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근래 호모 사케르 얘기를 하고 다녔다. 국가 안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 자연상태에서와 주권국가 안에서 두 번이나 배제된 자. 무슨 이유에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수치심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겨버릴 수 밖에 없던 자. 그런데 내가 책에서 봤던 호모 사케르는 지금 내 옆에 있다. 악취가 진동하는,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저 노숙인이 호모 사케르다.

  옆 자리 앉은 이가 더럽다고 자리를 피하니, 호모 사케르는 그 사람에게 욕을 했다. 그것은 나를 더러운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항변이었다. 나를 사람으로 대해달라! 나는 본디 사람이니까! 뭘 흘렸는지 그의 바지는 얼룩덜룩했다. 벗겨진 머리는 흉터들로 가득한데, 이는 분명 얻어맞아 생긴 흔적들이었다. 누가 이 자를 이토록 비인간적인 삶으로 몰아세웠는가?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면, 저 자 스스로 저렇게 되기를 바랐겠는가? 무언가 저 자도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작용했을텐데,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저 사람을 저리 망친, 개인으로서는 불가항력으로 여겨졌을 그 힘이 아닐까?

  저 자 역시 국가에 주권을 양도한 한 사람의 "주권자"다. 불의한 대통령에게 주권자의 요구를 외칠 수 있는 자격이, 저 자에게도 있는 것이다. 아니다. 주권자라면 저렇게 비참할 리 없다. 자신이 주권을 가진 나라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 수가 있겠냐는 말이다. 주권은 허위다. 적당한 자본을 가지고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주권을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든 촛불의 그 자격은 법조문이 말하는 주권에서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코 풀고 버리면 그만이라고 저 호모 사케르가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주권국가 안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자들은 법조문에 회의를 느껴야 한다. 행복 추구할 권한을 약속했던 법이, 그리고 그 법체계로 세워진 국가가 우리를 철저하게 배반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눈을 씻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더 비참하게 그 배반의 시절을 살았던 이들을 발견해야한다. 그들은 우리가 냄새난다고 피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곧 우리다. 법꾸라지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법은 더 이상 타락한 인간성을 포획할 수 있는 그물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을 보장할만한 안식처도 아님을 보여주는 말이 아닌가. 불안의 가능성을 배제를 통해 포함하는 법조문들은, 이 사회 안에서 불안과 배제를 지키는 어둠의 사자가 되었다. "내게 생명을 주어야 할 그 법이, 오히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로마서 7:9)

  이 사람을 거룩하다 말한다면, 그 거룩은 주권국가의 위엄도, 종교의 고매함도 아닐 것이다. 나는 저 자를 거룩하다 부를 수 있는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헸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거룩, 신이 이름붙였기에 그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거룩, 오줌 지린내를 통해 느껴지는 거룩. 철저하게 버림받아 이 사회에서 아무 것도 누리지 않는 이의 거룩.

  그것이 백부장이 십자가 아래서 깨달았던 거룩이었으리라 조용히 짐작만 할 뿐이다. 아니,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하나가 모자르다. 그이의 거룩은 기꺼이 스스로 호모 사케르가 되고자 했던 거룩. 불의에 기꺼이 자신을 넘겨주는 거룩. 사람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모는 그 불가항력적인 불의의 힘은 그렇게만 폭로된다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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