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을 연구 중이다.
마태복음 6:9b~15, 사역(私譯)
우리 아빠 하늘 계신 분,
당신의 이름 깨끗게 되리라,
당신의 나라 오리라,
당신의 뜻 되리라,
하늘에서처럼 땅에도.
우리 오늘 먹을 밥 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빚진 것들을 우리에게서 없애셨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빚진 이들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우리를 시험 속으로 나르지 마시고,
오히려 눌림으로부터 건지소서.
왜냐하면 만일 사람에게서 그의 어긋난 발걸음들을 없이하지 않으면 반드시, 너희에게도 너희의 하늘 아빠가 없이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빚진 것들을 우리에게서 없애셨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빚진 이들에게 그랬듯이.
이 구절 하나를 생각해보자. '탕감과 용서'에 대한 이 구절은 희년과 마태복음 18장으로 연결된다. 먼저 희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 희년과 예수
1) 레위기의 희년원칙
레위기 25:23
땅을 영구히 팔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은 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임시 거주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땅은 사람이 소유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마침내 차지했고, 제비를 뽑아 각 지파들은 땅을 분배받았다. 영어 lot은 '제비'라는 뜻도 있고, '운', '땅', '재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lotto도 여기서 나왔다) 다 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차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분배받은 땅을 잘 경작할 뿐, 다른 사람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었다. 빌려줄 수는 있었는데, 빌려주더라도 최대 기간은 50년이었다(성경에서 "땅을 판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모두 '임대한다'는 의미). 왜냐하면 '희년'이라는 절기가 5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7년에 한 번씩 안식년을 갖도록 명하셨다. 그 안식년이 일곱번째 되던 해의 다음 해가 희년이 된다. 대속죄일(7월 10일)에 숫양의 뿔나팔('쇼파르'라 부른다)을 울리고, 15일에는 초막절을 지킨다. 이 해에는 토지를 경작할 수 없고, 모든 빚은 탕감되며, 노예는 해방된다. 땅의 임대권은 죄다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의 제비 뽑은 대로 돌아간다.
레위기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선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기쁨의 해(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땅으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으로 돌아갈지며
2) 희년에 대한 예수의 인식
그런데 이스라엘 안에는 '바알'이라는 우상이 들어왔고, 이 바알은 토지의 개인소유를 승인하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다는 말은, 희년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포로기를 겪으며, 더 이상 희년을 적용시킬 땅마저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러한 포로기 아래서 예수께서 누가복음 4장에서 하셨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누가복음 4:16~19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이는 땅을 잃은 이들에게 희년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희년을 선언하면서 그이가 인용하신 본문은 이사야 61장이고, 이 본문은 포로기가 끝나고 다시금 희년이 이뤄질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예수는 땅을 빼앗긴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땅을 돌려줄 것이고, 지금 땅을 빼앗겨 남들의 소작농이 된 노예들이 마침내 자유를 찾게 될 것이라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 희년의 결과를 '땅 찾음'과 '자유 얻음'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전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자유 얻음은 메시아 자신의 죽음을 통한 출애굽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이가 희년으로 자신의 사역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주기도문의 빚 탕감 청원 역시, 희년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빚진 것들을 우리에게서 없애셨습니다,
...
주기도문에서 "빚진 것들을...없애셨습니다"가 희년을 의미한다면, 희년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이고, 이들은 더 이상 빚이 없기에 자유민의 신분을 얻은 이들이다.
2. 자유와 땅 찾음 사이에서 : 용서
메시아 예수에 의해 희년이 선언되었다. 그이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노예로 붙들고 있던 땅 주인의 허위를 드러냈다.(사탄은 땅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 권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자였다) 예수를 통해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는 민족적, 폭력적인 추구를 거절하고 에클레시아로 나온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더 이상 사탄의 노예가 아닌 자유민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아직 땅 분배가 온전히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은 희년의 선언과 그 선언에 따른 땅 분배 사이에 사는 이들이라 말할 수 있다. 종말론적 희년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에 대해 새로이 이해한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도래하지 않은 희년을 미리 살아간다. 다음의 구절이 뜻하는 바와 같이.
우리 역시 우리에게 빚진 이들에게 그랬듯이.
우리 자신들이 빚졌던 것을 돌려받았듯이, 우리도 마땅히 타인에게 그렇게 해야한다는 말이다. "~듯이"로 연결된 두 문장은 어느 것이 시간상 먼저임을 밝히려는 늬앙스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규명해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희년을 시작하셨고, 사람은 그 희년 안에서 희년답게 살아간다. 이것은 시간 순서에 따른 인과관계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것을 돌려주셨듯이, 우리는 저들에게 저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희년의 선언과 이룸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리고 이 '마땅히 돌려줘야 할 것을 돌려줌'은 용서와 상관이 있다. 왜냐하면 '빚 탕감'은 '죄 사함'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땅을 돌려받는 희년이 용서로 이해되는 것은 예수 때문에 생겨난 해석의 혁신이기도 하다. 돌려줘야 할 것을 돌려주는 것이 어찌 용서와 연결될 수 있는가? 용서와 관련된 유명한 본문과 주기도문의 연관성 속에서 답을 찾아보자.
마태복음 18:15~20
"만일 네 가족이 비뚤게 굴거든, 너와 그 사람만 있는 자리로 데려가서 잘못을 말해주어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너의 가족을 (악으로부터 새로) 얻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네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두 세 증인의 입 위에 모든 이야기를 놓기 위함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의 말도 흘려듣거든, 그 에클레시아에 말하라. 그런데 에클레시아 역시 흘려듣거든, 그는 너에게 이방인과 세리처럼 있게 되리라." 1
그이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에클레시아 안에서의 원칙을 제시하셨다. 만일 에클레시아 일원 중 누군가가 비뚤게 굴거든,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잘못을 말해줘야 한다. 다만 처음에는 단 둘이 있는 자리를 만들어서 그 잘못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 사람의 공적으로 잘못을 지적받아 수치를 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잘못을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면, 두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그 다음은 두 세 사람이 함께 그의 잘못을 말해준다. 두 세 사람을 데려가는 것은 그가 잘못을 시인하든 시인하지 않든 그 일의 증인을 삼기 위함이다. 두 세 사람의 증인은 구약 전통을 따른 것인데, 토라를 증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인원이다. 토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인 에클레시아 안에서, 한 사람의 잘못은 중요한 문제,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에게 줄 것이 아직 남아있다.
에클레시아 전체가 그에게 말한다. 그게 잘못이라고, 옳음은 이것이라고. 이것이 그에게 마땅이 돌려줘야 할 바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더 이상 에클레시아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가 이방인과 세리, 즉 에클레시아의 이전 삶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에클레시아가 마땅히 돌려줘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에클레시아는 그 구성원이 비뚤어졌을 경우(죄를 범했을 경우), 그에게 참을 돌려준다. 그 참이란 그 사람의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참을 돌려주고, 에클레시아는 그 참을 받아들인 사람을 돌려받는다(악으로부터 새로). 이것은 개인윤리로 환원될 수 없는, 희년적 삶이다. 희년은 제자리에 대한 선언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의 엄중한 명령이다. 에클레시아가 '타인의 잘못 말하기'를 개인적 차원에서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이것이 희년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상속자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깍아내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뒷담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에클레시아는 그 사람의 잘못에는 마땅히 참을 주고, 마땅히 참된 사람을 돌려받는다. 희년이 물질적 가치의 회복 뿐만 아니라, 참된 실존의 회복 이해되는 해석학적 혁신, 이 과정을 우리는 '용서'라 부른다.
3. 복과 저주의 기준 : 공동체로서 구현된 메시아의 인격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는 희년의 성취를 고대하는 와중에, 타인에게 참을 말하고 참을 선택한 참된 실존을 얻는 과정이 에클레시아 안에서 유기적으로 벌어진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만일 땅 위에서 너희들이 묶은 만큼, 하늘에서 묶여있게 될 것이고 땅 위에서 너희들이 푼 만큼, 하늘에도 풀려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한다, 만일 너희들로부터 둘이 땅 위에서 모든 문제에 관해 함께 생각모으면(그들이 구한다면 반드시), 하늘 계신 나의 아빠 곁에서 그 문제가 그들에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둘이나 셋이 내 이름을 위해 함께 모인 자리에는, 그들 가운데 나도 있기 때문이다." 2
'묶임'과 '풀림'은 '종속'과 '자유'를 뜻하는 말들이다. 묶인 자는 무언가의 노예가 된 사람이요, 풀린 자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묶인 사람이 되느냐, 풀린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권한이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진다. 잘못을 저지르는 이는 타인에게 묶이게 된다. 타인이 그를 용서하기 전까지는 그는 결코 풀리지 못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했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빚이 있고, 묶여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기 전까지는 결코 풀리지 못한다. 그런데 희년의 선언을 받아들인 이들이 고백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용서를 선언하셨고, 이제 희년선언~땅 배분의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용서는 잘못에 대한 타당한 지적과 그것에의 인정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은 이 용서의 과정을 에클레시아에게 일임하셨으므로, 에클레시아 안에서의 죄 고백 없이는 메시아 예수의 희년에 참여할 수 없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입장에서는 위의 세 가지 과정을 준수하며 희년 참여의 관문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에클레시아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복과 저주가 흘러가기 때문이고, 그 복이란 신적 용서를 경험하는 것, 저주는 그 용서 앞에서 등돌리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이는 에클레시아에 대해 정의하신다. 다시금 '두 세 사람'이 언급되는데, 이들은 비뚤게 군 사람에게 토라를 증언하는 바로 그 두 세 사람이다. 이 두 세 사람이 구하는 모든 문제는 분명 희년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즉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마땅히 줘야 할 것을 줘야하는 문제, 잘못을 인정한 참된 실존을 에클레시아가 얻는 문제, 곧 용서의 문제를 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이는 이 문제에 관하여 함께 생각을 모으면, 그 자리에는 하늘 계신 아빠가 함께 계시고, 그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 사람이 복을 선택하든, 저주를 선택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것은 마치 예수를 영접하거나 거절했던 사람들로 나뉜 것과 같다. 희년을 선언했던 예수의 인격이 여럿이 공유하는 집단 인격으로 구체화되었을 때, 메시아는 그 자리에 계시다고 말할 수 있고, 그들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서 기능한다.
따뜻한 결론은 아니다. 다만 에클레시아가 더욱 기준으로서 올곧게 설 것을, 또한 희년의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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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번역에는 "너에게 비뚤게 굴거든"으로 '너에게'가 추가되어 있다. 차라리 개역성경의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 낫다. -"잘못을 말해주어라" : '클렝코' to convict, to find fault with, correct -"얻은 것이다" : '케르다이노' of gain arising from shunning or escaping from evil (where we say "to spare one's self", "be spared") -마지막 문장은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는 지나친 의역이다. 'esto' "그 사람이 될찌라" [본문으로]
- -시제 확인. 우리가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는 순차진행이 아니다. 미래동사 + 완료형 분사가 쓰였다. "우리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인 것으로 (발견) 되리라." 미래완료가 없기 때문에 번역이 쉽지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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