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安息)은 '편안한 호흡'이란 뜻이다. 이 안식이 최초 등장하는 것은, 창조의 노동을 마치신 일곱째날 하나님에게서다.
그러나 이후 인간의 호흡은 늘 거칠기만하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가인의 최초 살인으로 이어졌고, 한 사람의 범죄가 온 인류의 범죄로 전염되는 것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인류는 지금도 가인에 대한 모방경쟁 중이다. 예수께서 너희의 아비는 처음부터 살인한 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그 아비를 따라 인류는 대개 모르면서, 일부는 잘 알면서 사람을 죽인다. 인류가 타락한 와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렀고, 그 사람은 곧 민족이 되었다. 이스라엘.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토라가 주어졌고, 토라 규정에는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은 더 나은 미래를 내다보는 이정표가 아니었다. 안식일을 포함한 토라는 이스라엘의 생활 규범이자,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세계 창조의 설계도였다. 그러나 창조를 가로막는 세력이 있었으니(다니엘은 이들을 짐승이라 불렀다), 바로 제국이다.
이 제국에 의한 포로기는 그들의 신세계 건설을 가로 막는 짐승의 시대. 그러나 이 짐승의 시대 속에서도 희망은 선언되었다. 타락이 가속화될 때마다 예언자들을 통해 선언된 7의 행진이 있다. 7일의 안식일은, 49일
이후에 찾아오는 오순절이라는 절기로 확장되고, 7년의 안식년은 49년이 지난 이듬해에 찾아오는 희년으로 이어진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벨론 포로 기간은 70년, 다니엘은 그 70년에 7을 곱한 490년을 예언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안식일이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신세계 건설을 위임받은 민족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사용된 것은(할례와 더불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지독하게도 다니엘이 말한 포로기의 기간을 버텨나가고 있었다. (물론 이 '버티다(φυλαχειν)'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7의 증폭'의 끝자락에서 이스라엘은 안식을 다시 가져올, 토라를 완성시켜줄, 하나님의 지혜자,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열망했다. 그리고 타락의 역사를 관통하는 7의 행진의
끝자락에서, 세상의 버려지는 찌꺼기처럼 나타난 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이 토라를 이룬뤘다. 하나님의 신세계를 이 땅에 건설한했다. 안식을 가져온왔다. 7의 정점에서 편안히 숨 쉴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일이 벌어졌다. 사람의 숨통을 틀어막는 모든 것들의 그이의 십자가에서 그 허위를 드러냈고, 그이의 숨통을
틀어막았던 죽음은 부활의 새 몸으로 짓밟혔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한 마디는, 자신이 다니엘서 7장의 인자임을 천명함과 동시에, 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7의 행진이 자신에게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진술이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이방민족과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경계의 표지로 사용했지만, 사실 이스라엘과 로마는 마치 거울을 바라보듯 서로 닮아있다(르네 지라르의 말대로 유대와 로마는 "짝패"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만장일치의 동조(혹은 빌라도와 같은 묵과). 안식일은 로마와는 다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지켜졌지만, 사실 그 정체성은 로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십자가에서 폭로되었을 때, 그간 랍비들에 의해 강조되었던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하는 정당성은 사라진다. 그것은 왜곡된 정체성을 감추기 위한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송장냄새 나는 무덤에 칠한 회반죽처럼.
그러나 안식일 규정은 신이 부여한 규정, 바울도 토라를 하나님 창조에 걸맞는 것(선한 것)이라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해와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돌아가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안식일이 선한 것이면서도, 지켜서는 안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라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안식일은 마치 달력에 표시하듯 연대기적 시간 위애서 찍을 수 있는 좌표가 아니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은 있으나 안식일은 없다. 그래서 십계명을 인용하고 있는 예수의 산상수훈에는 안식일 규정이 빠져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1983년 3월 18일을 시작으로 매년 같은 주기를 따라 생일이 돌아온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오늘이다. 생(生)을 '남'(φυσις)으로 고쳐 읽으면, 나는 나기 시작한 이후 줄곧 나고 있고, 이 남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어느 한 순간도 멈춰있던 적이 없다. 내 수염과 머리털처럼 나는 줄곧 나고 있다(그래서 나이고 있는 중이다. I am being who I am). 그런데 인간은 365일의 주기를 잡아, 그 '남'을 기념한다. 나의 남과 더불어 시간도 시작된 이래 끊어진 바 없이 이어지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지속'이라 불렀다. 이 끊을 수 없는 지속 속에서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끊기로 했다면, 즉 생일이 아닌 어제와 생일인 오늘의 경계를 끊어서 어제는 특별하지 않지만 오늘을 특별한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면, 그 분절의 의도,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왜 오늘을 기념하려 하는가?
신이 지정한 안식일의 정당성이 예수 안에서 소멸되어 버렸다면(곧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면),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인 그 안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안식일에 기념하려고 했던 것을, 우리의 모든 시간의 지평 속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신은 이 모든 사건과 의미의 격자망 속에서, 인간은 단 한 순간도 편안한 호흡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아닐까, 마치 생일이 그 사람을 축복해주어야 마땅한 날이라면, 사실 우리는 모든 날이 생일인 것처럼 말이다. '생일(生日)'이란 단어에서 '일(日)'자를 제거했을 때야 비로소 모든 순간 살아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처럼, 예수는 '안식일'에서 '일(日)'자를 자신의 삶과 함께 없애버리려 이 땅에 왔던 것이다. 그때야 이스라엘의 생각을 가두어놨던 '일(日)'의 감옥이 무너지고, '안식(安息)'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온 우주를 덮는다. 息=πνευμα.
히브리서 4:3
즉 신실한 우리는 그 안식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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