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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라에 부활이 있어
여기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부활이 있다고 정말로 믿는 사람들은 늘 얼마 안었고, 부활 같은 거 있는지 없는지 신경 안쓰고 사는 사람들만 많았지만, 이렇게 부활 따위는 정말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또 드문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오늘 우리가 배울 사람은 흔히 '사두개파' 라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사두개'. 이름이 특이하지요?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절이 기원전 11세기니까, 지금부터 3000년 전 쯤이네요. 우리나라는 그때 고조선이었어요. 청동기를 쓰다가 이제 막 철기로 넘어가던 시절입니다. 여하튼 그 다윗이 통치하던 시절에 제사장 이름이 '사독'이에요. 이 사독의 후예들이 사두개파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활이 절대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성경을 안믿는 건 아니에요. 토라, 모세오경만 믿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부활 그거 지배하는 입장에서는 참 별로에요. 지배자들의 권한이 어디서 나옵니까? '내가 니네 안죽게 해줄게.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자'. '잘 살게 해줄게. 내 말대로 하자' 여기서 나오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죽어도 다시 사니까, 니 말 안들을래' 이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통치하기가, 지배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죽었던 나사로도 살려놓고, 본인도 부활한다고 얘기를 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부활을 많이 믿었습니다. 그러니 사두개파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수가 정말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 말씀을 천천히 들여다봅시다. 사두개인들이 한 방 제대로 먹을 거거든요.
마태복음 22:29~32, 개인번역
"...그런데 그 시체들의 다시 일어남에 관하여
그 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그 이야기를 너희들이 깨닫지 못했느냐?
'부활'은 한자로 '돌아올 부(復)', '살 활(活)'을 씁니다. '삶이 돌아오는 것'이란 뜻이겠습니다. 그렇다고 의식이 회복되거나 환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는 "일어나다"를 꼭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희랍원문으로 보면 "일어나다" 거든요. 그러니까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는 게' 부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시체들의 다시 일어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이에요. 그것도 토라에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읽지도 않은 책을 들고 와서는 '여기 봐봐, 다시 일어남 있지?' 이렇게 말해봐야 소용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맨날 읽는 책 안에 있는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거기에 다시 일어남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2.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해주시는 구절은 출애굽기입니다.
'바로 내가 아브라함의 님, 이삭의 님, 야곱의 님이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자신을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말을 들을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미 죽은 상태, 즉 시체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줄이에요.
...시체들의 님이 아니라, 산 사람들의 님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시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산 사람들의 하나님이잖아요. 그럼 이거 말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사두개인들에게 하시는 이 이야기를 옆에서 사람들이 듣고서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구절을 정리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산 사람들의 하나님
이미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산 자와 동일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동일시로 불리십니다. 죽은 자들이 산 자여야만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예수는 죽은 자들이 산 자가 되는 '부활'의 근거로 하나님의 이 호칭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시체 상태 - 부활 - 산 상태
사두개파가 토라를 읽으면서 부활을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은 듭니다. 사두개파 뿐만 아니라 대부분 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체 상태면 시체 상태이고, 산 상태이면 산 상태입니다. 썩은 주검이 다시 일어나 온전한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모든 상식을 뒤엎습니다.
우리가 빠지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가짜 하나님이 있습니다. 먼저는 안 죽게 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어려워질 수 있고, 죽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 야곱, 이삭도 어렵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안 죽게 하나님이라 생각해선 곤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 살려 주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안 살려 주시는 하나님은 사두개인들의 하나님입니다. 부활없는 하나님, 가짜 하나님입니다. 즉 안 죽게 하는 하나님도 아니고 안 살려주시는 하나님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산 자들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3. 역사의 인격화
예수께서 사두개인에게 말할 당시만 해도, 하나님이 시체를 일으키시는 시점은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도 기독교인의 타임 라인 위에서 '시체상태로부터 일으켜지는 상태'가 미래로만 상정된다는 점입니다. 신약의 교회들은 예수의 부활이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인격화되었습니다. 시체 상태였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완전한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시야에서 '없어지셨습니다'.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라캉은 "주체는 타자의 자리에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는 이질적인 그야말로 타자이지만, 더불어 예수의 자리는 비어있는 자리이고, 믿는 이들이 주체가 되는 자리는 그 이질적인 타자인 예수의 자리입니다. 이때 생물학적인 죽음과 다시 일으켜진 부활의 삶은 바울이 '사륵스'와 '프뉴마'라 부르는 상태로 '나'를 분열시킵니다.
로마서 8:9, 개인번역
만일 하나님의 숨이 여러분 안에 거주하시면
여러분은 살몸(ἐν σαρκὶ) 안에 있지 않고
숨(ἐν πνεύματι)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열된 자아는 한 쪽은 죽음에 해당합니다. 제가 한 쪽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신체의 일부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뚤어진 것은 '나'입니다. 나 외에 다른 비뚤어짐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 개인번역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메시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날마다 죽습니다. 이 "날마다의 죽음"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일이라고, 확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날마다 자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날마다 죽기 위해서는 계속 다시 죽을 수 있는 '신체적 삶'이 필요한데, 계속 다시 죽어야 하는 신체적 삶이 곧 사륵스인 것입니다.
로마서 6:2, 개인번역
비뚤어지는데 있어서 죽어버린 우리가 어찌 지금도 그 안에서 살고자 하겠습니까?
에클레시아의 날마다 죽음은 사륵스의 죽음, 비뚤어진 나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저는 '욕망의 억제'라고 읽고자 합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삶다운 것이라 말한다면, 그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죽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억제는 곧 자기 살해입니다. 날마다 사륵스로서의 자신을 살해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죽음은 곧장 "나의 일으켜짐"을 불러오고, 이 "일으켜진 삶"을 가리켜 프뉴마라고 합니다. 이 또한 사륵스가 '나'였듯이, 프뉴마 역시 '나'입니다.
로마서 6:11, 개인번역
이와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비뚤어짐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들로 산정하십시오, 메시아 예수 안에서.
비뚤어짐에 대해선 죽었던 그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순간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던 모세도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에, 그분의 지나가시는 모습을 얼핏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뚤어짐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는 사람, 즉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 부활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고 있는 기이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날마다는 죽음이자 부활이고, 한낯 인간으로서 신을 대면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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