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소서, 바로 나의 두 아들들을 당신의 왕권 안에서, 당신의 오른편으로부터와 왼편으로부터 앉힐 것이라고."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하셨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그간 알지 못했다. 너희들이 내가 금세 마실 그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그이에게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셨다.
"한 편으로 나의 그 포도주를 너희들이 마실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나의 오른쪽과 왼쪽으로부터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빠에 의해 준비되었던 이들에게 속한 것이다."
그런데 열 명의 사람들이 듣고서 그 두 명의 형제들에 관하여 격노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을 앞으로 불러서 말하셨다.
"너희들은 민족들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주님으로 군림하고 있고 위대한 이들이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너희들 안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들 안에서 위대하게 되길 원하는 누구든, 너희들의 섬김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 안에서 첫 째이길 원하는 누구든, 너희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인자가 섬김받으러 오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그리고 자신의 프쉬케를 많은 이들을 대신하는 몸값으로 주러온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여리고에서부터 떠날 때 많은 무리가 그이를 따랐다.
그리고 보라, 그 길 가에 앉아있던 두 명의 시각 장애인들이,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고, 소리치며 말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다윗의 아들이여."
그런데 군중은 그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꾸짖었다.
그런데 그들은 위대하게(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다윗의 아들이여."
그리고 예수는 서서 그들에게 소리내어 말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그들이 그이에게 말했다.
"주여, 우리의 눈들을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애닳파서 그들의 눈들을 만지셨고,
그리고 그들이 곧장 다시 보았고 그이를 따랐다.
[2]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 속으로 당도했을 때
그들은 벳바게 속으로 올리브 나무들의 산 속으로 갔다,
그때 예수께서 두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들은 너희들의 맞은편 마을 속으로 가라, 그러면 너희들은 곧장 묶인 나귀와
그 묶인 나귀와 함께 있는 어린 나귀를 발견할 것이다. 너희들은 풀어다가 나에게 이끌고 오너라. 그리고 만일 누군가 너희들에게 무언가 말한다면, 너희들은 '너희들의 주께서 필요를 가지고 계시다' 라고 말하리라. 그러면 곧장 그는 그들을 보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예언자를 통한 그 이야기를 이루기 위해 된 것이다.
'너희들은 시온의 그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너의 왕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온유하며 나귀 위에, 그리고 쟁기 아래의 나귀 아들 위에 오르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떠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대로 했고, 나귀와 어린 나귀를 이끌었다, 그리고 겉옷들을 그것들 위에 얹었고, 그이는 그것들 위에 앉으셨다. 그런데 가장 넘치는 군중은 그들 자신의 겉옷들을 그 길 안에 폈고, 그런데 다른 이들은 나무들에서부터 가지들을 잘라서 그 길 안에 폈다. 그런데 군중들이 그이를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치며 말하길,
"이 다윗의 아들께 호산나, 주의 이름 안에서 오시는 이가 좋게 말 되십니다, 가장 높음들 안에서 호산나."
그리고 그이가 예루살렘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도시 전체가 진동되며 말하길,
"이 사람이 누구냐?"
그런데 군중들이 말했다.
"이 사람이 예언자 예수, 갈릴라이아의 나자렡에서부터 온 사람이다."
[3]
그리고 예수께서 그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모든 파는 이들과 그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이들을 밖으로 던지셨다, 그리고 환전상들의 탁자들과 비둘기들을 파는 이들의 의자들을 뒤엎으셨다, 그리고 그이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되어 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것을 혁명가들의 굴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시각 장애인들과 지체 장애인들이 그 성전 안에서 그이에게 나아왔다, 그리고 그이는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문법학자들이 그이가 하신 그 놀라움들과 그 성전 안에서 아이들이
'이 다윗의 아들께 호산나'라 소리치며 말하는 것을 보고서 격노했고 그이에게 말했다.
"저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너는 듣고 있느냐?"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희들은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유아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높임을 고쳐서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남겨두고 그 도시 밖으로 나가 베다니아로 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보내셨다.
그런데 새벽에 그 도시 속으로 돌아오셨는데 주리셨다.
그리고 그 길 가(επι)에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 옆으로(επι) 가셨다,
그리고 그 나무 안에서 잎사귀 외에 무엇도 발견 못하셨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 말하셨다.
"너로부터 어떤 열매도 그 시대 속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가 당장 필요를 따라(παραχρημα) 말라버렸다.
그리고 제자들이 보고서 놀라며 말했다.
"어찌 이 나무가 당장 필요를 따라 말라버렸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며 말하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들이 신실함을 갖고 있고 판단이 둘로 갈리지 않으면,
이 무화과 나무에 속한 것을 너희들도 할 뿐만 아니라,
만일 너희들이 이 산에게 이것으로 말한다면,
'너는 일으켜져라, 그리고 그 바다 속으로 던져져라'
그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 안에서 신실하면,
너희들이 구한 무엇이든 너희들이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르치시는 그에에게 나아와
대제사장들과 이 씨알의 장로들이 말했다.
"당신은 어떤 류의 권리로 이것들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러한 권위를 준 것이오?"
마태복음 20:17~21:18 풀이
[1]
이제 예수는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시면서도 제자들을 하나 하나 개별적으로 챙기십니다. 친밀한 관계는 언제나 일대일입니다. 강연하듯 일대 다수의 관계도 있겠지만, 그런 관계는 적어도 친구 관계는 아니지요. 각각을 따른 관계만이 친밀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오늘 길에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어떤 일을 겪으실 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인자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겨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에게 죽음을 판결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는 유대인 아닌 사람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로마). 그리고 조롱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로마 황제에게 반역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로마는 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로마는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러나 제자들에게 인자는 고난을 모르는 존재입니다. 유대인이라면 고난 받고 죽는다는 말은 '인자'라는 말 뒤에 붙일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제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니까, 어머니가 무언가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무언가 한참 말씀하셨는데, 예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들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예수는 어머니가 바라는 것, 어머니의 욕망을 물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욕망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자식들 잘 되는 것이지요.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좋은 자리에 앉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열 둘 이나 되는 제자들 중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 둘이 예수의 왕권 안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차지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방금 말씀하신 자신의 끝과, 어머니가 말씀하신 자기 자식들의 끝은 서로 타협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분명 자신이 하나님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라 말씀하셨고, 제자들도 그 왕좌를 공유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19장이니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나오기 불과 얼마 전이네요.
마태복음 19:28 인자가 그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았을 때, 바로 너희들도 열두 왕좌들 위에 앉을 것이다, 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심판하면서.
그런데 이때 '왕좌에 앉는다'는 말에 대해서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그간 알지 못했다."
즉 제자들이나 그 어머니나 본인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그 구하는 당사자도 잘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본인들이 구하는 것이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렇게 달라고 떼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그간 포도주를 구했고, 그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 전통에서 포도주는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붓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51:17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하였도다
예레미야 25:17...28,29 그래서 내가 주님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 가지고,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하였다. ... 그러나 그들이 네 손에서 그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면,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그 잔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느냐?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는 저 도성에서부터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너희가 무사하게 넘어갈 수 있겠느냐? 너희는 절대로 무사하게 넘어가지 못한다.'
즉 예수께서 마시는 잔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진노의 그릇을 위해 준비된 진노의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그 진노의 그릇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인 반전입니다. 예수는 이 하나님의 진노를 남김없이 모두 마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저 "도성에서부터 시작되는 재앙"은, 저 도성에서부터 시작되는 기쁨의 소식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들 역시 나름의 고난 속에서, 복수 하지 않는 메시아를 닮아갈 것입니다.
사도행전 12:1,2 이 무렵에 헤롯 왕이 손을 뻗쳐서,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하였다. 그는 먼저 요한과 형제간인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왕좌에 앉음'은 어머니 생각에는 영광 뿐인 자리였지만, 예수에게는 함께 수치를 당하는 자리를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의 오른쪽과 왼쪽을 본인이 결정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듯, 예수와 함께 수치를 받을 오른쪽과 왼쪽의 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혁명가들이 차지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을 예수의 오른쪽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고,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은 어머니를 대동한 두 명의 제자들에 대해 격노합니다. 이들 모두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고 있는 이 총체적 난국 속에서, 예수는 '위대함'이 무엇인지 재정의 하십니다. 흔히 위대하다고 말하는 이들, 지도자라는 이들은 다스리는 사람(주)으로서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권위'를 행사합니다. 사람들은 다스리는 사람 되는 것을 좋아하고, 저 권위 얻는 것을 “성공”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들 안에서는(에클레시아)" 그런 게 '위대함'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위대함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첫째가 되려고 고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는 씩씩댈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무 정당성도 없는 노예임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먼저 급여를 받고 집에 일찍 도착합니다. 에클레시아는 이미 도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 사이에서 군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인자는, 원래 이런 분이십니다. 그는 섬김 받지 않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섬김은 끝이 없어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이들을 대신하는 몸값으로 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잔을 마시려고 하시는데, 제자들과 그의 가족은, 그리고 유대인들은 딴 생각 뿐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의 이름은 '살로메'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의 언니이자(즉 예수의 이모가 됩니다), 나중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빈 무덤의 목격자가 됩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초입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낮은 도시, 해수면보다 무려 200m나 낮은 곳이 여리고입니다. 따라서 그 여리고부터 산 위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입니다(6~8시간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무릎에 힘을 줘야하는 길을 떠나실 때, 많은 이들이 그 길을 함께 했습니다. 그 중에는 두 명의 시각 장애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그들의 외침은, 사람들이 듣기에 소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핀잔이나 꾸지람에 주눅 들지 않고, 더 위대하게(위의 "위대함"과 같은 단어입니다. "크게"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소리칩니다. 그러자 그 소리에 예수도 소리로 답하십니다("그들에게 소리 내어 말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앞에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에게 물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지요. 제자들과 어머니는 실패했던 바로 그 질문 말입니다. '너희들의 욕망은 무엇이냐?' 길가에서 구걸하는 시각 장애인들이 욕망하는 것은 사실 돈이 아니었을까요? 몇 푼이라도 던져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서 그 소란을 피운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주여, 우리의 눈들이 열리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대답과는 달리, 제자들이 자신들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격노했던 것과는 달리, 시각 장애인들의 이 대답은 예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 또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이 예수를 찾았을 때, 이제 그들의 시간은 '곧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와 함께 그 오르막길을 함께 따라 올랐습니다. 욕망은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어서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살로메는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지금 온전하지 않으니, 꼭 자리를 얻어서 온전해 지겠다고 생각합니다. 자리가 있으면 온전함이고, 자리가 없으면 하자있음이라 생각할 때,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배워온 걸까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성전으로부터 이러한 헛된 욕망을 함께 품고 있던 것은 아닐까요? 시각 장애인은 닫힌 눈을 열고 싶었습니다. 즉 현실을 새롭게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는 위대한 자리를 주시진 않지만, 새로운 현실을 보는 눈은 주십니다. 환자가 복덕방이 아니라 의사를 찾듯, 잘 찾아왔습니다. 마가는 나중에 이 시각 장애인들 중 한 사람과 각별한 사이가 된 듯합니다. 마가복음에 그 이름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46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2]
이제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예수는 그냥 걸어서 그 도시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뭔가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을 시켜서 맞은 편 마을에서 묶인 나귀는 풀고, 또 그 묶인 나귀와 함께 있던 어린 나귀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총 두 마리를 데려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과 또 모든 민족을 통치하시는 메시아 예수에게, 이 두 마리 나귀는 꼭 필요했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스가랴 9:9의 성취였다고 덧붙입니다.
"시온의 그 딸"은 결혼이 임박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전통 혼인 풍습에 의하면, 남녀가 약혼한 이후, 둘은 각자 결혼생활을 준비합니다. 이 기간 동안 여자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면 그날부터 결혼 생활이 정식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때 신랑이 언제 올지는 신랑 측의 아버지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비추어보면, “시온의 그 딸”은 메시아와 이미 약혼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딸을 데리로 오는 정혼자가 스가랴 9:9의 “돌아오는 왕”이고, 그 돌아오는 왕의 표지가 바로 나귀입니다. 즉 예수는 자신이 그 포로기의 오랜 세월을 지나, 마침내 돌아오기로 약속한 예루살렘의 남편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스가랴의 이어지는 맥락도 주목할 만합니다.
스가랴 9:10~12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너에게는 특별히, 너와 나 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으니, 사로잡힌 네 백성을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 낼 것이다.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 오늘도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두 배로 갚아 주겠다.
즉 이 돌아온 왕, 약혼했던 남편으로부터 온 세계의 평화가 시작됩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힘겨운 시간을 버틴 사람들은 이제 두 배로 돌려받을 것입니다. 남편이 없던 과거를 버텨냈기에, 그들의 현재와 미래 모두 남편과 함께할 것입니다. 또 나귀 타고 오시는 왕은 창세기 49:10,11과도 공명합니다.
창세기 49:10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 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그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가장 좋은 포도나무 가지에 맬 것이다. 그는 옷을 포도주에다 빨며, 그 겉옷은 포도의 붉은 즙으로 빨 것이다.
오시는 남편은 묶였던 나귀를 풀어다가, 새로운 포도나무에 다시 묶으실 분입니다. 건물 성전에 묶여있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풀어다가, 섬김의 왕인 자기 자신에게 묶을 것입니다. 그가 마시려는 진노의 포도주는 평화의 시작이 되고, 진노는 마침내 찾아온 신랑과의 결혼식으로 역전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의도하신 의미를 어디까지 알아들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마태는 가장 많은 군중이 운집한 사건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증언합니다(도시가 진동할 지경입니다). 사람들은 열왕기하 9:13을 흉내 내어, 오시는 왕의 길에 자신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또 왕과 장막에서 함께 살 것을 의미하는 종려나무 가지도 땅에 깔아두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구하옵나니, 구하옵소서)'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성대한 환영식을 보며, 우리는 다시금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를 앞에서도 끌고 뒤에서도 따르는 이 군중들은 어떠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가진 욕망이었을까요? 아니면 시각 장애인들이 갖진 욕망이었을까요? 그들은 '구한다(호산나)'고 했는데,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고 구하고 있던 것일까요? 모르고서 그러고 있던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이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예수가 채워주지 않을 것을 확인하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바로 그 군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입성하실 때 예수의 기분을 짐작하기가 어려울만큼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3]
어찌되었든 열화와 같은 성원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온 예수는 바로 예루살렘의 중심으로 가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성전 안에서 행패를 부리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파는 사람들, 매매하는 사람들, 돈 바꿔주는 사람들의 탁자들과 의자들을 뒤엎으셨습니다. 이 장면만 보면 ‘성전 안에서는 상거래를 하면 안 되는구나’ 싶지만, 사실 그게 핵심이 아닙니다. 예수가 지적하신 문제는 성전이 "혁명가들의 굴"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로마에 맞서 전쟁을 하자고 선동하는 사람들의 본거지가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이들을 '강도'라 부른다면, 이 사람들은 돈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는 강도들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못 보게 만드는 시각 장애인들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림하는 이들에 대해서 예수는 이미 앞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들은 민족들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주님으로 군림하고 있고 위대한 이들이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즉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이 지도자들과 위대한 이들이 한다는 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사지로 내모는 일입니다. 사람들 위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위대함'이라 부르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함은 제자들도, 제자들의 어머니도, 예수를 환영한 사람들도 구하는 바로 그 위대함입니다. 뭔지도 모르고 구하는 위대함입니다. 장애인 위에는 일반인이 군림하고, 일반인 위에는 지도자들이 군림하며, 그 지도자들은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바로 성전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가짜 위대함'을 추구하는 이들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시각 장애인들과 지체 장애인들도 예수를 따라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에 의해서 이 다윗성(예루살렘)이 세워진 이후, 시각 장애인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하 5:6~8, 새번역 다윗 왕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하니, 그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그 곳으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그 날, 다윗이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려거든,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을 타고 올라가서, 저 여부스 사람들 곧 다윗이 몹시 미워하는 저 '다리 저는 자들'과 '눈 먼 자들'을 쳐죽여라!" (그래서 '눈 먼 사람과 다리 저는 사람은 왕궁에 들어갈 수 없다'는 속담이 생겼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자손) 예수는 다윗을 뛰어넘습니다. 바로 그 예수 때문에, 거짓 위대함의 성전은 제사가 중단되고, 시각 장애인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와 고침받습니다. 원래 성전은 이러라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통해서, 그간 지배와 권위를 드높였던 찬양들을 뜯어 고치신다'는 시편 8편을 인용하십니다. 이때 ‘뜯어 고친다’는 동사는 베드로가 그물을 기울 때 사용된 동사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것을 고쳐서, 완전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즉 문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유식한 말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는 유아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서, 찬송은 완성됩니다. 그 찬송은 사람을 새롭게 하는 참 성전,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향한 이 어린이들의 찬양이 맘에 안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혁명가들의 소굴에 그대로 남겨두고, 베다니로 가십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바로 옆 동네이자, 예수님과 친밀한 나사로 가족이 사는 곳입니다. 예수는 거기서 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제의 이야기의 맥락은 그대로 오늘과 연결되어, 그 유명한 무화과나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나무입니다. 예수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타락을 무화과 나무에 투영시켜 말씀하십니다.
"너로부터 어떤 열매도 그 시대 속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거절하는 이스라엘은 그 어떠한 열매도 낼 수 없습니다. 오는시대로 그 어떠한 열매도 낼 수 없는 입만 무성한 나무이니다. 이때 참 이스라엘이 맺어야 할 열매는 “예수에 대한 신실함”과 “둘로 갈리지 않는 확고한 판단”입니다. 그래야 이 사람들이 이 패역한 도시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바다 속으로 던져지는 '산'은 성전산이요, 다윗성이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즉 이 타락한 도시 예루살렘의 심판을 기도하면, 그 기도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한 도시의 심판이 분명하기에, 그 도시의 심판에 대한 기도는 이뤄질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그 악한 것의 일소를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당시 유대인인 제자들이 들으나, 우리가 들으나 엄청난 발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악의 위치에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을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더욱 담대히 맘 먹어야 합니다. 이들은 앞으로 자신의 역사, 전통, 세계관, 토대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할 일을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류의 권리로 이것들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러한 권위를 준 것이오?"
앞에서도 권위가 이미 나왔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것이 그 권위였지요. 자리에서 나오는 힘이 곧 권위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권위보다 큰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을 심판하는 더 큰 권위, 하나님의 도시가 타락했을 때, 그 도시를 통째로 바다 속에 던지는 심판의 권위, 바로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그 권위가 바로 우리의 신랑에게, 그리고 하늘에 앉아 패역한 무언가를 대면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께서 그 권위를 어찌 사용하는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