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예수께서 카이사레이아 필립포스의 지역들 속으로 가시며, 그이의 제자들에게 물으며 말하셨다.
"사람들이 인자가 누구라 말하느냐?"
그런데 그들이 말했다.
"한편으로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야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들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이가 그들에게 말하셨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
그런데 시몬 페트로스가 대답하며 말했다.
"당신은 메시아,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셨다.
"네가 복되다, 시몬 바르요나, 왜냐하면 살몸과 피는 너에게 폭로하지(ἀπεκάλυψέν) 못하고,
오히려 하늘들 안의 나의 아버지가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페트로스다, 그리고 내가 바로 이 페트라에 나의 에클레시아를 집지을 것이다, 그리고 하데스의 문들이 이 에클레시아보다 강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들의 왕국의 열쇠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들에서는 이미 묶인 것이 될 것이고, 만일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는 이미 풀린 것이 될 것이다."
그때 제자들에게 경계하셨다, 누구도 그이가 메시아라고 말하지 말라고.
[2]
그때로부터 예수는 그이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셨다, 그이가 예루살렘 속으로 떠나야만 하고, 장로들과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것들을 겪어야만 하고, 죽임당해야만 하고, 셋째날에 일으켜져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페트로스가 나서서 그이를붙잡고 그이에게 꾸짖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자비로움(ἵλεως)이 있습니다, 주여!
이것이 당신에게 결코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이가 페트로스에게 돌아서며 말씀하셨다.
"내 뒤에서 떠나라, 사탄아.
너는 나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자다,
왜냐하면 너는 하나님의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것들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 그이의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누구든 내 뒤를 (따라) 가는 것을 원한다면,
그는 그 자신을 부인할지라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 십자가를 들지라
그리고 그는 나를 따를지라.
왜냐하면 만일 자신의 프쉬케를 구원하기를 바라는 누구든지, 프쉬케를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만일 자신의 프쉬케를 자신 때문에 멸망시키려는 누구든지, 그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온 코스모스를 얻고도, 자신의 프쉬케가 손상되면,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또는 사람이 자신의 프쉬케의 대체물로 대체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즉 인자는 그의 천사들과 함께 그의 아버지의 뚜렷함 속으로 금세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각각에게 각각의 실천에 따라 갚아줄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여기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인자가 그의 왕국에 가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사람들도 있다."
[3]
그리고 엿새 후에 예수께서 페트로스와 이아코브와 그의 형제 이오안네스를 곁에 붙드시고, 개인적으로 그들을 높은 산 속으로 이끄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그이가 형체가 달라지셨다, 그리고 그이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이의 옷들이 빛처럼 빛나게 되었다. 그리고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이와 함께 말하며 나타났다. 그런데 페트로스가 대답하며 예수께 말했다.
"주여, 우리가 여기에 있는게 온전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하시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지읍시다,
당신에게 하나, 모세에게 하나, 엘리야에게 하나."
여전히 그가 말하고 있는데,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보라, 그 구름으로부터 소리가 말했다.
"이 사람은 나의 사랑받는 아들이다.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한다.
너희들은 그이 (말)을 들어라."
그리고 제자들은 듣고서 그들의 얼굴로 떨어졌으며 매우 두려워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앞으로 가셨고 그들을 붙드시며 말하셨다.
"너희들은 일으켜져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런데 그들이 눈을 드니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산들로부터 아래로 내려왔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시며 말하셨다.
"누구도 본 것을 말하지 말아라,
인자가 시체들로부터 일으켜지기 전까지는."
[4]
그리고 제자들이 그이에게 물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찌 문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만 한다고 말합니까?"
그런데 그이가 대답하며 말하셨다.
"일단 엘리야가 온다, 그리고 그가 각각을돌려놓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와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행했다. 그렇게 인자도 그들에 의해 겪게 될 것이다. "
그때 제자들은 그이가 세례 요한에 관하여 그들에게 말하신다는 것을 이해했다.
마태복음 16:13~17:13
[1]
오목천동은 차가 잘 다니지 않는 동네였습니다. 10년 전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아버지는 조용한 이 동네가 꼭 유배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골 같던 동네도 요새 도로 공사에 건물 올리는데 바쁩니다. 차들도 부쩍 많아져서, 이젠 조용한 동네라고 말 못합니다. 예수 당시에도 이런 도시 재개발이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이스라엘 해안 쪽 동네를 정비해서 ‘가이사랴’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가이사랴'라는 이름은 황제 카이사르에게 아부 떠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이스라엘 북단에서 도시 재개발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붙였습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카이사레이아 필립포스의 지역들"로 다니셨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한 마가의 용법이 좀 더 정확합니다. 마가는 카이사레이아 필립포스에 있는 '시골들(개역한글에는 '마을')'로 다니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는 재개발된 휘황찬란한 황제 숭배의 도시를 활보하시기 보다는, 재개발 외곽에 있는 시골들을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던 것입니다.
사람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가 누구라 말하느냐?"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만, 공관 복음은 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아껴둡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 족보와 출생 이야기에서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11:2에 한 번 나온 것을 제외하면,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어떤 금기어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희랍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 곧 기름 부음 받아 임명된 온 세계의 왕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왕이라 생각하는 카이사르의 귀에나 헤롯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이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잘 못쓰는데, 대신 예수는 전략적으로 애매한 단어를 골라 자신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단어는 일단 그저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7장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짐승의 통치를 끝장내고 온 세상의 왕이 되는 사람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인자'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는 먼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묻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로 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든 엘리야든 예레미야든 그 이미지는 비슷합니다. 악한 권세와 맞서 싸우는 하나님의 대언자를 기다렸던 것이고, 예수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예수는 제자들의 생각을 묻습니다. 수제자답게 베드로가 제자들의 생각을 대표로 나서서 이야기합니다. 그간 말할 수 없었던 그 금기어를 입에 담는 순간입니다. "당신은 메시아,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는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예언자로 알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분이 예언자 정도가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베드로가 이것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의 '폭로'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폭로를 자신만 가지고 있으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은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입니다. 게다가 누군가 폭로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임금님 귀가 당나귀인줄 알아버린 이발사처럼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예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혹은 자신들이 해를 당할까봐 이 사실을 말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으스대기 위해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예수는 지금껏 대나무 밭 같은 곳만 골라서 다니셨습니다. 언제까지 진실을 제자들만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2]
마태복음에서 '메시아'라는 단어가 전면으로 부각된 것은, 예수의 출생 이야기 이후 이 본문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라는 단어가 부각되자마자 마태복음의 방향은 급격하게 전환됩니다. 16:21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때로부터" 예수는 진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이야기해주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해야만 하고"라는 말을 써서 말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메시아인 예수는 유대 당국에 의해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2) 그리고 고난을 당하다가 분연히 일어나 그들을 쳐 부수기는 커녕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3) 그리고 셋째 날에 일으켜질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17, 18장은 한 번에 말씀하신 내용이고, 19장으로 넘어가면 예수 일행은 요단을 건너 유대 지역에 이르고, 바로 다음 장인 20장으로 넘어가면 예루살렘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본인이 예고한대로 죽임당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고 나서서 꾸짖기 시작합니다. 마치 너무 과격한 당원을 타이르듯이 베드로가 예수를 교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방금까지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했던 예수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차갑습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베드로를 뿌리치고 돌아섭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뭐 잘못했느냐는 벙벙한 표정으로 예수의 등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내 뒤에서 떠나라, 사탄아."
이 말은 문법상 정확히 마태복음 4:19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나를 따르라."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에게 공감하게 됩니다. 고백은 멋들어지게 했지만, 그 고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 빠져있는 자신 말입니다. 여기서 '사탄'이라는 표현에 기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기본적으로는 '대적자', '고발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과 따르지 못하는 것 사이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본문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 하나 빠져있는 것같은 제자의 모습을 복음서는 그런데 그러한 제자들이 모두 초대교회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이런 내용들은 '나도 예전에 이랬습니다'라는 지도자의 자기 고백이자, 솔직한 고백을 통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자기부인을 요구받는 그 여정 속에서 이해를 못하기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확신 없기도 하며, 예수를 배신하기도 하는 제자들의 모습들은 우리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제자들이 메시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는 교회사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그들이 끝내 무엇을 지향했는지도 보여줍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1) 자기 부인과 2) 십자가 듦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부인은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문맥은 '예수의 처형에 동참하라'로 읽도록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 당국으로부터의 멸시와 죽음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메시아를 꾸짖기도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라고 했고, 이때 자신은 곧 메시아의 뒤를 따르는 죽음과 순교를 거절하고픈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즉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듯이, 나도 같은 의도로, 같은 마음으로, 같은 처형을 당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누구든지"라는 표현은, 자기부인의 길이 당시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마가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무리들"이 함께 있었다고 전해줍니다. 즉 자기 부인의 요구는, 예수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에 대한 요구임이 분명합니다.
순교의 문맥으로 읽는 방식은, 이어지는 본문을 쉽게 이해하게 합니다. 프쉬케를 구원하려는 사람은 메시아 예수의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고, 멸시와 죽음을 피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참되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순교를 각오한 사람은 참된 삶을 얻습니다. 예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인자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그 인자는 메시아 예수를 따라 순교할 각오를 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실천 속에 성령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 대한 R.T. 프란스라는 신학자의 해석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여기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을 뒤에 변화산 사건을 경험하는 세 명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지 않는다"가 아니라 "죽음을 맛보다"라는 표현을 쓴 것을 근거로, 죽음을 맛보는 것은 십자가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 명의 제자들은 죽음을 맛보는 자기 부인의 삶 없이, 인자가 하나님 나라의 정당성을 갖는 진정한 인자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하게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물론 변화산 사건은 인자의 왕위 대관식인 승천에 비하기에는 뭐한 금세 사라지고 마는 환상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 사건을 승천의 예기적 사건으로 읽는다면, R.T. 프란스의 해석도 고려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어지는 마태복음 17:1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십자가 지는 삶 없이도, 인자의 왕되심을 확인했던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엿새 후에"라는 분명한 시점 표현은 마가복음에서 낯선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3]
베드로가 고난과 멸시를 받지 말라고 꾸짖으며 예수를 곁에서 붙들었을 때, 예수는 베드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곁에서 붙들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예수의 몸은 부활의 예고를 보여주듯 변형됩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다가, 일곱 째날에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명백히 시내산 사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나타난 사람은 일단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모세도 곁에 있습니다. 엘리야가 먼저 언급된 이유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먼저 오면, 신명기 18:15에 기록된 "모세와 같은 그 예언자"가 나타날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죽음을 겪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승천한 것으로 유명하고, 모세의 경우 <모세 승천기>라는 유대 전승 속에서 모세의 몸을 미카엘이 하늘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죽음을 겪지 않았던 이들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죽음을 넘어선 세계가 있음을, 또한 모세와 엘리야로 요약되는 구약성경이 이뤄질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자는, 마가복음에 의하면 본인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했다는 말을 내뱉습니다. 충격적인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저럴 수가! 그런데 그런 헛소리 중에 진심이 터져 나오는 법입니다.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듯이 말입니다. 베드로의 진심은, "우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게 좋사오니" 우리말 번역에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희랍어 원문에서 저렇게 "우리"를 쓰는 것은 강조 용법입니다. "여기 있는게 좋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머지 여덞명보다 대접받는 우리가 그의 속마음입니다. 즉 대장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바라던 '고난받지 않는 메시아'와 연결되는 우리입니다.
마태는 그가 잠꼬대같은 소리를 횡설수설 늘어놓고 있을 때,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도 시내산 장면과 오버랩 됩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와 동일하게. 그러나 이 변화산 배경에서 더더욱 놓치기 어려운 것은, "너희들은 그이의 말을 들어라"라는 명령입니다.
신명기 18:15, 새번역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토라와 예언서가 바로 예수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도 흔적도 없이 지나가고, 하늘은 다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통 사람 예수이신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일으켜져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는 산에서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제까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를 숨겨야 하는지 그 시점을 말씀해주십니다. "인자가 시체들로부터 일으켜지기 전까지는" 즉,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폭로해주신 것을 지금은 감춰놓지만, 제자들은 비밀을 알고 외인들은 그것을 모르지만, 그 진실의 폭로는 영원히 감추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누군가 폭로해야 할 시점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은 알려집니다.
[4]
그런데 제자들이 문법학자들의 의견에 대해 예수께 묻습니다. 이 질문도 앞에서의 인자, 변화산 사건과 연결된 것입니다.
말라기 4:5, 새번역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은 인자 이야기로 하면, 짐승들이 심판받는 날이 것이고, 우리가 익히 아는 말로 하자면 "영생"이며,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로마 제국이 심판받고 신실한 유대인들이 단체로 부활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가 바로 그러한 인자라고 생각하고, 또 짐승이 심판받을 날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의 날이 오기 전에 왜 엘리야가 와야 하는지 그 이유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문법학자들은 옳게 말했습니다.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고 곧 올 것이라 말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쓸어버리면 되는데, 왜 엘리야가 와야 하는지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11, 개역한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그러나 이 말만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복'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한다면, 엘리야 뒤에 다른 분이 오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모든 일의 회복'이야 말로 아름다운 결말일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 '회복'은 낫는다는 회복이 아닙니다. '회복'이라 번역된 아파카띠스테미는 '돌려놓다'의 의미입니다.
말라기 4:6, 새번역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엘리야의 역할은 회복이고, 그 회복은 말라기 4:6에서 말하는 "돌이킴"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엘리야가 이미 와있다고 말씀합니다. 즉 모든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서 왕이 오실 준비를 하는 사람이 이미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고, 그 세례요한 뒤에 오신 예수가 바로 야훼이십니다. 그가 오신 날은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그가 달란트를 잘 장사했는지 확인하러온 주인처럼, 기름을 준비한 여자 하객들에게 오는 신랑처럼, 이스라엘이 찾아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스라엘에 오심은 곧 저주입니다. 그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스스로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스라엘에 오심은 복입니다. 그이를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나온대로, 하나님은 약속의 씨인 메시아를 통해 복과 저주를 온 땅에 흘려보내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대했습니다. 그를 먼저 오는 엘리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고난을 세례요한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세례요한이 겪은 고난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자기 멋대로 판단했기 때문이고, 그와 같은 고난을 예수도 받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의 고난과 예수의 고난은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고 나서야 제자들은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5]
그리고 그들은 군중들을 향해 갔다, 사람이 그이를 향해 와서 꿇으며 말했다.
"주여, 나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왜냐하면 그가 미쳐서 열악하게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번 불 속으로 떨어지고 여러번 물 속으로도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아들)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며 말하셨다.
"아! 신실하지 못하고 뒤틀린 세대여!
언제까지 너희들과 함께 내가 있으랴?
언제까지 너희들을 내가 참으랴?
너희들은 나에게 그를 여기 데려오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꾸짖으셨다, 그리고 아들로부터 그 다이몬이 나왔다, 그리고 아이가 바로 그 때로부터 치료되었다. 그때 제자들이 그이에게 다가와 개인적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