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이미 보내버렸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나에게 따랐던 너희들이, 새로운 세대 속에서,
그때가 인자가 자신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을 때인데,
너희들도 열 두 왕좌에 앉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그 열 두 지파를 판단하면서.
그리고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들이나 땅들이나 집들을 나의 이름 때문에 보내버렸던 모든 이는 많은 넘치는 것들(πολλαπλασίονα)을 받게 될 것이고 오는시대의 삶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첫 사람들이 끝 사람들 일 것이고 끝 사람들이 첫 사람들 일 것이다.
[2]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그 왕권은 집주인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밖으로 나갔다, 일꾼들을 자신의 그 포도원 속으로 고용하려고. 그런데 그는 그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부터 함께 소리냈고 그 날동안 그들을 자신의 포도원 속으로 보냈다. 그리고 3시쯤(오전 9시)아고라에 일없이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보러 나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그 포도원 속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나는 의로운 무엇이든 여러분에게 주겠소."
그리고 그들이 떠났다.
그런데 다시 그는 여섯 일곱시 쯤 나가서 같은 방식으로 했다.
그런데 열한시쯤 그는 나가서 서있던 다른 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어찌 여기서 당신들은 일없이 온 하루동안 서 있었소?"
그들이 그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한다.
"당신들도 그 포도원 속으로 가십시오."
그런데 저녁이 되자 그 포도원의 주인이 그의 농장관리인에게 말한다.
"그 일꾼들을 부르고 삯을 갚아주어라, 끝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첫 사람들까지."
그런데 첫 사람들이 와서는 그들이 더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들도 그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받고서 그 집주인에게 궁시렁거리며 말했다.
"저 끝 사람들은 한 시간 동안 (일) 했다, 당신은 하루의 무게와 햇볕을 견딘 우리와 저들을 동일하게 했다."
그런데 그가 듣고서 그들 중 하나에게 말했다.
"이보게, 나는 자네에게 불의하지 않았네. 나와 한 데나리온에 함께 소리내지 않았나? 자네의 것을 들고서 가게. 그런데 나는 저 끝 사람에게 자네에게 처럼 주기를 바라네. 아니면 내가 나에게 속한 것들 안에서 행하는 것이 나에게 적법하지 않다는 겐가? 아니면 내가 선하기 때문에 자네의 눈이 악하다는겐가?"
그렇게 끝사람들이 첫사람들일 것이고,
첫 사람들이 끝 사람들일 것이다."
[3]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 속으로 올라가시며 열 둘을 각자 곁에서 붙드셨다, 그리고 길 안에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0.
오늘은 흔히 '포도원 일꾼 비유'로 알려진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알려지기는 이런 제목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오늘 본문 연구를 마치고나면 저 '포도원 일꾼들'은 이 본문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오늘 첫 구절인 마태복음 20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20:1, 개인번역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그 왕국은 집주인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장과 절을 구분할 때, 이 포도원 일꾼 비유를 20장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첫 문장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점은,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장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장', '절'을 신경 쓰지 않고 전체 맥락을 확인하며 읽는 것이 좋습니다.
1.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이미 보내버렸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흔히 "버리다"라고 번역되는 희랍어 '아페미'는 "보내다"로도 번역되기도 합니다. "용서하다"로 번역되기도 하고요. 물건이 되었든, 누군가의 잘못이 되었든, 지금 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으니, 그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보상이 없다'가 아니었습니다. 보상이 있습니다. 그 보상은 '인자가 자신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을 때, 예수를 따랐던 자들도 함께 열 두 왕좌에 앉는 것'입니다. 인자가 자신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는 것은 승천 사건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7장의 예언이 마침내 이뤄지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마침내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는 인자임이 드러나실 때가, 곧 열 두 제자들이 이 땅을 다스릴 때라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 에베소서에도 나오고 요한계시록에도 등장합니다.
에베소서 2:6, 새번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21, 새번역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따라서 '보좌에 앉음'은 먼 미래의 일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승천과 그 예수를 따르는 삶은 이미 이 땅을 심판하며 다스리고 있습니다. 옳은 것이 드러났을 때 옳지 않은 것은 이미 자연스럽게 판단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마태복음 16:25를 '순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름 때문에 가족들과 재산들을 '보내버렸던' 사람은 곧 순교할 각오로 예수 뒤를 따르는 십자가 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많은 넘치는 것들을 받습니다. 또 오는시대의 삶을 삽니다. 여기서 '많은 넘치는 것들'이란 새로 얻게 된 가족으로서 에클레시아일 것이고, 앞에서 언급한 왕좌에 앉은 삶이 곧 오는시대의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말을 덧붙이십니다.
마태복음 19:27, 개인번역
그런데 많은 이들이
첫 사람들이 끝 사람들 일 것이고
끝 사람들이 첫 사람들 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제가 준비한 본문의 말미에도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16
그렇게 끝 사람들이 첫 사람들일 것이고,
첫 사람들이 끝 사람들 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27부터 20:16사이의 내용은 첫 사람들과 끝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2.
이제 그럼 본격적으로 포도원 일꾼들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는 "그 하늘들의 그 왕권" 곧 천국을 집주인에 비견합니다. 그 집주인은 이른 아침 밖으로 나섭니다. 그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이유는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고라라는 곳에 모이는데, 오늘날 시장의 역할도 하면서, 재판도 열리던 장소를 말합니다. 여기에 그날 일거리를 얻으려는 남자들이 새벽부터 모여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인데요. 새벽에 인력 사무소에 가면 그날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그런데 좀 늦게 나오면 좋지 않은 일터로 가게 된다던지, 어떤 날은 아예 일거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날은 하루종일 공치는 것이고, 집에 돌아가 아빠만 기다리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개 숙일 수 밖에 없는 하루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3에 보면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번역했는데, 저기서 '놀다'는 '게으르다'로 번역할 수 있고(새번역), 또 '일없는'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저 일꾼들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놀고 있거나 빈둥거리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놀길 좋아하고, 빈둥거리는 사람이 아침부터 인력 사무소에 나올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천국을 닮은 집주인은 그날 아고라에 다섯 차례나 나가봅니다. 새벽에 한 번 나가서 사람들도 고용하고, 오전 9시에도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자기 포도원으로 고용합니다. 그리고 정오에도 한 번 나가보고, 오후 세 시에도 또 나가고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봅니다. 그러니까 이때 집주인이 아고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일거리가 없어서 그날을 걱정하는 사람들 입니다. 집주인이 오후 다섯시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 여기서 당신들은 일없이 온 하루동안 서 있었소?"
즉 이 물음은, 지금까지 놀고 있었느냐는 핀잔이 아니라, 왜 지금까지 일거리를 못 구했느냐는 걱정섞인 물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집주인은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 그러나 끝까지 아고라에 남아서 고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딱한 사람들을 죄다 자기 포도원에 고용하는 그런 집주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새벽에 만났던 사람들만 고용 계약을 맺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함께 소리내다"라고 번역한 말은 쌍방간 '계약', '합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계약은 처음 만났던 일꾼들과 오전 아홉시에 만났던 노동자들에게만 이뤄집니다. 나중에 만난 일꾼들은 계약도 없이 그저 포도원으로 고용됩니다. 그리고 그 계약내용이란 계약 노동자가 포도원에서 노동을 하면, 의로운 무엇이든 삯으로 지불하겠다는 계약입니다. 이 계약이 오늘 비유의 결론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렇게 모두가 고용되는가 싶더니, 농장 관리인이 등장합니다. 이때 1세기 독자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새벽에 나가서 사람들을 고용하고, 계약을 맺고, 일거리를 지시하는 일은 사실 집주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집주인은 그저 농장 관리인에게 그 일들을 맡겨놓으면 그만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집주인은 여태 자기가 농장 관리인인 것처럼 동분서주하며 아고라에 몇 번씩 나가서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농장관리인을 데려다가 그 노동에 따른 일당을 지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일당을 지급하는 순서가 특이합니다. 먼저 와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 먼저 받지 않고, 나중에 온 순서대로 일당을 받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동일한 금액을 받자, 먼저 온 사람들이 불만이 표출합니다.
마태복음 20:12
"저 끝 사람들은 한 시간 동안 (일) 했다,
당신은 하루의 무게와 햇볕을 견딘 우리와 저들을 동일하게 했다."
희랍어로는 '공귀조(γογγύζω)'라는 단어를 쓰는데, 웅얼웅얼, 중얼중얼, 아기들 옹알이하는 걸 가리키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먼저 온 노동자들이 옹알이를 할리는 없고, 아마도 우리말로 적절한 표현은 궁시렁 궁시렁일 것입니다. 집주인에게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하고, 이게 뭐냐고 말 끝을 흐리며 불평 불만을 표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먼저 온 사람들에게 먼저 일당을 지급하고,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면, 이 사람들은 궁시렁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돈 받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지, 뒤엣 사람이 얼마 받는지 알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그런데 집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꼭 보여줄 심산으로 그들에게 일당을 마지막으로 지급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비유가 예수를 따르는 이에게 어떠한 보상이 있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지급되는 보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집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계약 내용대로 이행했다.' 맞는 말입니다. 노동을 하면 그 댓가로 의로운 무엇이든 주겠다는 것이 궁시렁 거리는 이들과의 계약 내용이었습니다. 집주인이 일거리 없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같은 금액을 주고, 그들이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의롭습니다. 부당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집주인은 자기 재산을 가지고 그렇게 처분했습니다. 어쩌면 처음 온 사람들과 계약을 체결한 것은, 그들이 혹여나 갖게 될 불만에 대해서 미연에 처리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집주인이 의롭다면, 그 집주인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노동자는 불의할 것입니다. 만일 노동자의 의견이 의로운 것이라면, 집주인이 불의한 것이겠지요. 집주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불만 가질 만한 상황으로 보고 있는 당신의 눈이 악한 것인지, 아니면 하루종일 일거리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던 자신의 불의한 것인지를.
3.
그리고 비유가 끝납니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익숙한 구절로 이 비유를 결론 내십니다.
"그렇게 끝 사람들이 첫 사람들일 것이고,
첫 사람들이 끝 사람들일 것이다."
여기서 처음과 끝은 비유 속에서 일당받는 순서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이 먼저 일당받습니다. 처음 온 사람들은 일당도 나중에 받고 집에도 늦게 가겠지요. 여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누구든 처음 올 수도 있고, 나중 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고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자부심으로 가진 이들이, 기뻐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의로움에 역행하는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누가 더 큰지 작은지, 누가 더 큰 보상을 받는지 아닌지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상은 모두에게 동일한 보상, 특히 보상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상이 돌아갔을 때, 그 보상을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보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집주인의 보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집주인을 죽이려 들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7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 속으로 올라가시며 열 둘을 각자 곁에서 붙드셨다, 그리고 길 안에서 그들에게 말하셨다.
그러나 집주인은 자신의 원칙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죽더라도 의를 위해서 먼저 일하기 시작했던 그 계약 노동자들에게 가실 생각입니다. 그러니 오늘 비유의 제목을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집주인의 보상은?' 이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