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지금'은 언제나 가능성/불가능성 사이에 놓인다. 그래서 나는 지금 기독교인일 수 있수도 있고, 기독교인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오늘 기독교인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지난 주일부터 화요일인 오늘까지 나는 다시 무기력함과 회의에 잠겼다. 모든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과 싸우는 자와 싸우지 않는 자가 있을테지만, <침묵>의 기치치로 같은 사람도 있다. 싸우려고 하나 이내 투항해버리는 나약함. 이 나약함이 만들어낸 현실은 나를 기독교인이라 부를 수 없게 한다.
현실을 개혁할 의지도, 자기 삶을 착실히 꾸려가는 부지런함도 없는 이가 나약함 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독서 뿐이다. 눈여겨 보고 있던 단어들이 책과 책을 넘어, 저자와 저자를 넘어 등장한다. 마치 관련없는 영화 두 편에서 내가 아는 배우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단어들을 쫓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단어들을 연결하고 있으면, 다시 예수가 나오고, 기독교가 나온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다시 들여다본다. 내가 사유했던 것도 기독교고, 내가 사유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인데, 전자와 후자는 같지 않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하신하는 로봇처럼, 이름은 기독교이나 나는 계속 움직이며 진화하는 대상을 내 속에서 보고 있다. 주기도문을 다시 들여다보니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그 변화의 추이가 확연한데, 같은 변화의 추이를 내 삶에서 볼 수 있을까?
우리 아빠 하늘들에 계신 분,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하늘들에 계신 분". 하늘은 무엇이고, 왜 "하늘들"일까? 히브리어의 장엄복수를 사용한 것일수도 있고, 유대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한 것일수도 있다. 바울이 말한 삼층천도 이와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하늘들"은 예수의 아빠인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설명하는 말이란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간 하늘을 "빈 것(空)", 혹은 "하나님의 차원"이라 설명했다. '땅'이라는 짝 단어에 대비되는 단어라면, 하늘은 땅에 사는 사람에게는 '이질감', '비현실'을 의미할 뿐이다. 오늘날 하늘에 대체 어떤 로망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이름 거룩할지어다,
당신의 나라 올지어다,
당신의 뜻 될지어다, 하늘에서처럼 땅에도.
세 가지 동사가 세컨드 에어리스트(Second Aorist) 형식으로 이어진다. 에어리스트는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한, 어떤 이미지를 전달할 때 사용한다. 즉 '이름 거룩', '나라 옴', '하늘과 땅에서 뜻 됨'은 예수가 자신의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해 제시한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을 간단히 부정해보면, 우리는 쉽게 우리의 현실을 만날 수 있다.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당신의 이름"이 모든 민족들로부터 거룩하게 여겨지지 않는 현실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이스라엘에게도 익숙한 것이었고, 예언서들의 주제이기도 하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은 커녕 더렵혀졌다. 이는 곧 포로기의 은유다. 이는 에스겔 37장의 반영인데, 만일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진다면, 그때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건, 곧 이스라엘이 포로기 종결을 가리킨다. 이집트로부터 유대인의 조상들이 탈출했을 때, 인근 나라들이 두려워 떨었다는 구절이 있다. 즉 '당신의 이름 거룩'은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관계 위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하나님이 인정받게 된다는 이미지이다.
'나라 옴'은 첫번째 이미지 안에서 더 부각되어야 할 주제를 덧칠한다. 곧 이스라엘이다. 알고보니 무시당하던 포로들이 하나님의 나라였고, 이 나라가 마침내 드러났을 때, 이방민족들은 하나님과 그가 선택한 나라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뭇 민족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방식, 곧 토라를 배울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매개로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이뤄지게 된다. 참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라는 단어 앞에 '종말론'을 붙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종말론은 끝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끝이란 지구 멸망의 끝이 아니라, 비현실의 끝이기 때문이다. 비현실을 끝내는 새로운 시간이 돌입하는데, 이 돌입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돌입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간 속에 사는 이는 스스로 비현실을 끝낸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세 가지 동사는 모두 3인칭 명령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이 3인칭 명령은 마술적 효과를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는데, 마치 염력과도 같은 것이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제 3의 무언가를, 내가 원거리에서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마법사의 주문과도 같다. 당신 이름의 거룩과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뜻을 현실에 소환하는 것이다. 즉 주기도문은 비현실을 끝내는 주문, 종말론적 이미지를 현실로 소환하는 마법사들의 기도라 할 수 있다. 기독교가 마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대시했던 것은 비현실을 현실화한다는 공통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파라오의 술객과 모세가 대결하듯 말이다.
예수의 아빠에 대한 종말론적 이미지를 소환한 다음, 세 가지 명령문이 다시 이어진다. 나는 앞의 기도들에서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읽어냄으로, 오히려 현실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곧 비현실적 이미지들의 소환은 오히려 짓밟힌 신의 이름, 오지 않은 나라, 이뤄지지 않은 뜻이라는 포로기의 현상황을 전제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세 가지 기도문들도 마찬가지이다. 비현실적 소망 뒤에 놓인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들춰내야 한다.
주세요, 우리의 필요한 밥을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빚진 것들을 우리에게서 떼어주세요,
우리 역시 우리에게 빚진 이들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우리를 시험 속으로 나르지 마시고,
오히려 풀어주세요, 우리를 그 악/고됨에서부터.
그렇다. 생존문제, 부채/용서의 문제, 악의 문제.
밥-부채-악으로 연결되는 이 기도문은, 인간을 묶고 있는 거대한 순환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무언가를 먹고 사는 것은 생존의 문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밥은 몸을 움직이게 하고, 몸 속에서 순환하여 정액이 된다. 그 정액은 다시 밥을 필요로 하는 생명이 된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는 노동해야했고, 노동을 통해서 먹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 삶을 지금껏 이어왔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모여 더 큰 순환을 이룬다. 그런데 주기도문에서는 이 생존의 문제가 부채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 사이에는 부동산과 금융업이 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에 값을 매기지 않고는, 누군가를 빚쟁이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돈으로 환산하고, 그 돈을 쌓아두기 시작했으며, 그 돈을 빌려주고 갚는 과정 속에서 갚지 못한 원금(혹은 갚지 못한 이자)가 생긴다.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생기는데, 이는 기실 땅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했다. 사람이 사람을 저당잡게 되는 순간이고, 이 악순환은 지금껏 살고자 태어난 인간사이에서 끊어진 바가 없다.
그런데 예수는 다소 불경스러워 보이는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신에게 명령하라고, 이것이 기도라고 가르친 것이다. 앞의 세 가지 기도문이 종말론적 이미지를 소환했다면, 이어지는 세 가지 기도문은 신의 실천을 요구한다. 밥을 달라! 빚을 탕감해 달라! 악으로부터 구원해달라! 이 악순환을 끊어달라! 그리고 신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요구는 정당하다. 신의 아들이 이 기도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리고 신적인 비현실은 이렇게 3인칭 명령의 이미지와, 신에 대한 2인칭 명령과, 이 기도문에 '나'를 대입하는 1인칭의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현실로 돌입한다. 곧 비현실적 인간의 탄생이다. 오늘 필요한 밥으로만 살며, 자신에게 상환의무가 있는 사람을 풀어준다. 곧 악순환의 끈을 끊음이다. 이는 비현실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실천이며, 이것이 곧 신의 실천이 된다. 위의 기도문 한 가운데 인간의 행위가 있다. 밥도 거저 얻었고, 악으로부터도 거저 풀려날 것인데, 이것은 "우리 역시 빚진 이들에게 그랬듯이" 악순환을 끊어내는 역할이 인간의 손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이 기도문을 가르치고 있는 예수는 악순환을 끊으러 오셨다. 무고한 사람을 계속 낳는 이 악순환을 역전시키는 거대한 왼뺨 돌림이 그이의 십자가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지젝의 말대로 굴욕을 겸손으로 참으라는 말이 아니라, 악순환을 끊으라는 말이다. 시험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나 역시 악순환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비현실적 인간이 되어 현실의 악순환을 끊어낼 것인가. 사탄이 그이에게 요구했던 것이 바로 이 시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비현실적 인간이 어디에서부터 태어나는지 밝혀진다. 그는 "악에서부터" 풀려난 사람이다. 그러니 악/고됨은 에클레시아의 고향이고, 끊어내야 할 과거이며, 아직 내 친구들이 남아 있는 악순환의 수용소다.
욕망 앞에 나약하게도, 악순환의 일부가 되어 휩쓸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로마서 7:21), 우리의 '지금'은 언제나 가능성/불가능성 사이에 놓인다. 예수는 아버지의 종말론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공동체에게 이 기도를 가르쳤고, 이 기도는 아버지를 내 몸으로 소환해서, 내 몸을 통해 악순환을 끊어내는 신의 실천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했다. 악순환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일 수 없고, 오히려 전체이 문제인데, 그 거대한 전체로부터 이탈한, 그 거대한 전체의 작은 고리를 끊어버린 비현실의 가능성을 말했다. 그리고 이 작은 고리를 끊고 심겨진 겨자씨가 결국 나무가 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전망과 함께.
악순환에 빠져버린 나의 현실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이고,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과거의 진실이다. 그러나 업(karma)는 아니다. 예외없는 과거의 연쇄작용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처럼 보이지만, 예외상황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틈(chaos)이 있다. 즉 기독교인이 아닌 현실이지만, 아닌 것을 다시 아니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는가? 지옥(地獄)이 아니라 지옥(知獄)이라서, 내가 닫아놓은 가능성 때문에, 나에 대한 나의 인식이 나를 가두어놓고 있던 것이라면, 당신은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는가?
주기도문 시작에서 예수의 아빠의 존재양식이 "하늘들"로 표현되었다면, 주기도문 끝에서는 "나라, 권세, 영광"으로 표현된다. 이는 후대에 교회의 예전을 위해 삽입된 구절일테지만, 그럼에도 당시 비현실의 사람들이, 하늘을 무엇으로 이해했는지 가르쳐준다. 즉 한 사람이 '있음/없음'의 경계를 모두 포함하면서도 온전한 한 사람이 되었고(지젝은 온전한 중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소멸해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부활을 우화로 취급했기 때문에 생기는 부적절한 결론이다. 부활체는 물리적인 몸이면서도 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이가 그 하늘들을 취했을(take) 때, 그이의 취함(take)은 곧 에클레시아의 취함(drunken)이 된다. 왜냐하면 에클레시아가 곧 예수의 몸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들이 마시는 숨을, 당연히 몸도 공급받으며, 비현실을 현실로 소환하는 제스쳐로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 권세, 영광의 가능성이 모든 사람의 '지금' 앞에 놓여있다. 이것이 내가 지금 붙잡은 비현실적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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