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은 대개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쉬운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수원댁" 같은 표현 속에서 지명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칭했을 때, 그 정체성은 속지주의가 적용된다. 이는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이라 불리는 가나안 소유 여부가 그들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유대인은 약속의 땅을 약속받은 민족이고, 따라서 약속의 땅을 차지할 때 비로소 그 정체성이 '완성' 된다. 반대로 이방 민족들에 의해 그 소유지가 박탈되었을 때, 그들은 땅으로 대변되는 '자신다움'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움'의 상실은 그 상실을 채우기 위한 추동으로 이어진다. 이때 토라 준수의 문제가 기입되는데, 예언자들과 율법 연구자들은 "토라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원인 분석을 내놓았고, 이는 땅을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토라를 준수하자"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었기 때문이다.
윤리가 그 윤리 자체만을 위한 윤리가 아니라,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을 때, 그 윤리는 이미 윤리적 성격을 잃어버린 것이다. A.D.1세기 종말을 준비하던 여러 분파들중, 땅을 다시 차지 하기 위해 토라를 준수를 명목으로 내세운 집단은 바리새인들이 유명한데, 그들은 이스라엘 안과 밖으로 토라 준수의 합법과 위법을 구분하고자 했고("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마태복음 23:2), 이때 토라는 피아식별을 위한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 밖으로는 토라대로 살지 않는 비유대인들 모두가 적으로 설정되며(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토라를 지키므로), 안으로는 토라를 위반하는 내부인들도 "유대인"에서 배제된다(저들은 유대인이 아니다, 토라를 지키지 않으므로.) 이처럼 땅과 밀착한 정체성은 윤리를 추구하면서도 그 윤리를 배반한다.
성경은 인간이 토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음을 명시한다.
레위기 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인간이 토지 소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 윤리적일 수 없다면, 무엇에서 정체성을 발견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신체 소유'에서는 자신 혹은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 문제가 SF영화들의 단골 소재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가진 복제 인간들은, 신체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민한다. <공각기동대>의 경우 신체는 임무수행 과정에서 손상되고 심지어 파괴될 수 있다. 따라서 신체가 곧 자아라 볼 수 없다. 다만 신체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무엇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공각기동대>에서 그 "무엇"이란 데이터로 환원될 수 있는 의식이다.) 이러한 '비신체성'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는 데카르트의 변주로서, 이때 신체는 곧 보이지 않는 정신의 연장으로 취급된다.
같은 문제를 <블레이드 런너 2049>는 '생식'으로 돌파하려고 한다. 기존의 복제인간의 신체가 '생활'과 '전투' 면에서는 인간과 동일하거나 우월했지만, 단 하나, 생식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만일 복제인간이 생식과 출산이 가능하다면, 그래서 그 2세대가 제작이 아니라 출생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출생의 경험 자체가 곧 자기 정체성, 곧 영혼이다.
즉 태어남의 사건을 가져옴으로써 <블레이드 런너 2049>는 <공각기동대>의 논의를 한층 심화시킨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비신체적 의식이 아닌, 구체적인 사건으로서 '출생'을 인간 정체성의 토양으로 삼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은 모종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각기동대의 테제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그 기억을 데이터로 환원시키지 않고 출생 경험과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인간은 출생에 대해서 별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생 사건과 기억의 관계는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주인공 K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과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 기억 역시 '주어진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인간 정체성에 대한 탐구란 바로 이 매끄럽지 않은 관계에 대한 탐구, 즉 출생의 분명한 사건과 그 분명한 사건에 대한 불분명한 기억(무의식)의 연관관계에 대한 탐구인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의 시도이다.
3.
만일 프로이트라면, 소유에 의해 정체성 발견하려는 것을 항문기와 연결시켰을 것이다. 변을 참으려는 유아적 성향이 소유욕의 프로토타입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프로이트식 사고에 따라 그 유아가 지키려는 것이 사실은 밖으로 내던져야 할 똥임을 상기한다면, 소유물로부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시도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소유할 만한 것이 없다'는 부정문일 뿐일 것이다. 토지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체성은 윤리를 수단화하며, 신체를 통해 얻는 정체성은 신체가 아닌 비신체적 무언가를 전제할 때만 타당하다. 결국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소유물로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할까? '나'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부정판단에서 무한판단으로 넘어가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소유할 만한 것이 없다'로부터 '이 없음(nicht) 만이 가져야 할 유일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 '없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소유물에 의해 투영된 거짓 나를 만들어내지 않는 길인 것이다.
성경은 '포로'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포로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방 민족에게 땅을 빼앗긴 상태로, 그러나 바울에게는 악에 사로잡힌 인격(사륵스)으로 이해되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해석 차이일까? 집단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차이일까? '포로' 라는 말을 '어딘가에 묶여있는, 종속되어 있는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전자는 이방제국에 묶여있는 상태를, 후자는 죄에 묶여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방 제국이든, 죄이든 모두 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非)유대인' 이다. 성경에서 이방(고임)은 유대인 아닌 민족들 전체를 통칭하는 표현이며, 죄는 유대인이 배격해야 할 '토라와 무관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이방 민족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방인은 토라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로마와 투쟁하는 이유는 바로 유대인다움을 지키기 위함이다. 이때 유대인다움은 땅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땅을 잃는다는 것은 곧 로마와의 동질화를 막는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진 사마리아에 대한 경멸은, 곧 이방과 동질화되어 자기다움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유대인들은 결국 땅을 잃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땅에 살면서, 이방과 동질화되지 않기 위한 투쟁의 나날, 곧 다시 땅을 되찾아 유대인다운 정체성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같은 추구를 오늘날 시오니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땅이 정체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 땅의 소유 유무는 '우리가 누구인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면? 오히려 땅을 통해 얻으려는 정체성은, 유대인이 그토록 미워했던 로마 제국의 정체성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신체를 지키는 것을 통해 유대인다움을 지킬 수 있는가? 예수는 이에 대한 극단적인 반례를 보여준다. 타자에게 땅을 빼앗긴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예수는 그 신체 마저도 그 타자에게 빼앗긴다. 뺴앗긴다는 말보다는 내어준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아니, 신약성경이 사용하는 표현은 '파라디도미(παραδιδωμι)'인데, 예수의 최후는 줄곧 '팔아 넘겨진다'. 가롯 유다에게 팔아 넘겨지고, 산헤드린 공의회에 팔아 넘겨지고, 빌라도에게 팔아 넘겨지고, 헤롯에게 팔아 넘겨지고, 최후에는 로마 군병에게 팔아 넘겨진다. 그런데 신체 마저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예수가 자기 자신을 잃었는가? 예수는 신체를 지키려 했고, 그 신체를 통해 자기다움을 지켜냈는가? 예수는 우리가 앞에서 확인한 '없음에의 추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예이다. 즉 동질화되지 않을 것은 없다. 팔아 넘겨질 때, 그것은 죽음으로의 동질화로 넘겨지는 것이다. 땅이 넘겨지도, 신체가 넘겨진다. 그리고 최후에는 삶마저 넘겨져서 예수는 역사 속 사망했던 모든 시체들과 그 운명을 같이 한다. 그런데 이때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던 그 다움이 소실되었는가?
4.
신명기 30장이 포로해방을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마음과 입'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바울은 로마서 10:8에서 이 '마음과 입'을 인용하는데, 이 마음과 입의 고백은 마침내 내가 아무 것에도 묶이지 않았다는 고백이고, 이 고백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어떠한 소유물 없음을 끝까지 추구하겠다는 결단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없음'에 대한 결단이 곧 사도들이 전달해주었던("우리가 선포하는 신실함의 말씀", ) 예수의 이름이었다. "예수의 믿음", 곧 예수가 가졌던 믿음은 그 없음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이다. 이 땅의 소유물 일체를 기각하고, 없이 계신 신으로부터 나의 나됨을 확인했던 것이다.
로마서 10:8~10, 개인번역
"말숨이 네 입 속에 있으며, 네 마음 속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신실함의 말숨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당신의 맘으로 한 분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즉 맘으로 신실하여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5.
이 '없음'을 경유할 때 비로소 '크레스토테스'를 말할 수 있다. 자비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최고의 사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없음을 경유하는 것은, 일체의 소유물을 놓았다가(죽음) 다시 드는 것(부활)과 같기 때문이다. 즉 이 없음이 만물의 '재사용(reuse)'을 위한 전제인 것이다. 신명기 30장에 줄곧 출몰하는 "다시"라는 부사는, 이 '없음'을 경유한, 즉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재료로 만들어가는 다른 사용방식을 지칭하고 있다. 창조를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이 없음을 경유하는 새로운 사용이 곧 창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새롭게 주어지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동일한 물질에 대한 새로운 배치 혹은 새로운 사용 방식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의 재사용이다. 다만 그 대상을 사용하는 주체가 새로워졌을 뿐이다.그 새로워진 주체가 사용하는 최초의 물질은 자신의 신체일텐데, 그 신체 사용방식에는 앞에 re를 붙여야 한다. 산채로 신체에 대한 새로운 사용방식이 구현되는 것이 곧 resurrection이다. 마치 이집트에서 가져온 우상숭배의 금붙이들을 가지고 성막을 만들었던 것처럼, 물질은 자비의 사용방식을 만난다. 금이라는 물질은 여전하지만, 그것의 사용방식이 완전히 전환된 것은 '없음'의 토대 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희랍어 에클레시아는 '정치적 결정을 위한 회합'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즉 에클레시아는 이 없음을 공유하며, 새로운 사용방식을 모색하는 정치적 결합이다. 근거없는 신뢰로서 자기 자신을 어떤 소유물에 기대지 않고도 확인하는 사람들이, 기존의 물질 사용방식을 최고의 사용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모임이고, 이들의 사용은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통치 질서의 허위를 폭로하고, 그것을 뒤집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약의 헌신과 구제는 돈을 모아서 (땅 사서 건물 지어서) 어떻게든 다시 땅을 차지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그것의 반대로 읽혀야 마땅했던 것이다.
에클레시아의 존재 자체는 '없음'을 '내용'으로 매몰시키려는 도시의 지배 방식을 폭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곧 숭고함으로 위장된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감벤은 자연상태의 인간이 주권국가에게 이중으로 소외된다고 주장했다. 자연상태에서 주권국가에게 주권을 이양하면 안락한 도시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데에서 한 번, 그리고 그 도시적 삶이 사실 안락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두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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