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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트레이아의 두 가지 용례
"예(배)"로 번역되는 희랍어 단어 라트레이아(λατρεια)는 '제사장으로 고용되어 수행하는 일상 업무'를 의미한다. 그러나 꼭 제사장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례가 스데반의 최후 변론에 등장한다.
사도행전 7:42,43, 개역한글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때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의 '섬기는 일'이 예배로 번역되는 '라트레이아'이다. 즉 신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섰고, 신이 '돌아섰다(παραδιδωμι)'는 말이 가진 의미는, 그들이 더 이상 참 신께 고용되어 그에 걸맞는 일상을 살게 되지 못하고, 하늘의 군대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을 예배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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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늘의 군대들에게 고용된 예배'를 살펴보기 전에 저 사도행전 7장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최후 변론인데, 스데반은 죽기 직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유에 대해서 언급한다. 모세를 하나님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거절하던 이스라엘은(이들은 곧 스데반을 돌려 쳐 죽일 사람들의 조상들이다) 금송아지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금송아지 제작의 의도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금송아지 자체를 하나님으로 공언한 것이다. 그래서 열왕기상 12:28에도 여러보암은 그 금송아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칭한다. 즉 금송아지는 신의 이름을 이용해서, 권력자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만드는 모종의 것, 곧 이데올로기를 표상한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들은 이미 금송아지를 앞세워 "이집트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고, 그 결정을 납득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사도행전 7:39,40, 개역한글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προπορεύσονται, 앞서 나갈)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정리하면, 권력자는 이미 결정했고, 그 결정을 납득시키기 위한 근거를 제작한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는, 이 근거를 따라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게 되는 죄악이다. 최초 결정자의 의도는 여전히 수행되고 있으나 그것은 금송아지 뒤에 가려져 은폐되어 있다. 그 은폐를 확인하기 전에는, 다수의 사람들은 선의를 가진 채 죄를 짓게 된다.
사도행전 7: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이들은 금송아지 만드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느낄 수도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고, 이제 그분의 뜻에 따라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뻐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특징이다. 권력자의 결정을 승인해주면서도, 그 결정의 과오를 확인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라트레이아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께 고용되어 제사장 업무를 수행하는 라트레이아와 이데올로기로 감춰져 있어 선을 행하는듯 하지만 정작 악을 수행하고 있는 라트레이아가 있다. 즉 예배는 이데올로기로 그 핵심적 중핵이 은폐되어 있거나, 그 단단한 중핵이 폭로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사도행전 7:42,43은 두 가지 라트레이아를 대비시키고 있는데, 1 하나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행했던 라트레이아이고, 다른 하나는 '몰록'과 '롬판'에 대한 숭배이다. 몰록은 '유아인신제사'를 받는 고대 근동의 신이고, 롬판은 이집트의 '레파(Repa)'에서 왔다고 추정되는데 토성을 숨기는 이집트의 신이다. 무엇을 숭배하는지는 곧 무엇을 '모방'하는지의 문제이며 인간성의 문제이다. 피조물을 섬기는 피조물의 타락은 가속화되며, 이 문제에 대한 신의 대처는 삶의 터전을 박탈하는 것, 곧 한갓 인간으로서 남게 하는 것, 포로기이다.
2. 한갓 인간으로서의 폭로
신약은 그 포로기의 종식을 가져온 예수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 포로기는, 한갓 인간으로서 남고자 하는 한 사람에 의해서 종식되는데, 이 한갓 인간만이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이 한 사람과, 그를 따라 그러한 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신약성경은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가당착적인 측면에 대한 폭로, 이데올로기로 가려진 라트레이아에 대한 폭로로 가득하다.(일반적으로 "계시"라고 번역하고 있는 아포칼립스는 가려져있다가 그 가림막이 사라진 상태로서, "폭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신약이 가진 폭로의 성격은 스데반에게도 나타나는데,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신앙행위의 실상은 이데올로기의 장치임을 폭로하고 있고, 이 폭로를 위해서 인용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장치인 금송아지인 것이다.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이유, 혹은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이데올로기에 속해있는데, 그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약속과 법이 작동한다. 먼저 약속은 권력자의 결정에 따를 때 찾아오는 번영, 승리를 말한다. 즉 권력자의 결정이 타당했음을 보여주는 합당한 결과에 대한 보증이 '약속'이다. 약속은 중요한 시간을 미래로 미뤄놓고, 현실로 하여금 그 미래에 저당잡히도록 속박한다. 그리고 그 속박의 방식이 '법'이다. 법은 결정자의 결정을 따르는 방식으로서, 약속의 성취라는 미래를 위해서 준수해야 하는 모종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권력자의 결정이 이데올로기의 허울에 지나지 않았음을 어떻게 폭로할 수 있을까?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폭로의 기제가 바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 예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자의 방식인 '법'을 준수한다. 토라는 성전 지도자들의 권력 유지 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법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을 충실히 지킨다. 토라의 중심 주제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사실은 율법 교사들도 알고 있었고, 예수가 법을 충실히 지키는 방식은 하나님과 이웃을 배신하지 않는 길, 끝까지 사랑하는 길이었다. 이때 예수는 이중의 배신을 당하는데, 먼저는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침묵이고, 나중 일은 모든 제자들의 배신이다. 그러나 예수는 법에 충실하다. 끝까지 사랑한다.
법의 과정을 충실히 완수한 예수는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약속의 수혜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은 법에 충실하려는 예수의 몸부림이었고, 더불어 지키면 복을 주고 어기면 저주를 주겠다는(신명기 27~30장) 토라의 약속이 허위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예수는 법을 온전히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저주의 약속을 뒤집어썼다. 이는 스데반도 유사하지 않은가? 스데반 역시 토라에 충실하면서도(끝까지 사랑하면서도) 그 토라에 의해 배반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흔히 우리가 고난이라고 말하는 이 부당한 죽음만이 이데올로기가 메꾸지 못한 실재의 측면을 드러낸다. 즉 폭로의 인간은 모든 것을 얻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잃고 한갓 인간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는 타인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박탈되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그는 스스로 그런 인간으로서 남은 것이다. 만일 본인이 그렇게 남고자 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바랐다면, 그는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드러내기는 커녕, 상상적 주체에 의한 복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죽음 위에 정초시킨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부당한 죽음에 자신의 사랑의 의지를 부합시키는 것만이, 법/약속 이데올로기를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 법에 충실한 이의 부당한 처형에 의해서만이 법/약속 이데올로기가 중지되는 것이다. 법을 지켜봐야 약속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 의해서. 이로써 더 이상 법은 그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다.
골로새서 2:13,14, 개인번역
그 우리를 따라 손으로 써놓은 것(χειρόγραφον)을
(우리에게 맞서고 있던 그것을) 도그마들과 함께
기름발라 깨끗이 지워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가운데서 들어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아서 말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벗겨진 그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시고,
오히려 그이 안에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3. 정죄가 사라진 법/수단이 사라진 약속
그런데 이때 법에 대한 세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바울은 법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로마서 7:14) 우리가 위에 인용한 골로새서 구절에서 바울은 "토라"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서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를 따라 있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맞선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중지된 법은 신적 기원을 가진 법이 아니라, 인간적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방점을 찍는 결정적 증거는 "손으로 써놓은 것(χειρόγραφον)"이다. 유대적 사고에서 '손(handmade)'은 '유한한 인간에 의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토라에 대한 인간의 해석, 그리고 그 해석에 의한 합법과 위법을 결정짓는 세부 규정(도그마)들은 모두 폐기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판단이 모두 말소된 것이다. 토라는 문제가 없었다. 토라가 인간 손에 맡겨진 것이 문제였고, 철회 및 중지되는 것은 그 '인간에 의한 토라적 판단'인 것이다.
따라서 토라는 '인간이 사용해서 타인을 판단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법으로서의 토라가 죄를 결정하는 기능, 즉 '정죄'의 기능이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더불어 폭로된 것은 지젝의 말대로 '신의 무능함'이 아니다. 만일 신이 무능하여 그 약속이 허위로 폭로되었다면, 바울은 토라 준수와 함께 아브라함도 폐기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 이후에도 토라를 존중하며(부활 이후 '하나님 나라'라는 토라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에 대해서 강론했다. 사도행전 1:3), 바울은 아브라함 언약의 유효성을 여전히 강조한다. 그렇다면 법/약속 이데올로기가 중단되었을 때, 다시 시작되는 것은 무엇인가? 또 다른 법/약속의 이데올로기인가? 바울은 단어를 세심하게 고르며, 법과 약속을 분할하는 지점을 조심스럽게 파헤친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폭로의 내용은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정체"이다. 즉 자신의 법적 판단을 약속의 수단으로서 제시한 이들의 무능함인 것이다. 그들의 법에 대한 판단은 결국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법에 충실한 자 예수를 통하여.
이제 우리는 '법에 충실하나 법에 의해 정죄되는 폭로의 인간' 안에서 '법'과 '약속'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신약성경의 폭로 안에서 법은 정죄가 사라진 법으로서,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 '구속력이 사라졌기에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놀이'가 되었다. 그리고 '약속'은 여전하다(아브라함 이후). 그러나 그 약속은 법이라는 수단을 경유하지 않고서 성취된다. 이 '법을 회피하는 수단'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라트레이아의 문제로 돌아온다. 인간의 법 해석과 정죄를 통한 소거의 방식으로 약속을 구현하려는 방식은, 결국 부당한 인간을 알몸으로 벗겨놓을 것이다. 그리고 유아인신제사의 몰렉이나, 권력자들의 결정을 은폐하려는 금송아지나, 별자리에 대한 해석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레판에 대한 숭배는 권력자들의 법 해석에 의해 성취되는 약속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곧 우상숭배적 예배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께 고용되어 수행하는 업무로서 라트레이아는 인간 통치자의 법 해석이 가진 공백, 곧 십자가가 드러낸 통치자들(곧 법해석자들)의 무능력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법은 '이야기'로서의 본연의 기능을 되찾으며, 약속은 법을 넘어선 모종의 방식, 수단이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수단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흔히 '사랑'이라 말하는, 모든 지식을 무효화시키는 그 힘에 의해서. 그리고 고 바울이 "성령의 능력"이라 말하는 이 힘에 의해서만이 '법/약속'의 짝은 언어로 정초된 '이데올로기'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없는 무언가로서 남게 될 것이다.
- 사도행전 7:42의 일반적인 번역은 "너희들이 나에게 희생제물을 바친 적이 있느냐?(곧 바친 적이 없다)"이지만, 이는 문법적으로도 오류이며, 사실적으로도 오류이다(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희생물을 신께 바쳤다). 다음과 같이 번역을 했다. 사도행전 7:42, 개인번역 '40해들 동안 너희들이 그 광야에서 희생물들과 제물들을 나에게 앞으로 가져왔던 적이 없었느냐(μη...προσηνέγκατέ), 이스라엘 집아?' 이렇게 번역하면, 42절과 43절의 관계를 라트레이아의 대상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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