터 이 '탐욕'과 '의지박약'의 그릇된 욕망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탐욕'은 경제 문제와, 자기 통제 문제는 성 문제와 결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욕망으로 말입니다. 님께서 우리 속에 샘솟게 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욕망 없이는, 토라를 지키기 위해 만드는 세부 규정들과 노력들이 모두 비뚤어진 욕망 추구가 될 뿐입니다.

(6) 회반죽만 덧칠하기 때문에

  탐욕과 자기통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것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 문제를 주께 가져가야 합니다. 자신의 기도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공동체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자리'를 그러한 문제를 감추는 자리로 사용했습니다. 스스로 남보다 우위에 있기 위해 자신의 문제를 감춰버리고,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세부 규정 만들기에 열을 올리며, 자신들을 포장해왔던 것입니다.

  그 포장이 바로 회반죽입니다. 사람들은 세부 규정까지 다루는 지도자들을 보며, 말씀이 열매 맺는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명을 맺는 열매가 아니라, 죽음의 악취로 가득한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7)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 일곱 번째 화입니다. 이들은 예언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기념물들(예언자의 비석같은)을 배열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라면 결코 예언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가당착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들을 살해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그 죄에 얼마나 깊이 연루 되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서 말하는 예언자를 죽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문제 삼는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되찾기 위해서는 당연히 로마와 대립해야 하는 것도 의심할만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이 더욱 똘똘 뭉치기 위해 할례와 토라를 강조하고, 그 토라의 해석을 맡은 바리새인들을 따라야 하는 것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언자들과 지혜자들과 문법학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땅을 되찾기 위한 무력 투쟁"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인간이 죽고 부활하여 새로운 인간성으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다고 말하며, 부활하신 한 분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내신 예언자이자, 지혜자이자, 문법학자인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예수처럼 말뚝에 매달려 죽임당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을 채찍질하고 추격하며 바른 말 하는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자신들이라면 예언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A.D.1세기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 모든 일들이 모두 이뤄질 것입니다.


[3]

선지자들을 죽이는

너를 향해 보내진 이들을 돌로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얼마나 자주 내가 너의 아이들 모으기를 원하였던가!
새가 자신의 품은 것들을 그 날개들 아래로 모으는 방식으로,
그리고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다.
보라, 너희들의 집이 버려질 것이다, 광야처럼.
즉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바로 지금부터 결코 나를 보지 못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말할 때 까지.

  '좋게 말되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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