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만일 네 형제가 비뚤어졌다면, 너는 가라, 그에게 말하라 너와 그 사이에서만. 그런데 만일 그가 네 (말)을 듣는다면, 너는 너의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듣지 않는다면, 너 자신과 함께 하나 혹은 둘을 곁에서 취하라, 이는 입으로 두 증언자 혹은 셋이 모든 이야기를 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흘려듣는다면, 너는 그 에클레시아에게 말해라. 그런데 만일 그 에클레시아(의 말)도 그가 흘려듣는다면, 그는 너에게 이방인과 세리처럼 될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만일 이 땅에서 묶는다면 그만큼 하늘에서 묶인 것이 될 것이고, 너희들이 만일 이 땅에서 푼다면 그만큼 하늘에서 풀린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들로부터 두 사람이 그들이 구하던 모든 문제에 관하여 이 땅에서 함께 소리낸다면, 그들에게 (그것이) 될 것이다, 하늘의 나의 아빠의 곁에서. 왜냐하면 나의 이름으로 함께 이끌린 둘이나 셋이 있는 곳, 바로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안에 있기 때문이다.
[2]
그때 페트로스가 그이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주여, 얼마나 자주 나의 형제가 내 속으로 비뚤어질 것이며 (얼마나 자주) 나는 그에게 놓아주어야 합니까? 7회 까지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에게 7회까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7의 70회 (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서 하늘들의 다스림은 다스리는 사람과 같다, 그는 자신의 노예들과 함께 이치(말)를 함께 들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가 함께 들기를 시작할 때
그에게 만 달란트의 빚진 자 하나가 바쳐졌다.
그런데 그가 갚지 못하자,
주는 그에게 부인과 아이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을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그 노예가 그 자신을 떨어뜨려 그에게 절하며 말하길.
"나에게 긴 호흡으로 참으소서, 그러면 모든 것을 당신께 내가 갚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는 바로 그 노예에게 애끓어 그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채무를 그에게 놓아주었다.
[3]
그런데 그 바로 그 노예가 밖으로 나가며 그의 동료 노예들 중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는 그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이였다,
그리고 그를 움켜쥐고 목 조르며 말하길,
"네가 만일 빚졌다면 갚아라."
그래서 그의 동료 노예가 엎드려 그의 곁에서 간청하며 말하길,
"나에게 긴 호흡으로 참으소서, 그러면 당신께 내가 갚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떠난 뒤 그를 감옥 속으로 붙들었다,
그가 빚졌던 것을 갚을 때까지.
그래서 그의 동료 노예들이 그 된 일들을 보고서 매우 슬퍼했다,
그리고 가서는 그들의 그 주님께 된 모든 것을 설명했다.
그때 그의 주는 그를 앞으로 불렀고 그에게 말하기를,
"열악한 노예야!
나는 바로 그 모든 빚을 너에게 놓아주었다,
그때 너는 내 곁에서 간청했다.
너도 네 동료 노예를 긍휼히 여겨야만 하지 않았느냐,
바로 내가 너를 긍휼히 여겼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주는 화내며 그를 고문하는 이들에게 넘겼다,
그가 빚졌던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이렇듯 나의 하늘의 나의 아빠도 너희들에게 하실 것이다,
만일 너희들 각각이 각자에게 속한 그 형제에게 너희들의 가온들로부터 놓아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마치실 때가 되었고,
그는 갈릴라이아에서부터 옮기셔서 요단강의 반대편, 유대의 경계들 속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18:15~19:1 해설
우리는 지난주에 '자신을 낮추는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아흔 아홉 명과 그 사람들을 뒤로 하고 떠난 한 사람을 살펴봤습니다. 이 사람은 속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속은 사람을 찾아서 예수는 하늘에서부터 오셨습니다. 이 속은 사람이 돌아오는 일이, 안속은 사람 아흔 아홉 명과 함께 있을 때보다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역시,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네 형제가 비뚤어졌다면"
[1]
-비뚤어짐에 대한 삼 단계의 대처 비뚤어짐은 우리 삶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비뚤어짐도 비뚤어짐이지만, 특히 타인이 비뚤어짐은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 사람의 비뚤어짐, 저 사람의 비뚤어짐으로 오늘도 뉴스거리는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비뚤어짐들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다뤄야 하는 것은 "네 형제"의 비뚤어짐입니다. 여기 "형제"는 '피붙이 남자 형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메시아를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에클레시아의 일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여성들도 포괄하기 위해 형제를 “(하나님의) 가족”이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이 형제는 메시아를 따라 자신을 어린이처럼 낮추는 삶을 살기로 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기로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비뚤어진 형제”는 아흔 아홉 마리 양과 함께 있다가, 그들을 뒤로 하고 속아버린 어떤 한 마리의 양과 같습니다.
일단 온전하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저 속아버린 형제에게 해줘야 할 일은 먼저 일 대 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15절에 "너에게"라는 말을 추가해서 "너에게 죄를 짓거든"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러니 꼭 나에게 대한 잘못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형제가 어떤 잘못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일 대 일로 그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원칙만 잘 지켜지더라도 공동체의 많은 문제들은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대인은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살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친절을 고집하다가 침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 대 일로 이야기하는 일 단계 방법으로도 형제가 비뚤어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자신과 함께 둘이나 셋의 증인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때 희랍어 원문은 "두 증인 혹은 셋"이라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19:15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일 대 일로 이야기한 뒤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됩니다. 그저 당사자와 나만 잊으면 그만인 일입니다. 그러나 나 외에 복수의 사람이 형제의 비뚤어짐을 확인하게 되면, 그것은 ‘사건으로 확정’됩니다. 제가 한 번역의 "모든 이야기를 세운다" 가 이것을 의미합니다. 두 세 사람이 함께 찾아왔는데도 비뚤어짐을 고집한다면, 그 형제의 비뚤어짐은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비뚤어짐이 누군가의 입에 회자될 만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인간성입니다. 이 부끄러움의 반대는 뻔뻔함입니다. 로마시대의 문인 키케로는 이 뻔뻔함 때문에 로마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 했고, 그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 뻔뻔한 형제에게 섬겨줘야 하는 최종 삼 단계는 에클레시아 전체가 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종 권고입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의 말도 흘려 듣는다면, 그는 에클레시아 안에서 이방인과 세리처럼 될 것입니다. 즉 에클레시아 안에 있으면서도 에클레시아 일원이 아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에클레시아를 떠날 것입니다. 자신의 비뚤어짐을 고집하기 위해서, 많은 가족들을 버리고서 말입니다.
-대처의 목적 이 삼 단계의 대처 이후, 예수께서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라고 하십니다. 무언가 중요한 내용이 이어지겠지요. 예수는 권한에 대해 이야기해주십니다. 즉 에클레시아에게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 권한은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그 권한인데(마태복음 16:19), 바로 하늘에서의 '풀기'과 '묶기'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이 때 묶기와 풀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는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다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때 앞에서 언급되었던 “두 사람”이 다시 등장하는데, 문장을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무언가를 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문제를 구하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함께 소리 내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때 "함께 소리 내다"를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 개인번역 그런데 그는 그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부터 '함께 소리 냈고' 그 날 동안 그들을 자신의 포도원 속으로 보냈다.
“함께 소리 내다”는 "서로 동의했다"는 의미입니다. 고용에 있어서는 쌍방계약을 의미합니다. 즉 두 사람이 무언가를 구하다가, 마침내 합의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두 사람이 구하다가 마침내 합의에 이르게 된 사안은 무엇일까요? 예수는 이 두 사람이 합의에 이르기만 하면, 그 일이 "하늘의 나의 아빠 곁에서 이뤄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의 내용과 "다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내용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합의도 "이 땅에서" 벌어졌고, '풀기'와 '묶기'도 "이 땅에서" 벌어졌습니다.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듯, 이 땅에서 한 합의대로 하늘의 아빠 곁에서 이뤄집니다. 그리고 이들의 합의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끌린 것이고, 바로 거기에 예수께서도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냥 모인 두 사람이 아니라, 비뚤어진 형제의 용서를 위한 증인들이잖습니까? 이들이 구하는 것은 속아버린 저 양 하나가 다시 자신을 낮추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이 합의 합니다. 그 합의는 그 비뚤어진 형제에 대한 묶기와 풀기에 관련된 내용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형제가 우리의 일원인지 아닌지 판단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형제가 아니라고 판단할지라도, 그것은 그가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지, 그를 아예 잘라내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이 판단 속에 메시아가 함께 하십니다.
[2]
그런데 이 내용을 베드로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봅시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길게 하신 말씀이 결국 ‘용서하라’는 메시지임을 간파했습니다. 즉 두 사람은 비뚤어진 형제가 돌아오길 바라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집부리는 형제를 묶지만, 결국 그 묶기는 풀기를 위함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에클레시아는 세리와 이방인 같았던 그와 다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에클레시아가 묶은 것이 하늘의 묶기이고, 에클레시아가 풀면 하늘의 풀기입니다. 즉 에클레시아가 하늘의 결정을 수행합니다. 예수는 바로 비뚤어진 형제를 위해 함께 구하며 공통된 의견을 내놓으려는, 그 공동체에 계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심드렁하게 말합니다. "몇 번 정도 다시 받아주면 될까요? 일곱 번 정도면 될까요?" 아마도 베드로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뚤어짐과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베드로의 횟수에 70을 곱해버리십니다. 그리고 유명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늘들의 다스림은 다스리는 사람과 같다." 이 다스리는 사람을 "주"라고 부릅니다. 주님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주인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만,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κυριος). 이 다스리는 사람이 하늘들의 통치, 즉 천국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노예들을 불러 '함께 들기'를 시작합니다. '함께 들기(συναιρω)'는 '회계하다'라고 번역되었는데, ‘함께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함께 결과를 내려고 함께 하는 이는,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 그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가 다스리는 자 앞에 '바쳐졌다'고 말하는데, 이 '바쳐졌다'라는 동사도 주목해볼만 합니다. 이 단어는 제사장이 제물을 바칠 때 사용하는 동사이고,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메시아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실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9:26). 즉 빚진 자가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그가 용서받았던 것은 그가 간청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간청해도 주인이 안 들어주면 그만이니까요. 바쳐진 노예는 주인의 긴 호흡을 요구하며, 자신이 주인에게 정당한 대가를 돌려주겠다고 확약했습니다. 이때 주인은 주인 마음대로 했습니다. 이때 이 노예는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의 빚 때문에 팔리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그 점에 주인은 애끓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인 마음입니다. 주인은 거저 그를 '풀어주었습니다.' 여기에 '풀기'가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풀기는 죄를 인정한 사람에 대한 탕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죄를 인정한 것이 결코 탕감을 위한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비뚤어진 형제가 자신의 비뚤어짐을 인정했을 때, 그를 언제든 기꺼이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 '풀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그를 묶었던 원칙도 유지되고, 마침내 그를 풀어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묶여있던 사람은 스스로 묶여있던 것이지만, 그는 순전히 용서해주는 타인들로 인해 탕감받은 것입니다. 잘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본인이 버린 지체들을 잃기는 커녕 다시 얻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가 겪은 것은, 다스리는 이의 다스림, 곧 천국입니다.
다시 베드로로 돌아갑니다. 메시아를 만난 베드로가 겪는 것은 군림하는 스승이 아닌, 옆에서 대화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는 언제나 함께 해주셨습니다(누가복음 5:8). 베드로는 마치 세리처럼 고백했습니다(누가복음 18:13). 그런데 자신이 에클레시아의 일원답지 않게 살았음을 고백했을 때, 그는 오히려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그런 사람을 원하셨고, 베드로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신이 겪은 것을 남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 예수의 통치 속에서 큰 자가 되고 싶어하고, 나머지 제자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용서를 일곱 번으로 한정하며 빈정거립니다. 자신은 탕감 받았으나, 다른 사람은 탕감 하기는 커녕 자기 아래 옭아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내용들을 일단 교회 안에서의 내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관계에서의 용서를 다루는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내용이 "비뚤어진 형제"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클레시아 안에서의 비뚤어짐을 처리하는 방식, 그 방식을 관통하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탕감 받았음에 감사하는 사람들의 모임 안에서 비뚤어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3]
베드로가 이어지는 이야기를 어찌 들었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한정한 일곱은 완전수가 아니라, 실제 수입니다. 마치 못해 용서할 수 있는 최대수치로서 일곱입니다. 이 일곱은 예수의 일곱이 아닙니다. 마치 신천지의 144,000이 하나님의 144,000이 아니듯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일곱으로 제한된 긍휼은 긍휼이 아닙니다. 긍휼은 오히려 제한이 없을 때 긍휼이라 부를만 합니다. 그 제한 없는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제를 제한합니다. 그를 움켜쥐고 목을 조릅니다. 그리고 조건문으로 그를 압박합니다. 동료 노예가 하는 말은, 그 탕감 받은 노예가 했던 바로 그 말입니다. 천국을 닮은, 그 다스리는 자의 다스림은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이 사람의 다스림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으면 그만입니다. 여기에 비뚤어짐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싶음'이라는 글자가 비뚤어짐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주인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를 탕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과 다른 ‘싶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주인과 다른 하고픔, 주인과 다른 욕망이 비뚤어짐을 작동시킵니다.
이 주인과 다른 ‘싶음’을 고집한 자는 주인의 긍휼을 무효로 만듭니다. 따라서 주인은 그의 탕감을 무효로 되돌려줍니다. 그는 고문하는 이들에게 넘겨지는데, 그 고문이란,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을 갚기 위해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에게 속한 그 형제들에게 무한한 긍휼을 가지고, 풀어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권한이 있다고 그를 묶어두었을 때, 정작 묶이는 것은 자신입니다. 이때 개인이 강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각각이 각자에게 속한" 즉 비뚤어진 형제를 용서하는 일만큼 개인적인 일도 없습니다. 이 싸움은 각자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이 무조건 잘못을 봐주는 싸움은 아닙니다. 만일 잘못을 봐주면 그만인 것이 용서였다면, 오늘 본문 서두에 세 번이나 비뚤어진 형제를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결국 묶더라도 그것은 풀림의 큰 그림을 위한 것이라고, 즉 무한한 긍휼로 무한히 용서하겠다고, 탕감 받은 자가 탕감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마침내 유대의 경계를 넘으셨습니다. 무한한 긍휼의 용서가 벌어질 바로 그곳으로 발 딛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