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Justhis가 말하길, "살기 위해 쓰지 않고, 쓰기 위해 살겠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생존의 가치를 뛰어넘는 무언가만이, 추구하는 대상이 된다. 생존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인간은 생존 그 자체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생존을 넘어서는 가치가 라캉의 말대로 상징계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욕망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이란 기실 '대상a'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그저 받아들이라는 주장도 있는데(지젝), 너무 슬픈 결론이다. 아무리 언어의 차이로 발생하는 상징계와 존재의 구조 자체가 언어인 인간은 뗄레야 뗄 수 없다 말한다 하여도, 사람은 무언가 갈망라고 있다. 아감벤의 말대로, 말할 수 없는 유아의 '탄생'과 말 없이 시들어가는 노인의 '죽음'을 보며, 말 없는 세계가 말 있는 세계(상징계)보다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어제 요한복음 4:43~54 설교를 들으며,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는 그이의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흔히 '믿지 않는다'를 '신뢰하지 않는다'로 이해하지만, 신약성경에서의 '믿음'은 아브라함 이야기와 결부되어 이해되어야만 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48절은 "표적과 기사로는 도무지 (아브라함처럼) 신실해지지 않으리라"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믿다'는 목적어 없이 사용해도, 그 용어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목적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라틴어 credo는 계약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므로, 라틴식으로 믿음을 읽으면, "표적과 기사로는 하나님과 도저히 계약 관계가 성립하지 않더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도중,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를 보았다. 여기에는 "예수의 하신 말씀"이 신실함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다시금 상징계의 기표에 종속되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은 이미 의문에 종속되어 있다. 그럼 결국 예수는 다른 기표를 제시할 뿐, 결국 기표로부터의 해방은 불가능한 것인가? 신실함은 이 말에서 저 말로 자리를 옮길 뿐인가?
이스라엘에게 믿음(신실함)은 미쉬나의 규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토라의 규정을 준수하면 복을 주겠다는 것이 신명기 28장이 보여주는 토라의 결론인데, 이스라엘은 이 복이 얻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규정준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법에 대한 이해는 반명제적 정체성으로 변질된다. 법으로의 통합은 배제를 경유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잘못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늪은, 안으로는 배제되는 사람을 만들고, 밖으로는 제국 전체를 배제하며 그들과 전쟁을 준비하게 했다. 즉 법 준수로 이해되었던 토라는 이스라엘을 저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바울은 토라를 법 규정으로 오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성을 아담과 결부시킨다.
*
어제 이 아담에 관해 생각하며 떠오른 것은 도미노였다. 각각의 도미노 블럭은 허공을 향해 넘어진다. 결여 없이는 넘어질 수도 없다. 그리고 그 결여로의 넘어짐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게 효력을 미친다. 이러한 넘어짐들은 단 하나의 결과를 향해 지속되는데, 그 결과는 곧 모든 도미노의 넘어짐이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욕망하며 넘어졌으나, 결국 아무 것도 없는 데 넘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넘어지고 있던 도미노들 사이에 넘어지지 않는 블럭 하나가 서 있다(위로부터 왔다). 그 블럭 하나가 단단히 서 있기 때문에, 이 단 하나의 블럭은 넘어지는 전체 블럭의 예외가 되고, 이 예외에 의해 전체는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 넘어지지 않은 블럭과 함께 하는 블럭들이 "일어선다." 그리고 이 넘어지지 않는 블럭과 함께 하는 일어선 블럭들은 세계가 결여의 구멍으로 자신들의 모든 의미를 소진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즉 이들은 넘어지는 전체를 위해 넘어지지 않는 일부인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는 자신을 '예언자'라 지칭한다. 예언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매개자이지
신실함의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자신을 예언자라고 칭하는 것은, 자신의 말이 갖고 있는 중요성 떄문일까? 예언자는 신실함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의 말은 신실함의 대상이다. 상징계 안으로 들어온 예언자의 말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럼 예언자로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은 무엇이었나? "네 아들이 살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신실함의 대상이라면, 그의 말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선언된 토라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예수의 말에 신실한 것이 토라에 신실한 것이고, 토라에 신실한 것이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로 들어오는 길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규정준수의 미쉬나가 주지 못했던 복을 준다. 곧 생명이다. 그런데 이 생명은 '사건'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들은 살아났다. "살 것이다"라는 기표와 살아남이라는 사건 자체가 만나는 순간이고, 이 말과 사건의 일치를 메시아 예수께서 만들어내신다. 공백없이 채워진 형식과 의미.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과, 왕의 신하에게 아들이 살 것이라는 말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상징계를 뒤집는 사건과 그 사건이 낳는 새로운 상징으로서 신실한 인간. 구유 위에서 말 없이 태어난 아기는, 말 없이 심문을 당하고, 정말 그 말 없음에 걸맞는 소멸로 걸어갔다. 소멸은 부활로, 침묵은 환희로 바뀌는 그 사흘 반의 간격 속에서 만물은 다시 태어난다.
'치부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757日 (0) | 2018.02.18 |
---|---|
12750日 (0) | 2018.02.11 |
12420일 (만 34년) (2) | 2017.03.18 |
12410일 (만 33년11개월18일) (0) | 2017.03.08 |
내가 만난 호모 사케르 - 12357 (0) | 2017.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