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이가 그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제사장들과 그 씨알의 장로들이 가르치고 있는 그이 앞으로 왔다. 말하길,
"어떤 권리로 이런 것들을 당신은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러한 권리를 주었소?"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며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들에게 하나의 말을 묻는다, 만일 너희들이 나에게 말하면, 나도 너희들에게 어떤 권리로 이런 것들을 내가 하는지 말할 말이다. 그 요한의 침례는 어디로부터 왔던 것이냐? 하늘로부터이냐, 혹은 사람들로부터이냐?"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 곁에서 대화하며 말하길,
"만일 우리가 '하늘에서부터' 라고하면 그는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래서 무엇 때문에 그에게 충실하지 않았느냐'고, '사람들로부터'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군중이 두렵소. 왜냐하면 모두들 예언자로서 그 요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 예수에게 답하며 말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이 역시 그들에게 말했다.
2.
"나도 너희들에게 어떤 권리 안에서 이것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그런데 어찌 너희들에게 생각되느냐? 사람이 두 자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첫째에게 앞으로 가서 말하길,
'얘야, 오늘 떠나서 그 포도원에서 일해라.'
그런데 그가 답하며 말하길,
'나는 하고 싶지 않아요'
후에 관심을 바꾸어 떠나갔다. 그런데 그가 다른 자녀 앞으로 가서 그와 같이 말했다. 그런데 그가 대답하며 말하길,
'제가 (있습니다), 주여'
그리고 떠나지 않았다. 이 둘로부터 누가 그 아버지의 싶음을 행했느냐?"
그들이 말한다.
"첫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신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리들과 음(창)녀들이 그 하나님의 왕권 속으로 너희들 앞서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너희들 앞으로 의의 길 안에서 왔는데, 너희들이 그에게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에게 충실했다. 그런데 너희들 각각은 관심을 바꾸지 않았고, 후에 그에게 신실하지도 않았다.
3.
너희들은 다른 비유를 들어라. 집주인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포도원을 일구고 담을 그것 주위에 둘렀고 그 안에 (포도주) 틀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임차농들에게 맡겼고 멀리 떠났다. 그런데 그때 그 열매들의 때가 곁에 도래했고(ηγγισεν), 그의 그 노예들을 그 임차농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열매들을 취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임차농들은 그의 노예들을 취하여 한 편으로는 때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살해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돌로 쳐 죽였다. 집주인은 다시 다른 노예들을 처음 노예들보다 많이 보냈다, 그리고 임차농들은 그들에게 마찬가지로 했다. 그런데 후에 그는 그들을 향해 자신의 그 아들을 보냈다, 말하길.
'그들은 나의 이 아들을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임차농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 안에서 말하길,
"이 사람은 상속자다. 너희들 이리로 와서 그를 죽이자, 그의 그 상속물을 우리가 갖자."
그리고 그이를 취해 그 포도원 밖으로 던졌고 살해했다. 그러니 이 포도원의 주가 왔을 때, 바로 이 임차농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그들이 그이에게 말한다.
"그는 그 악한 이들을 악하게 죽일 것이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다른 임차농들에게 맡길 것이오, 그들은 집주인에게 열매의 카이로스들 안에서 그 열매들을 넘길 것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신다.
"너희들은 기록들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불허했던 돌, 바로 그것이 모퉁이의 머리 속으로 되었다. 그 돌이 주 곁에서 되었다, 그리고 이 돌이 우리 눈들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가?'
이를 통해서 너희들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들로부터 하나님의 왕권이 일으켜질 것이다 그리고 그 왕권의 열매들을 실천하는 민족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런데 듣고 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의 비유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이가 그들 자신에 관하여 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이를 붙잡으려고 애썼으나 그 군중들이 두려웠다, 그때 군중들은 그이를 예언자 속으로 가지고 있었다.
4.
그리고 예수는 대답하며 다시 다른 비유들 안에서 말하셨다, 말하시길,
"그 하늘들의 통치는 다스리는 사람과 같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혼인식을 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노예들을 보냈다, 그 혼인식들 속으로 (이미) 부름받았던 이들을 부르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은 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는 다른 노예들을 보냈고, 말하길,
'너희들은 이미 부름받았던 이들에게 말해라. 보시오, 나의 만찬을 내가 이미 준비했소, 나의 소들과 도축된 살진 것들이, 그리고 모든 것들이 준비되었소. 당신들이 혼인 잔치들 속으로 오시오.
그런데 관심없는 이들이 떠나갔다, 한 편으로 개인의 밭 속으로,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의 매대 곁으로. 그런데 남은 이들은 그의 노예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살해했다. 그런데 그 왕은 열이 받았다, 그리고 그의 군대들을 보냈고 바로 그 살인자들을 멸망시켰고 그들의 그 도시를 태워버렸다. 그때 자신의 노예들에게 왕이 말한다.
'한 편으로 혼인잔치는 준비 된다, 다른 한 편으로 (이미) 부름받았던 이들은 자격이 없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길들의 교차로들 곁에 가라, 그리고 너희들이 발견한 이들을 이 혼인잔치들로 불러라.'
그리고 바로 그 노예들은 그 길들로 나가서 그들이 발견한 모든 이들을 모았다, 악인들과 선인들, 그리고 신부방이 함께 먹는 이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그 왕이 함께 먹는 이들을 보러 들어갔고 거기서 혼인 겉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이에게 말한다.
'자네, 어찌 자네는 여기 들어왔는가, 혼인 옷을 갖지 않았음에도?'
그때 그 왕이 그 섬기는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그의 두 손과 두 발이 묶어서 더 바깥 어둠 속으로 그를 던져라. 거기는 울며 이들을 가는 이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름받은 이들은 많다, 그런데 선택된 이들은 적다."
0.
지난 주 우리가 만난 예수는 길 위에 서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첫째가 되고 싶어서 안달하는 엄마와 자식들을 만났고, 그걸 보고 시기하는 제자들은 여전했습니다. 그들은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 장애인들만이 예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다시 길에서 예수는 무수한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신부 예루살렘을 데리러 온 신랑으로서, 그는 예언을 따라 나귀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신랑의 등장에 예루살렘은 열광했습니다만, 예수는 신부의 도시에 도착하자 마자 성전 제사를 중단시켜 버리셨습니다. 성전산은 난리가 났지만, 그 중에서 아무도 열매 맺지 못하는 이 예루살렘이 통째로 멸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멸망, 신부의 창녀됨, 무화과 나무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가 가시려는 길은 어떤 길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예수는 다시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 권리와 상속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득달같이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예수께서 성전 제사를 중단시키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대체 어떤 권리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여기니까, 예수의 권리를 되묻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께 정당한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에게는 권리가 있고말고요. 이 '권리'란 다름 아닌 유산상속의 권리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만났던 이 사람이 기억나실 겁니다.
마태복음 19:16 "선생님! 오는시대의 삶을 내가 갖기 위해서, 나는 무슨 좋음을 행해야 합니까?"
이 청년이 상속받길 원하는 것은 "오는시대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상속의 권리를 가진 사람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19:17). 성전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계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그들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드는 예수에게,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영생을 상속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너는 무슨 권리로 우리를 막는거야?' 라고 묻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권리와 상속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시기는 커녕, 그들의 약점을 찌릅니다. 그들의 약점은 세례요한입니다. 성전 지도자들은 "오는시대를 가져오시는 왕을 맞을 준비하라"는 세례요한의 외침을 애써 무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을 무시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가리키고 있던 예수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무시한다고 대놓고 말하면 민심을 얻을 수 없으니까 애매한 태도를 차지합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안무시하는 것도 아니야.' 이러면서 자신들이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던 권리를 유지하려는 속셈인 것이지요. 비겁한 태도입니다.
예수는 이런 비겁한 태도를 가진 이들에게 속 시원하게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아무 이야기도 안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통해 빙 돌려서 자신의 권리와 상속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 말과 어긋나더라도
예수께서 먼저 들려주시는 비유 이야기는 '두 자녀 이야기' 입니다. 아버지가 첫째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이 녀석은 '나는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하는군요. 아주 솔직하지만, 아주 버릇없는 자식입니다. 그런데 이 첫째는 관심을 바꾸어, 아버지가 명한대로 떠납니다. 즉 다시 말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사람은 권리가 있습니다. 오는시대의 삶을 상속받을 권리 말입니다. 말과 실천은 어긋나있지만 상관없습니다. 계명을 말하는 것이 상속의 권리가 아니라,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상속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경우는 이와 반대입니다. 아버지의 말에 둘째의 반응은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있습니다, 주여" 그런데 얘는 포도원으로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상속의 권리를 가진 것인가요? 갖지 않은 것인가요? 물으나마나 얘는 본인 스스로 포도원에 가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오는시대의 삶을 상속받을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례 요한에게 반응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첫 번째 자녀들은 세리들과 창녀들입니다. 이들은 세례요한이 선언한 새로운 시간의 소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따라서 상속의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끝 사람으로서 어찌 되었든 계명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자녀들은 지금 예수 앞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제가 아니라 늘 사람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둘째 아들처럼 말은 잘하지만 정작 에서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상속의 권리가 없습니다. 아니 상속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지요. 문제는 본인이 본인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명을 실천하기는 커녕 말만 하고 있으면서, 말을 하고 있다고 자신은 권리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성전 지도자들을 앞에서 이끌고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이들에게 어찌 들렸을까요?
우리의 말과 행동은 늘 어긋나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은 말을 하고, 우리의 말과 다른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말과 행동이 어긋나 있다고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필요한 것은 말과 행동의 일치가 아니라, 그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말로 쌓아놓은 권리입니다. 이러한 권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는시대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데, 말로만 청산유수라면 이 사람이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권리는 말로 만들어진 권리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권리는 결코 그에게 오는시대의 삶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오는시대의 삶을 사는 권리는, 그냥 그 삶을 살아버리는 것 뿐입니다. 여기에는 별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성경에 대해서 뭘 대단히 잘 알았겠습니까? 자신들은 잘 모르지만,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가복음 19:8, 새번역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삭개오가 이러한 실천을 하는데 있어서 뭔가를 참조하거나 연구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예수와 함께 있으니, 그에 걸맞는 실천을 했을 뿐입니다. 관심이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졌을 뿐입니다.
3. 실천을 낳는 수치
예수는 자신에게 권리를 묻는 성전 지도자들에게 참 이야기를 길게, 또 재미있게 해주십니다. 같이 있기 싫어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게 말쟁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권리와 상속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도원 주인 비유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는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특히 성전 지도자들은 흘려 들을 수 없는 옛날 이야기를 패러디해서 들려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앞부분이 똑같거든요.
마태복음 21:33 그는 포도원을 일구고 담을 그것 주위에 둘렀고 그 안에 (포도주) 틀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이사야 5:1,2, 새번역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이사야의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이 좋은 열매를 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을 그 포도원에 고용된 사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랬더니만 그들은 포도원 주인이 보내는 앙겔로스들을 모두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실화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6:20,23 새번역 그 당시에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그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으로, 이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 묘지에 던졌다.
역대하 24:20,21 새번역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되어,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나 하나님이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가 주님의 명을 거역하느냐? 너희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주님을 버렸으니, 주님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없앨 음모를 꾸몄고, 드디어 왕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성전 뜰에서 그를 돌로 쳐죽였다.
이것이 '들포도'입니다. 누군가가 '계명을 맡은 이들이 계명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은 관심을 바꾸어 실천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예언자들의 말을 따라 실천하는데 있지 않았고, 오히려 무자비한 방식으로 그들이 가져야 할 관심을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그들이 가져야 할 관심들을 스스로 죽인 채 스스로 들포도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 들포도들에게 포도원 주인은 다른 노예들을 보내기도 해보고, 더 많은 노예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기이한 실천을 합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을 무방비 상태로 그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이 실천의 목적은 이러합니다.
'그들은 나의 이 아들을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그들에게 수치를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스스로 관심을 돌려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상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들이 수치를 느끼고 실천으로 돌아선다면, 이들도 상속의 권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상속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상속물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유대인의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에 의하면, "수익을 내는 무엇이든 취득하여 만 3년간 점유한 자는 그 소유권을 확보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들포도들은 그걸 이용해서, 아들만 죽이면 자신들이 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성전 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이렇게 아들이 살해당했다. 그럼 포도원의 주인이 왔을 때, 이 임차농들을 어떻게 할까?"
성전 지도자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임차농들을 모두 죽이고, 포도원은 다른 임차농들에게 맡기며,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받아야 할 열매를 얻게 될 것이라고. 이러한 대답은 본인들이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어찌 생각하는지 보여줍니다. 즉 배신은 죽음입니다. 게다가 그 배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살해한 치명적인 배신이었으니 더더욱 용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지도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성경의 한 대목을 인용하십니다. 시편 118편입니다.
시편 118:22,23 집짓는 이들이 불허했던 돌, 바로 그것이 모퉁이의 머리 속으로 되었다. 그 돌이 주 곁에서 되었다, 그리고 이 돌이 우리 눈들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가?'
이때 히브리어로 '돌'의 발음이 [벤]이고, 공교롭게도 '아들'도 [벤]입니다. 즉 살해당한 아들이 돌이며, 그 아들을 불허했던 집짓는 이들이 임차농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살해당했던 골은 포도원 주인 곁에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보기에 놀라운 돌, 놀라운 아들이 됩니다. 어떤 의도로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일까요? 버림받았던 돌이 놀라운 돌이 됩니다. 즉 살해당했던 아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구절이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포도원 주인의 뜻은 본래부터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부활에 대한 암시가 아닙니까?
"다른 임차농"에게 넘길 것이라는 성전 지도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하나님의 왕권은 "너희들로부터" 일으켜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으켜진 왕권은 유대인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흘러갑니다.
이로써 모든 퍼즐들이 맞춰졌습니다. 아들을 살해하려는 임차농들이 지금 아들 앞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실천을 모르는, 말만 잘하는 둘째 아들입니다. 따라서 권리를 갖지 못한, 상속받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이들 자신이 말한대로 포도원 주인이 와서 마땅히 심판하고 포도원을 빼앗겨도 할 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 속에서 마침내 그 의미를 깨닫게 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비유가 정말 적절했음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붙잡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애매한 태도 때문에 확실히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인정하기 싫고, 군중들은 두렵고. 말로 만든 권리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4. 두 번째 알림에도 이것이 없다면
예수는 예수를 보며 눈에 불을 뿜는, 그러나 주변의 군중들 때문에 어찌할바 모르고 씩씩대는 사람들에게, 비유 이야기를 하나 더 해주십니다. 앞에서 해주셨던 비유와 같은 내용일테니 금세 확인해봅시다.
'천국'은, 하늘들의 통치는 다스리는 사람, 곧 '왕'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아들을 위해 혼인식을 베푸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까 포도원에 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예들을 보내 소식을 전합니다. 그 소식은 오는시대의 상속이 임박했고, 상속을 받으려면 누구든 실천만 하면 된다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했고, 예수께서 전하셨던 바로 그 소식 말입니다.
그런데 먼저 초대(부름)받았던 이들은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 참된 실천의 잔치에는 주인이 준비한 먹을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도대체가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비유에도, 두 번째 비유에도, 세 번째 비유에도 '관심'이라는 단어는 빠진 적이 없습니다(그러나 개역성경 번역은 이 '관심'이라는 뜻의 희랍어 μελω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22:5의 아멜레오(ἀμελέω)는 '관심(μελ)없음'이고, 21:32의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λομαι)는 '관심을 변경하다'에서 '늬우치다'가 파생된 것입니다). 오히려 포도원 임차인들처럼, 이 먼저 초대되었던 이들은 소식을 전하는 노예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드디어 속 시원한 부분이 나왔습니다. 왕이 열받았습니다. 왕은 그저 속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바로 앞에서의 비유와는 다른 변주입니다. 왕은 성전 지도자들이 내놓았던 예상처럼, 살인자들과 그 살인자들의 도시를 모조리 멸망시켜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요? 왕은 복수했으니, 이제 더 이상 문제는 없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내용은 복수 이후를 그리고 있습니다. 왕의 뜻대로 혼인 잔치는 계속 되었습니다. 처음 초대되었던 사람들은 자격 없음이 밝혀졌고, 지금 이 혼인 잔치에 모인 이들은 두 번째 초대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합니다. 이 혼인 잔치에 걸맞는 예복이 없다면! 그렇다면 이 두 번째 초대도 첫 번째 초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예복이 없다면 두 번째 부름을 받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혼인 잔치의 일원으로 선택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노와 복수로는 이 선택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럼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이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상속의 권리이자, 복수가 아닌 메시아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 새로운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음 주 이 시간에는 22,23장을 마저 볼텐데요. 이때도 예수는 성전에 계십니다. 성전 안에서 벌어졌던 대화와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더욱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