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7~13
그러므로, 그 거룩한 숨결이 말씀하시듯.
"오늘, 만일 그의 그 소리를 당신들이 들었다면,
당신들의 가온을 완고히 하지 말라,
그 광야에서의 그 시험의 그 날을 따르는 그 적대감/쓰라림 안에서,
거기서 너희의 아비들은 입증 안에서 시험했고
나의 일들을 40년동안 보았다/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그 족속에게 슬퍼하며 말했다,
'늘 그들은 가온으로 속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길들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나의 그 화 안에서 맹세했듯이.
'만일 그들이 나의 그 안식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면,'"
형제들이여, 보아라/삼가라,
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서 있음(αποσταται)' 안에 있는,
'열악한 신실치 않음'이 당신들의 어떤 가온 안에 있지 않도록,
오히려 너희들은 각 날을 따라 서로를 공감하라, 오늘이라 불리는 날까지,
이는 당신들 중 어떤 이가 비뚤어짐의 속임으로 완고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메시아와 함께 참여한 이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 안정적인 토대의 시작'을 끝들까지 우리가 붙들고 있다면 말이다,
(다음과 같이) 말씀되는 것 안에서,
'오늘 만일 그 소리를 당신들이 들었다면,
당신들의 가온들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마치 적대감/쓰라림 안에 있듯이."
1) 즉 누가 듣고도 적대감들을 갖는가?
그러나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로부터 밖으로 나온 모든 이들이 아니었는가?
2) 그런데 그분은 어떤 이들에게 40년간 격노하셨는가?
그 광야에서 시체들로 전락한 비뚤어진 이들이 아니었는가?
3) 그런데 그분은 어떤 이들에게 그분의 그 안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맹세하셨는가,
허락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한다면?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신실하지 않음을 통해서는 들어갈 수 없었음을.
-오늘도 오늘
히브리서는 2017년 8월 4일의 나를 기다렸던 것일까? 벤야민이 말했듯, 예술 반열의 텍스트는 모두 번역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이 번역 가능성은 근친성을 가진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순수언어를 드러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드러난 순수언어. 히브리서 기자가 의도한 의미가 아닌, 그가 의도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번역이, 오늘 내가 하고자 한 일이었다.
히브리서 3:7은 시편 95:7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과거의 텍스트 속에서 자신의 현실을 인식했을 때, 그것은 '인용'이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일단 기자는 시편 95:7을 말한 주체가 '성령'이라 말한다. 그러나 시편은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이런 방식으로 두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동일한 실체를 드러낸다. 성령이 곧 "우리 하나님"인 것이다.
시편 95:7,8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리고 과거와 현실이 만나는 장소를 기자는 '오늘'이라 부른다. 이 '오늘'은 인용인가, 현실인가? 시편 96:7에도 "오늘날"이란 단어는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오늘날"을 과거로 이해해선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이다. 오늘 그대로 오늘. 내가 지금 텍스트를 현실로 옮겨놓는 오늘 말이다. 그 오늘이 이 오늘이다.
따라서 "그의 그 소리"는 오늘도 여전하다. 당신이 만일 오늘의 소리, 곧 우리 하나님이신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면,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이 '완고함'에 대해서는 바울도 로마서 9~11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기자는 이 완고한 시절, 시험의 그날들을 단 하나의 단어 '파라피크라스모스(παραπικρασμός)'로 요약한다. 이 단어는 '거역', '도전', '반항'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날카로운(πικρος)'에서 온 동사로 뜻은 "make bitter" 쓰게 만드는 것이다. 그 '쓰라림'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들이 현시대의 희망임을 드러내고자 그들을 단련시킨다. 그러나 그 단련 속에서 그들은 '시험한다'. 즉 입증되어야 하는 이들이, 입증으로 이끄는 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테스트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불신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들에 대한 불신이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 열방의 빛으로 입증될 수 있을까?', '혹시, 신의 입증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무려 40년을 이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늘'. 모든 시간 속에서 그들을 속이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온으로" 속고 있었다. 여기서 가온으로는 도구격으로 해석된다. 즉 스스로에 대해서 스스로를 통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상태. 속아버린 자신은 신이 제시하는 길들을 의심하고, 의심으로는 걸을 수 없는 그 길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조건절의 가능성 속에서
그리고 '늘' 있는 이러한 사람들에 신은 맹세한다. 그런데 이 맹세의 내용은 번역상 문제가 있다. 희랍어 원문으로는 다음과 같이 쓴다.
εἰ εἰσελεύσονται εἰς τὴν κατάπαυσίν μου.
"만일 그들이 나의 그 안식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면"
'εἰ'는 영어의 if와 같다. 즉 이 구문은 조건절이다. 조건절이 아니라면, 맹세의 내용으로서 weather("인지, 아닌지")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내용을 맹세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닌가? 개역성경은 이것을 부정문으로 번역했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렇게 번역했기 때문에, 이 인용이 의도한 의도 자체를 무시한 결과를 낳았다. 조건문과 부정문의 차이는 확연하다. 가능성. 조건절은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둔다. 부정문은 그 자체로 판결이고, 판결은 빈틈을 없애버림이다. 그리고 이는 영어번역도 마찬가지다.
So I sware in my wrath, They shall not enter into my rest.
그럼 히브리서 기자는 대체 무엇을 보고 인용했을까? 토머스 슈라이너는 맛소라 판본과 LXX 모두에 가능성을 두고 있다. LXX의 시편 95:11을 확인해보면,
εἰ εἰσελεύσονται εἰς τὴν κατάπαυσίν μου.
히브리서의 시편은 LXX를 직접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LXX에서도 조건절이다. 그럼 이 조건절의 주절은 무엇일까? 무엇에 대한 조건을 단 것일까? 가능성은 두 가지 뿐이다. "내가 나의 화 안에서 맹세했다"가 아니면, 시편 96:1인 "새로운 노래로 주께 노래하라, 온 땅아 주께 노래하라(ΑΣΑΤΕ τῷ Κυρίῳ ᾆσμα καινόν, ᾄσατε τῷ Κυρίῳ πᾶσα ἡ γῆ)." 그리고 나는 구둣점이 나중에 찍힌 것이라면, 시편 96:1의 조건절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 마저도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이 초유의 사태가 새 노래의 내용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뒷 쪽을 조건절의 주절로 본다면, "형제들이여, 보아라/삼가라!"는 "만일 완고한 이들이 하나님의 안식 가운데로 들어갈 것이라면, 형제들이여! 주의하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로마서 9~11장의 내용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즉 완고한 이들이 신실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성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언급된 성령인 것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신실하지 않음에 대한 경고는, 모든 사람이 이 신실함으로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 붙어있게 되었다는 에클레시아의 성격을 드러냄("형제들이여")과 동시에, 신실함 이외의 것을 신과의 매개로 두려는 그 어떤 류의 사상도 불식시킨다. 심지어 그것이 '토라'가 될지라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과의 공명, '카테콘'은 누구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서 있음"으로 번역한 단어는 아포스타타이(αποσταται)를 쓴다. '아포'는 이탈을 의미하고, '스타타이'는 서 있음을 의미한다(여기서 stand가 왔다). 개역성경은 '떨어질까'라고 번역한 이 단어의 명사형은 '아포스타시스'이고, 아포스타시스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배도'로 번역된다.
데살로니가후서 2:3, 개역한글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히브리서는 교회에게 '사시는(능동분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서 있는 '배교' 안에서, 신실하지 않은 열악한 무언가가 가온에 있지 않도록 조심하라 권면한다. 즉 신실함 이외의 것을 가지고 사는 것과 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배교는 밀접한 상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배교를 막는 방식으로 제시회는 것은 '공감'이다. "각 날을 따라 서로를 공감(παρακλησις)하라!" 이것이 '오늘' 해야 할 일이다. 공감이라고 번역한 파라클레시스는 파라클레토스인 성령을 연상시키는 단어로서, 공동체 지체들 곁에서의 권면과 조력을 뜻하는 단어다. 즉 파라클레시스는 서로의 신실함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다. 신실함이 없으면 파라클레시스도 없다. 신실함과 파라클레시스. 이것이 어떤이가 비뚤어짐으로 치달으며 완고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그런데 이 다음 구절을 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기자는 우리가 메시아와 엮인 이들, 즉 메시아 안으로 성령을 통해 참여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신실함과 파라클레시스는 메시아를 닮은 삶이요, 성령으로 힘입는 삶이다. 기자는 다시 조건절을 제시하는데, 그 조건절은 단어 하나하나가 곱씹어볼만 하다.
'그 안정적인 토대의 그 시작'을 끝들까지 우리가 붙들고 있다면(κατάσχωμεν, κατέχω)'
'안정적인'은 부사로 처리하지 않고 여성명사에 붙였다. 같은 여성명사인 토대에 붙일 수도 있고, 시작에도 붙일 수 있다. '토대'는 휘포스타시스로 '아래 놓여 지탱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서 안에서는 '실상(11:1)'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개역한글은 '확실한 것', 새번역은 '확신'으로 옮겼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그 안정적인 토대의 시작'이란, 메시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새 창조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LXX 창세기 1:1에서 '태초'로 번역되고, 이는 요한복음 1:1에서도 동일하다. 즉 새로운 창조를 언급하는 단어로서 시작(αρχη)인 것이다. 그리고 새 창조의 아르케는 곧, 메시아 예수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어는 '카테콘'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6,7의 그 카테콘이다.
이 '카테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 중에 있다. 칼 슈미트가 이 카테콘을 세계전쟁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는 유럽공법체제로 본 이후, 이 카테콘에 대한 현대철학의 관심은 뜨거웠다. 아감벤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보았고, 신학계에서는 적그리스도, 성령, 교회, 미카엘등 상이한 주장이 대립했다.
나는 A.D 1세기 교회 리더 그룹들 사이에서(바울은 '우리'라고 언급하는 사도그룹) 중요한 표현들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12절에서 '배교'가 언급되었고, 두절 뒤에 '카테콘'이 언급되었다. 이런 사상의 흐름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과 동일하며,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모호하게 표현된 억제자의 정체를 밝혀준다. 카테콘, 곧 억제하는 자는 히브리서의 '우리'다. 우리는 '그 안정적인 토대의 그 시작'을 확고히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은 새 창조의 메시아를 확고시 붙듬으로 멸망이 임박한 사탄의 활동을 억제한다. 곧 카테콘은 교회인 것이다. 교회가 억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했을 때, 이 땅 위엔 게헨나가 벌어지는 것이다.
-토라를 다시 읽는 사람들
기자는 자신이 인용했던 구절을 다시 한 번 곱씹는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시편 95:1에 대한 내용이었음을 상기하듯이. 그리고 세 가지 자문자답을 이어간다. 모세의 이야기(민수기 14장)를 통해서 보는 자신들의 현실이었으리라.
1) 아마도 배교의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배교는 유대교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한 사람들은 듣고도 적대감을 갖던 사람들이었고, 기자는 "모든 이들"이라 언급한다. 즉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리고 모세를 통한 출애굽을 자부심으로 가지고 사는 유대인 그룹은, 지금 메시아 예수의 소식을 듣고도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다.
2) 모세의 출애굽을 통해 나온 이들은, 듣고도 하나님에 대해 시험하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40년간 격노하셨다.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걸어다니는 시체와도 같았다. 비뚤어짐의 노예로서.
3) 기자는 다시 신실함을 강조한다. 신실하지 못하면 안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맹세. 신실하지 못했던 삶을 과거로 만들고, 신실함으로의 변화를 겪어야 한다. 이것은 유일한 문. '그 안정적인 토대의 시작'을 붙들고 카테콘의 삶에 엮이는 유일한 문이다.
히브리서는 토라를 다시/새롭게 읽고 있다. 토라와 현실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토라가 인용되는 현실은 위기이자, 그 위기는 새롭게 이해된 일상이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이 읽어냈던 오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다르다. 우리의 현실은 그들과 다르지만, 우리의 현실 역시 토라를 관통하고 있고, 토라는 다시 인용되기를 줄곧 기다리고 있다. 설령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텍스트의 번역 가능성은 역사 속에서 충전되고 있다. 다만 때가 차면, 번역 가능성이 새로운 현실을 열어젖히며 의미로 피어날 때가 되면, 그 날조차 우리에게 오늘일 뿐이다. 의미가 흘러 넘쳤기 때문에 감출 수 없는 오늘인 것이다.
어제 잠든 내 친구 김원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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