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젊은이는 듣고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재물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넘치는 이는 하늘들의 그 왕권 속으로 힘겹게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다시 너희들에게 내가 말한다,
바늘 구멍을 통해 낙타가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넘치는 이가 그 하늘들의 왕권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그런데 제자들이 듣고서 크게 얻어맞은듯 했다, 그들이 말하길,
"그럼 누가 온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말하셨다.
"사람들 곁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 곁에서는 가능한 모든 것이다."
그때 페트로스가 대답하여 그이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예전에 보내버렸고 당신을 따라왔습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나를 따랐던 바로 너희들이, 그 다시 태어남 안에서,
인자가 그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았을 때,
바로 너희들도 열두 왕좌들 위에 앉을 것이다,
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심판하면서.
그리고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들이나 땅들이나 집들을 내 이름 때문에 보내버렸던
각각 모든 이는 여러 배를 취할 것이고
오는시대의 삶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첫 사람들이 끝 사람들이 되고
끝 사람들이 첫 사람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왕권은 집주인인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밖으로 나갔다, 일꾼들을 자신의 그 포도원 속으로 고용하려고..."
마태복음 19:1~20:1 풀이
[1] 예수께서 "유대의 경계들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예수는 다시 갈릴리도 돌아가지 않으십니다. 19장에서는 유대의 경계들을 넘고, 20장에게 하늘들의 왕권에 대해서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시고, 21장에 가면 예루살렘에 근접하십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예수를 죽이려는 이들의 본거지입니다. 즉 예수는 모진 고문을 당하기 위해, 그리고 십자가에서 질식사하기 위해,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죽으러 가는 와중에도 예수는 자신에게 나아온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죽으러 가는 사람이 사람들을 살려준다' 정작 자신은 죽을텐데, 그 죽을 사람이 죽을 것 같이 힘겨워 하는 이들을 살게 해줍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2] -극심한 남녀차별의 상황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공생애 내내 예수와 함께 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성실하게 예수의 반대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제는 하도 등장해서 낯설지도 않은 광경이 펼쳐집니다. 또 시험거리를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누가 누가 예수를 걸려들게 만들까?' 대회라도 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럼 그들이 패기 넘치게 가져온 문제를 확인해볼까요?
"자신의 여자를 모든 탓을 따라 풀어버리면 적법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 질문입니다. 하나하나 곱씹어 봅시다. 제가 "모든 탓을 따라"라고 번역한 것을, 개역한글은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라고 했습니다. '물론하다'는 '말할 것도 없다'는 말인데 요즘은 잘 쓰지 않죠. 오히려 새번역이 잘 번역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이스라엘에는 당시 율법 해석을 연구하는 두 개의 큰 학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샴마이 학파, 다른 하나는 힐렐이라 부르는데, 힐렐 학파는 이 '이혼하지 말라' 라는 율법에 다음과 같은 부과 규정을 추가했습니다. '여자가 간통죄를 저지른 경우 이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가 규정이 점점 확대되더니, 나중에는 '음식을 잘 못한 경우 이혼해도 좋다'가 추가되었고, 심지어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나면 이혼해도 좋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즉 규정상 남자는 이혼할 수 없지만, 어떤 이유만 있다면 이혼 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에 의한 부당한 이혼은 꼭 옛날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라야의 죽음>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남편이 부인과 이혼하고 싶어서 부인에게 간통죄 누명을 씌웁니다. 그래서 여자는 간통죄에 해당하는 투석형에 처해집니다. 투석형 말입니다. 여자를 반쯤 파묻어놓고, 그녀의 상반신을 향해 그 마을의 가장 어른부터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영화에서는 그 어른이 그녀의 아버지입니다). 이렇듯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부당한 이혼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남자들이죠)이 찾아와서 예수께 이혼에 관련된 율법 규정에 관해 물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이 예수를 "시험"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시험은 자신들이 빠져있는 곤경을 예수가 마주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이혼을 해야 한다' 라고 말하면, 그 여자들의 부당함은 여전히 지속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면 율법 해석의 권위자들과 맞서게 되겠지요.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기에, '메시아'는 자신들이 직면한 곤경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메시아의 극복 방식을 좋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일단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율법을 읽어보았느냐며 율법 자체를 긍정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인용하시는 구절은 레위기가 아니라, 창세기입니다. 2장 24절.
'이 때문에 (남자) 사람은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뒤에 남겨두고 자기 여자와 붙어 지내게 된다, 이 둘이 한 살몸 안으로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더 이상 둘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살몸이다.'
몇몇 번역어 소개부터 드립니다. 일단 여기 나오는 사람은 '남자 사람'입니다. 희랍어로는 안쓰로포스(ανθροπως)인데, 일반적으로 사람을 지칭하지만 이 사람은 '남자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19:5의 개역한글판에 나오는 "사람"은 남자 사람이라 봐야 합니다(뒤에 '아내'가 나오니 당연한 말이지만 말입니다). 사람이든 남자든 그게 뭐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을 남자라고 적는 건, 그만큼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 텍스트 상에서도 드러난 것이니까요.
-합하여 한 몸 되다 = 붙어 지내며 함께 멍에를 매다 제가 '붙어 지내다'라고 번역한 말은 '콜라오(κολλάω)'라는 동사인데, 흔히 "합하다"라 번역됩니다. 영어 사전에 'to glue together'라 되어 있어서 본드처럼 딱 붙어있다고 설명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꼭 남녀관계에서만 쓰이진 않습니다.
누가복음 15:15, 개역한글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탕자와 그 탕자를 고용한 돼지들 주인과의 관계가 '콜라오'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같이 지낸다'는 말이지요.
사도행전 5:13, 개역한글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 구절에서는 '상종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때도 남녀관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26, 개역한글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이렇듯 '콜라오(κολλάω)'는 '사귀다', '교제하다', '같이 지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29에서는 성령께서 빌립더러 마차 '가까이 접근하라'고 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즉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한다'고 할 때 '합하다'는 '함께 사귀며, 상종하며, 붙어 지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꼭 이 대목을 성관계의 늬앙스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또 성관계 때문에 남녀가 "한 살몸"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서로 사귀게 된 이 두 사람이 '멍에를 함께 매었기 때문에' 한 살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 '살몸(σαρξ)'은 인간성의 한계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결혼 관계를 합한 관계, 한 살몸인 관계라 한다면, '서로의 한계를 함께 짊어진 관계'라 볼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성경 구절들을 봐도 이 '사귐(κολλάω)'과 '멍에'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서로 사귀면 좋은 일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주네요.
고린도후서 6:14, 개역개정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고 예수님의 유명한 이 말씀도, 함께 붙어 지내자는, 사귐의 초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9, 개역개정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남자가 결혼한 것은, 남자가 그 여자와 함께 멍에를 맨 것이고, 그 멍에는 하나님이 매게 하신 것이므로 (남자) 사람이 가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법을 악용하는 인간성 남자였던 바리새인이 대꾸합니다. '모세는 배도의 책을 써주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했는데요?' 이때 제가 '배도의 책'이라고 번역한 것은, 신천지에서 말하는 '배도'와 같은 계열의 단어라서 이렇게 해봤습니다(ἀποστάσιον). 즉 이혼으로 번역하는 단어와 배신이라 번역한 단어가 같은 계열입니다. 그럼 모세의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했을 때, 대체 누가 배신한 것일까요? 여자가 먼저 간통죄를 저질렀다면, 그 이혼은 합당합니다. 그런데 합당한 이유를 제외한 모든 이유를 가지고 같이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 관계를 풀어버렸다면, 이때 배신한 것은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이때 받은 배신증서는 누구의 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요?
이 이혼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를 지적하시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들의 그 굳어버린 가온을 향하여 너희들의 그 여인들을 풀어주는 것을 너희들에게 돌렸다." 무려 한 문장 안에 "너희들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 너희들은 누구일까요? 여인과 함께 멍에를 지기 싫어서 종이 쪼가리 쓱쓱 써주고, 결혼 관계를 풀어버리는 남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본래 이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는 법은 여자들을 위한 법이었습니다. 남자가 함부로 이혼을 못하게 하고, 남자의 부당한 대우로부터 여자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세가 선의로 제정한 법이, 이제는 남자도 고칠 수 없고, 여자도 제대로 보호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후 1000년정도 흘렀더니, 그 율법이 "모든 탓을 따라" 이혼할 수 있도록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는 여자가 음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그 여인과의 멍에 매는 관계를 풀어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간통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때 '음행'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포르네이아로서 오늘날 포르노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처음 꺼내신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32, 개역개정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더욱 근본부터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싶음'을 가지고, 그 율법이 제정된 '목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당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제정된 목적을 무시하고픈 사람들입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에 부과 규정들을 붙이고, 이혼증서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채울 수 없는 성욕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올바른 결혼관계를 위한 법이 결혼관계를 쉽게 풀어내기 위한 법으로 악용된 것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이렇듯 당시 있었던 큰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는 남녀차별 문제입니다. 남자에 의한 부당한 이혼으로 인해 여자들이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둘은 그 문제를 법으로 더 가중시켰다는 점입니다. 법을 통해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기는 커녕, 법을 제멋대로 해석함으로써 그 고통을 배가 하고 있었습니다. 즉 비인간성에게는 그 어떠한 좋은 법도 그 비인간성을 고쳐주기는 커녕, 그 비인간성은 법을 먹고 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이익이 이익 아닌 이유 이 이혼 이야기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여자에게는 이혼을 위해 "모든 탓(책임)"을 갖다 붙이는 현실 속에서, 예수께서 "남자들의 탓(책임)"을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그럼 결혼하는 게 별로 이익이 없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저 '이익'은 대체 어떤 이익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직도 한 여자와 멍에를 끝까지 함께 짊어지는 것은 그들에게 이익도 기쁨도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얼빠진 소리를 뒤로 하시고, 다른 주제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 "결혼하는 것은 이익이 되지 않는다"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저 제자들이 말한 이익이란 성욕입니다. 한 여자로 만족할 수 없는 왜곡된 성욕인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것은, 환관입니다. 그런데 이 환관은 선천적이나 후천적으로 거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하고 싶은 환관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하늘들의 왕권을 통해서 자신이 스스로 환관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흔히 독신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저는 그런 해석이 뜬금없는 것 같습니다. 남자들의 왜곡된 성욕이 문제인 상황 속에서, 선천적이나 후천적으로 거세한 사람 이야기가 해법으로 제시될 수 있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권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환관으로 만든 사람은, 왜곡된 성욕과 스스로 무관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즉 '이익이라 이야기되는 것에서 자기 자신을 끊어내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제한 이익은 이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때"라는 말로 이어지는 어린이들 때문입니다. 이 어린이들이야 말로 왜곡된 성욕과 무관한 모범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게다가 예수께서는 그 어린이들을 꾸짖는 왜곡된 성욕을 포기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왕권이 이런 사람들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즉 이 어린이처럼 되려는 사람은, 왜곡된 성욕으로부터 떠나서(즉 자기 자신을 거세해서) 한 여인과 함께 끝까지 멍에를 매는 결혼 생활이 자기 자신에게 이익임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3] -좋은 이는 하나 뿐 이어지는 이야기도 앞에서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어떠한 맥락이 있습니다. '하나'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대형교회를 승계 받은 사람 이름 아니고요) 그저 원문에는 '하나가 왔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예수께 묻습니다. '오는시대의 삶을 가지려면, 내가 무슨 좋음을 행해야 하느냐고.'
예수의 답변은 또 '하나'입니다. '좋은 이는 하나이다.' 개역한글에는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때 "분"이라는 높임말은 번역자의 생각이고, 또 "오직"이라는 말도 원문에는 없습니다. 저는 저 '예수 앞에 나타난 하나'와 '좋은 하나'가 서로 관련이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해보고 있습니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나면 말씀해주세요.
-모자란 느낌 ‘오는시대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이혼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성실히 돌보느라, 여러 부가 계명들을 달아놓았던 (남자)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명한 이혼 증서법을 열심히 돌보며, 법에 맞는 이혼을 하려고 열심인 (남자)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저 "계명들을 돌보라"는 그런 돌봄이 아니겠지요.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모두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이 젊은이는 자신이 오는시대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무언가 모자르다는 느낌이 있던 것이고, 그래서 예수께 찾아왔을 테니까요. 그리고 묻습니다. 대체 이 모자른 느낌은 무엇이냐고.
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부터 '아버지 어머니를 존중하라'는 계명은 사실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모자른 느낌없는, 계명들을 모두 완수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가진 것을 팔아서 거지로 전락한 이들에게 주어라." 아마도 저 거지로 전락한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은 남자에게 버림받았던 여성들이 많았겠지요. 성경에서 구제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과부들" 말입니다.
가진 재산 팔아서 거지로 전락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계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저 젊은이를 꿰뚫어보시고, 저 젊은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간파하셨기에 하신 말씀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계명들을 돌보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명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않고, 간통죄를 저지르지 않고, 훔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부모를 존중하는 것은, 이웃을 나와 같이 여기는 것에서부터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자란 느낌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며 그 모자란 느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모자란 느낌이란, 자신의 재물과 이웃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아쉬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젊은이의 상태는, 이익이라 여겨지는 것을 끊어내지 못했던 남자들의 상황과 공명하지 않습니까? 아내를 사랑하기 싫어서 온갖 예외조항들을 만들어낸 남자들과, ‘이웃 사랑’을 핵심이 아닌 내가 쉽게 지켜왔던 법들 중 하나로 여기는 젊은이는 많이 닮아있지 않습니까? [4] -왜 얻어맞았어? 이렇듯 이웃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늘들의 왕권 속으로 들어가기가 힘겹습니다. 그런데 원문은 번역본들과는 달리 어찌되었든 "힘겹게 들어갈 것이다(δυσκόλως εἰσελεύσεται)"라고 쓰여 있습니다. 물론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정말 들어갈 수 있는지 의심이 들 만한 어려움이긴 합니다. 제가 번역하면서 웃음이 터졌던 부분이 나왔네요.
"그런데 제자들이 듣고서 크게 얻어맞은 듯 했다,"
이 사람들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다가 얻어맞은 것일까요? 왜곡된 성욕을 포기할 수 없던 제자들은, 또 혹시 메시아를 따르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흔히 이야기되는 '이익'으로부터 자신을 거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자란 느낌을 여전히 남기고서 말입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제자들의 다급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누가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이전에는 '부자 되는 것'과 '온전해지는 것'이 같이 간다고 생각했던 통념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부자가 온전해질 수 없다고요? 그럼 누가 온전해지겠어요?' 이런 말이지요. 이때 예수의 발언을 통해서 '온전해지다'라는 말은 의미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사람 곁에서는 불가능한, 하나님 곁에서는 가능한 일이란, 부자가 자신의 재물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자의 온전함입니다. 즉 부자의 온전함은,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주었던 그 이익의 단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단념은 이웃사랑의 욕망으로 가능합니다. 바로 하나님 곁에서 말입니다!
더 부자가 되려고, 당장의 부유함을 포기했다던 어부 페트로스도 다급해졌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예전에 보내버렸고 당신을 따라왔습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베드로의 말은 '보상이 있어야 한다' 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만족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보상이란,
예수께서 승천하셨을 때, 우리도 하늘에 앉아서 공동체를 돌보며(엡 2:6), 새로운 가족들을 얻고(곧 새로운 이웃인 에클레시아), 어린이 같이 되어(왜곡을 끊고) 오는시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모자른 느낌없이).
즉 우리의 보상은 곧 우리의 현재이고, 이 현재가 완성되는 것이 곧 우리의 책임이자 보상입니다.
그러나 다른 보상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첫 사람이었지만 끝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보상에 눈 뜬 이들은 끝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첫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끝 사람에서 첫 사람이 되는 쪽으로 자연히 기울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끝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놓는 일은, 정말 흐르는 강물을 거르스는 힘겨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곁에 있다면, 그 힘겨운 과정을 통해서 모자름 없는 충만함을 살게 될 것입니다. 현재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