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왜냐하면 그가 미쳐서 열악하게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번 불 속으로 떨어지고 여러번 물 속으로도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아들)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며 말하셨다.
"아! 신실하지 못하고 뒤틀린 세대여! 언제까지 너희들과 함께 내가 있으랴? 언제까지 너희들을 내가 참으랴? 너희들은 나에게 그를 여기 데려오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꾸짖으셨다, 그리고 아들로부터 그 다이몬이 나왔다, 그리고 아이가 바로 그 때로부터 치료되었다. 그때 제자들이 그이에게 다가와 개인적으로 말했다.
"어떤 이유로 우리는 그걸 밖으로 던질 수 없었습니까?"
그때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들의 없는신실함 때문이다. 즉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들이 겨자 알갱이 같은 신실함을 가졌다면, 너희들은 저 산에게 말할 것이다, '거기로부터 저기로 내려가라' 그리고 산은 내려갈 것이고, 무엇도 너희들에게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21절은 사본마다 있기도 없기도 하다)
[2]
그런데 그들이 갈릴리에서 함께 모이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인자가 금세 사람들의 손들 속으로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자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에 일으켜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몹시 슬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카페르나움 속으로 갔을 때, 두 드라크마들을 받는 이들이 페트로스에게 왔고 말했다.
"너희들의 선생은 두 드라크마들을 완납하지 않으시냐?"
그가 말했다.
"완납하신다."
그리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보다 먼저 앞서시며 그에게 말씀하시셨다.
"너에게 어떤 생각이 있느냐, 시몬아? 땅의 왕들이 어떤 이들로부터 끝들과 인두세를 취하느냐? 그들의 아들들로부터냐, 외부인들로부터냐?"
그런데 페트로스가 대답했다.
"외부인들로부터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그럼 아들들은 자유인들이로구나.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너 바다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리고 올라온 첫 번째 고기를 들어라, 그리고 고기의 그 입을 열면 네가 은화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취해서 나와 너에게 맞서는 그들에게 주어라."
[3]
바로 그 시간에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는 말했다.
"하늘들의 통치 안에서는 누가 큽니까?"
그리고 그이는 아이를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셨고 말하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들이 몸을 돌려서 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들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바로 이 아이처럼 자신을 낮출 것이라면(fut.), 그 사람이 하늘들의 통치 안에서 큰 사람이다. 또 만일 나의 이름으로 바로 이러한 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 속으로 신실한 작은 이들 중 하나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당나귀 맷돌을 그의 목 주위에 매고 바다의 깊음 안에 가라앉는 것이 그와 함께 간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코스모스에게 화가 있다! 즉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오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런데 만일 네 손이나 네 두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뽑아라, 너로부터 던져버려라. 그 삶에 들어가는 것이 너에게 온전하다, 팔이나 다리없이 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서 오는시대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그리고 만일 네 한 쪽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뽑아라, 그리고 너로부터 던져버려라. 외눈으로 그 삶에 들어가는 것이 너에게 온전하다, 두 눈 가지고 그 불의 게헨나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너희들은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도 얕잡아보지 않도록 보아라. 즉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하늘에 있는 그들에 속하는 천사들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늘의 나의 아버지 면전을 보고 있다. [4]
너희들은 무슨 생각이 드느냐? 만일 어떤 이에게 100마리의 양들이 있고 그것들로부터 하나가 속게 되었다면(πλαναω), 99마리를 산들로 보내버리고 속임당한 것을 찾으러 떠나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가 그 곁에서 더욱 기뻐한다, 속지 않은 99마리 곁에서보다. 이렇듯 하늘들의 너희들 아버지의 면전에 있는 뜻은 이 작은 것들 중 하나를 멸망시키기 위한 게 아니다.
그런데 너희 형제가 비뚤어졌다면...
마태복음 17:14~ 18:15 해설
요새 제가 하고 다니는 이야기를 가만 생각해보니까, 저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이게 문제다', '저게 문제다'. 그리고 대부분 제가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 공감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공감해주는 사람과 이야기하다보면, 그 문제에 빠져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기가 쉽더라고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뒷담화가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특정 인물에 대한 비판이 아니더라도, 대충 얼버무린 어떤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가 되기도 합니다. "정치인들", "목사님들", "신학생들", 최근에는 "미국", "북한", "남성들", "여성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틀린 얘긴 아닙니다. 그 사람들 비뚤어졌습니다. 물론 저도 비뚤어졌지만, 내가 비뚤어졌다고 다른 사람의 비뚤어짐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하면 서로 무관심한 것 외에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비뚤어진 걸 비뚤어졌다고 말하는 게 정의 아닙니까? 비뚤어짐 말고 매일 웃으며 좋은 말만 하기에는 세상은 통째로 비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손에 잡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가 자주 입에 올리는 그 '타인의 비뚤어짐'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 주변에 비뚤어진 사람을 두고 있고, 또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기를 자주하는 분이라면, 저와 같이 오늘 본문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7:14에서 18:15에 이르는 긴 본문입니다. 네 단락으로 나눠봤는데, 여러분이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일 겁니다.
[1] 아들을 못 고친 제자들
[2] 죽고 부활하는 예수를 불안해하는 제자들과 세금 논쟁
[3] 천국에선 누가 큽니까? 묻는 제자들
[4] '잃어버린 양 하나' 이야기
그러나 개별적으로 이야기는 알아도, 이 이야기들 서로 연결되면서 만들어내는 더 큰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걸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1]
일단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실패자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아이의 병명이 간질인지 아닌지 논쟁이 있지만, 별로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아이가 힘들고, 그 아이를 보는 아버지의 애간장이 녹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아비가 예수께 호소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나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왜냐하면 그가 미쳐서 열악하게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번 불 속으로 떨어지고 여러번 물 속으로도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아들)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절절함이 느껴집니다. 아들의 병세를 지켜보는 자신, 그래서 그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오면서 기대했던 자신, 그런데 그 기대에 실망해버린 자신. 분명 제자들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 귀신 쫓고 병 고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세가 이 번 만큼은 작동하지 않았을까요? 누구보다 절박한 아버지를 앞에 두고서 말입니다.
예수는 신실함이 없었다고 진단합니다. 개역한글에는 "믿음이 적다"라고 말하지만, 적은 믿음은 작동하지 않는 믿음, 있으나 마나한 믿음입니다. 그러니 적게라도 있다고 만족할 수 없는 믿음이겠지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보면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 라는 구절로 이 본문이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주제로 설교가 많이 되었지요. 어떤 사본에는 기도 옆에 ‘금식’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만 해서는 안된다. 금식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언급되는 21절은 모든 사본에 있는 구절은 아닙니다. 그리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구절로 결론을 내릴 순 없겠습니다. 그러니 기도나 금식을 해야한다기 보다는, '제자들에게는 신실함이 없었다'로 [1] 본문을 정리합시다. 제자들이 귀신이 안 나가는 걸 의아하게 여기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병 고치고 귀신 쫓는 것을 당연한 원리처럼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귀신은 그러한 원리에 기대서 내쫓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즉 '원리'나 '법칙'은 신실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원리나 법칙을 신실함과 맞바꾼다면, 정말 막대한 손해,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2]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내쫓으면, 귀신은 당연히 나갈 것이다' 이게 제자들이 기대고 있던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 [2] 에서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몹시 근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모른 채 자기의 원리나 법칙에 기대어 있는 모습니다. 혹 우리도 신실함을 어떤 원리로 바꿔버리는 경우가 있진 않나요? 그래서 그 원리에 대한 신뢰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착각하는 경우는 없는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2년 전 아버지와 저는 어머니가 안 돌아가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간이 부활주간이었거든요. 게다가 야고보서에 쓰인 대로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기도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원리들이 겹쳐서, 어머니는 반드시 깨어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 몸은 점점 괜찮아지고 있었거든요. 신장 투석기도 떼고, 피부색도 돌아왔고, 돌아가시기 전날에는 뇌파도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날마다 기도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제가 경이롭게 생각하는 건 아버지입니다. 저는 아버지 신앙이 깊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고 매달렸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게 하나님에 대한 실망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버지가 본인이 그리고 있던 인과관계를 신뢰했던 것이라면, 아버지의 신뢰는 결정적인 데미지를 입고, 어머니 죽음과 함께 침몰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신뢰했던 건 원리나 법칙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찬양 가사 그 대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신실함은 죽고 사시는 예수에 대한 신뢰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어선 안 되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고, 이러한 신뢰는 '대장은 결코 고난 받거나 죽지 않는다'는 본인들의 원리에 대한 신앙이었던 것이지요. 없는믿음입니다. 마태는 아이를 고치지도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제자를 보여주더니, 갑작스레 세금 논쟁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성전세를 걷으려는 사람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번에도 오해의 아이콘인 베드로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성전세 걷는 이들은 두 드라크마를 요구하는데,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 하루 급여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반세겔’이라고 되어있는데, 세겔은 유대식 단위이고, 드라크마는 희랍식 단위입니다. 세겔은 노동자 4일 급여이고요. 그러니 반 세겔은 노동자 이틀 급여이고, 그러니 두 드라크마입니다. 단위야 그때그때 찾아보면 그만입니다.
당시 성전세를 걷는 것은 출애굽기 구절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0:13,14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한다... 스무 살이 넘은 남자, 곧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주에게 이 예물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어떤 좋은 말씀이든 나쁘게 이용할 수가 있지요. 당시 성전세는 이스라엘 위에 군림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주요 자금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존 유대 지도자들의 시스템에 맞서신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도 성전세를 내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그리고 베드로는 어물쩍 '내실거야'라고 말한 뒤 그 사람들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당시 성전 제도에 대해 반기를 드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전세가 제사장들의 권위와 전횡을 위해 사용되고 있고, 이것은 인두세를 걷는 로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하게도 서로 적대적으로 여기는 유대와 로마의 지도자들은 비슷하게도 닮아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양쪽에 반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인입니다. 유대로 생각하면 예수는 내부인 중의 내부인인 제사장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지붕 뚫린 집에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용서를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금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로 생각하면 예수는 황제(퀴리오스)이십니다. 자기가 신이라고 광고하는 인간 카이사르는 가짜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성전세를 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성전을 뒤집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아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아들의 말인 것이지요.
[3]
본문 [1]도 그렇고, [2]도 그렇고, 오늘 전체 맥락을 관통하는 것은 '오해하는 제자들'입니다. 일단 우리는 아들이고, 원래는 세금 낼 필요가 없는 자유인들(로마 시민을 부르던 호칭입니다)이라는 말에 대한 제자들의 원리는 다시 반응합니다. '아, 역시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대단해. 그럼 또 물어봐야지! 우리 중에 누가 큰 자입니까?“
예수의 답변은 역설적입니다. 높아지고만 싶은 제자들에게 낮춰야 높아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만 낮출 것이 아니라, 낮춘 이를 영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이미 낮춘 이들을 걸려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조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붙은 내용은 충격적입니다. 걸려넘어지게 하는 것을 도래시키는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작은 자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이 사람은, 당나귀가 끄는 커다란 맷돌을 목에 두르고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멸망을 두고 예언했던 내용입니다(예레미야 51:63,64, 요한계시록 18:21). 즉 작은 자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것은 곧 심판의 대상이 되는 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심지어 자기의 사지를 절단하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바다에 가라앉음’이나 ‘오는시대의 불’이나 ‘게헨나의 불’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할 생각과 실천의 사람은 그야말로 바다에 가라앉는 중이고, 오는시대의 불 속에 타들어가는 중이고, 쓰레기 하치장에 이미 던져진 사람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요청하십니다. 작은 사람들 중 하나도 얕잡아 보지 않도록, '보라고'. 아예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만 봐야 합니다. 그 작은 자들의 진상은 천사들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4]
그리고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신실함이 없어서 아이를 고칠 수 없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기도해야 한다'고 설교되듯이, 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이야기는 '전도해야 한다'로 설교되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용을 쭉 따라왔다면, 그렇게 이해하긴 곤란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무슨 생각이 드느냐?" 이 말은 갑작스레 나온 말이 아니라, 앞의 문맥을 가진 말입니다. 신실함 없이, 귀신도 못 내쫓고, 십자가에 돌아가실까 전전긍긍하다가, 성전보다 권세 있으신 분의 말을 뜨고는 금세 우쭐하여 누가 높은지나 따지고 있던 제자들이, ‘낮은 자야 말로 큰 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그 낮은 자를 결코 걸려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나오는 말이 "너희들은 무슨 생각이 드느냐?" 입니다.
100마리의 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100마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양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개역성경이 "잃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희랍어로 '플라나오(πλαναω)'라는 단어입니다. 이 플라나오가 나오는 구절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태복음 24: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야고보서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베드로전서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후서 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오역,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플라나오는 '오해하다', '미혹하게 하다', '속다', '길을 잃다', '미혹되다', '꾀다' 이런 식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기본 뜻은 ‘어그러진 길을 가다’입니다. 그럼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100마리 중에 있다가 빠져 나간 한 마리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이 사람은 본래 작은 자들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속아서, 미혹당해서, 꾀여서,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든 길을 잃게 되었던 그 사람의 마음을 돌려서, 다시 높음이 아닌 낮음을 추구하도록,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를 추구하도록, 걸려넘어졌던 그를 다시 일으키도록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왔을 경우, 속지 않은 99명과 있을 때보다, 다시 제 길로 돌아온 그 한 사람과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오늘 마지막에 있는 구절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렇듯 하늘들의 너희들 아버지의 면전에 있는 뜻은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를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 그 작은 자들의 천사가 있다는 구절도 읽었었지요. 그 메신저가 하나님과 자신을 낮추려는 자 사이에서 왔다 갔다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여기 나왔네요. 작은 사람들 중 하나를 멸망시키려는 뜻은, 하늘들의 통치가 아니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군가는 작은 자들을 멸망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많은 이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져 길을 잃고 속고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아니라, 걸려넘어진 한 사람이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을 만들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속아 넘어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데려 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속임 당하다'를 '잃다'로 번역했기 때문에, 앞에서의 문맥이 툭 끊어진 감이 있습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지만, 단순히 그 양이 제 멋대로 간 게 아니라, 속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서두에 타인의 비뚤어짐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지요? 타인의 비뚤어짐을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단 먼저 돌아봐야 하고요. 또 그 사람의 비뚤어짐은 곧 속아 넘어간 것이기 때문에, 그저 '비뚤어졌네'하면서 혀를 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게 나의 기쁨이자, 하나님의 기쁨이니 말입니다. 혹여나 내가 누군가를 걸려넘어지게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때 그 잘못 때문에 길을 잃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건, 나의 사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죄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목에 다가 맷돌을 매달고 있는 사람이, 바다 깊은 곳에서 다시 수면 위로 헤엄을 치는 것만큼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든 내 손과 발과 눈을 자를 각오로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고, 또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우리는 이 내용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습니까?
다음 주 본문 예고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너희 형제가 비뚤어졌다면..."
의미심장하지요? 애태우는 아버지의 아들을 고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없던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게 신실함이라면 신실함이 무엇인지 생각해볼만 할 것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