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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7~15


  그리고 그 천년이 이뤄지면 반드시 사탄은 그의 갇힘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올 것입니다, 땅의 네 모서리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 그들을 그 전쟁으로 함께 이끌어, 그들을 그릇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수는 그 바다의 모래 같을 것입니다.


  "그 천년이 이뤄지면" 사탄을 놓아줍니다. 이 구절은 기껏 세스코 불러서 집 안의 바퀴들을 없앴더니, 다시금 그 집 안에 알을 밴 바퀴벌레를 푸는 느낌입니다. 굳이 풀어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풀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아비소스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아비소스를 '하늘과 단절된 땅의 차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늘과 땅 마저도 새로워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창문 하나 없는 방에 사탄을 가두어놓았는데, 이제는 그 방 마저도 철거할 때가 된 것입니다. (혹여나 집 잃은 사탄에 대해 연민을 느끼신다면, 그간 무고하게 무수한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 넘겨준 그의 범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땐 불필요한 긍휼이 아니라 악의 소멸에 대한 환호가 터져나와야 합니다!) 따라서 천년이 이뤄진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실재.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나타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즉 사탄의 처소가 어느 곳에도 허용되지 않은채 이제 새 창조 완성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탄은 잠시 풀려난 기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공을 꿈꿉니다. 땅의 네 모퉁이에 있는 나라을, 최초의 인간을 지배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전쟁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길을 걷습니다. 이 그릇된 길을 걷는 나라들의 이름을 요한은 '곡과 마곡'이라 명시하는데 이것은 에스겔 38장의 인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에스겔 38장이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16장과 19장에서도 같은 인유를 확인했기 때문이죠. 만일 이 에스겔 38장이 인유된 본문들이 같은 사건을 지시한다면, 여섯번째 대접이 쏟아지고 벌어지는 아마겟돈 전투(16:14)와 왕들이 메시아의 천군천사에게 패배하여 새에게 그 시체가 뜯어먹히는 19:19의 전투, 그리고 오늘 본문의 최후의 심판 직전 곡과 마곡의 전투(20:7)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의 넓이(만큼)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이들의 진, 그 사랑받는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불이 그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소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릇되게 하는 고발자는 그 불과 유황의 연못으로 던져졌습니다, 거기에서 짐승도 거짓예언자도 낮밤으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그들은 온 땅을 덮을 만큼 모였습니다. 참수된 자들이 이 땅을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 결성한 공동체는 위기를 맞는듯 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천년이 이뤄진 시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들은 나님께 생명을 맡기고 희생당할 준비가 되었으면 되었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 어리석음을 졸업하는 기간이 천년이었는데, 이미 천년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악은 최후의 시험을 걸기 위해 싸움을 걸었지만, 이들은 이제 시험에 지지 않기에, 사탄의 뜻따라 상황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고도 하나님의 뜻을 붙잡는 참수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사탄의 군대에 의해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무 싸움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무의미한 일을 벌였던 이들에게 떨어질 뿐입니다. 


  바벨론과 두 짐승의 멸망을 우리는 이미 19장에서 확인했습니다. 20장에서는 고발자의 멸망을 다룹니다. 사람을 고발해서 둘로 찢어놓는 디아블로, 거대한 용은 자신이 인질로 잡았던 사람들을 모두 토하고선, 배로 기어다니는 그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불 못으로 던져져 외로이 비참한 끝을 맞습니다

  또한 16장과의 20장의 평행관계를 보여주는 근거로서, 16장과 같은 대상이 뒤집혀진 순서로 멸망당합니다. 즉 '거짓 예언자 - 짐승 - 용'의 순서로 멸망당하는 악의 삼인방이, 오늘 본문에서는 '용-짐승-거짓 예언자'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죽는 순서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 악의 세력이 멸망하고 만다는 동일한 결론이 중요합니다.  


  천년이 이루어졌을 때, 악의 파멸이 이뤄진다는 내용도 생각해봅시다. 천년이 이뤄지고 나서도 사탄은 끝까지 사람을 시험했습니다. 곡과 마곡처럼 사탄의 시험에 걸려 넘어져 끝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력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천년이 이루어졌다고 사탄의 속임과 시험 자체가 한꺼번에 없어진 건 아닙니다. (물론 곧 사탄은 파멸됩니다만) "천년의 이룸"은, 이제 사탄이 다시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려 들어도, 더 이상 사람을 타락시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곧 새창조의 완성, 인간이 온전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천년의 이룸에 참여한 이들, 곧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산정하신 이들은 사탄을 발 아래 밟습니다, 마치 고린도전서 15장의 그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산정하신 의로움이란, 사탄을 이기는 인간성이요, 마침내 그것이 천년과 더불어 이뤄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을 따랐던 곡과 마곡의 사람들은 어찌 될까요? 에스겔 38장은 마침내 '포로 귀환'이 벌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 곡과 마곡이야 말로 사탄의 포로 아니었습니까?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탄을 따라왔던 이들은 자신들이 솟았음을, 이 천년이 이뤄진 날에 사탄의 처참하게 무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럼 이들은 사탄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빛나는 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거기 계신 그의 얼굴로부터 땅과 하늘이 달아났고, 그것들을 위한 '곳(토포스)'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생각납니다. 이제 이 길고 길었던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창세기를 여는 "하늘과 땅"이란 말은 창조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세계 전체가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이제 옛 하늘과 옛 땅은, 온전해진 사람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만남에 어울리지 않는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아비소스의 셋방에서 쫓겨난 것은, 이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리모델링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옛것이 된 창조세계 전체는, 타락한 천사들과 죄 많은 사람들로 얼룩졌기에, 신혼부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빛나는 옷을 입고 깨끗한 모습으로 나타난 신랑과 신부는, 이제 새로운 집, 새로운 창조세계를 구성할 것입니다. 마치 고장난 배 위에서 새 배를 만들듯, 이 태초의 창조세계 위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지구가 파멸되고 또다른 우주에서 살게 될 것이란 말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연속성도 있고 불연속성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세계는 새로우면서도 옛 창조세계와 분명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힌트가 부활하신 예수이십니다. 그이가 부활했을 때, 사람들은 그이가 예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본 예수는 예전과 분명 다른 차원의 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하늘과 땅은 옛 하늘과 땅처럼 우리에게 익숙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이 창조세계를 가꾸려는 노력 또한 고스란히 이어질 것입니다.(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경작하고 다스릴 것을 명하실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전과 완전히 다른 차원. 악이 사라진 창조세계를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죽은 이들, 큰 이들, 작은 이들, 그 왕좌 앞에 서있었고, 책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작은 책이 열렸는데, 그것은 삶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입주에 앞서, 마지막 바로잡음이 벌어집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finishing touch. 예수로 시작된 바로잡음을 마무리하는 단계로서 최후의 심판입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들의 행실이 기록된 책이 등장합니다.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실천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징적인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 책의 심상은, 우리가 벌였던 모든 일들을 그저 흘러가고 잊혀지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분명한 경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는 우리가 행했던 모든 일들을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보관해놓는 금고와도 같습니다. 자신이 벌였던 일들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 않다면 과거를 잊으면 그만이겠지만, 과거가 옛적부터 계신 이 앞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손과 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절망한 현대인은, 올바른 실천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과 실천 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어차피 져야 하는 책임이라면, 지금 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진다면 복이지만, 최후의 심판대에서 지려고 한다면 저주가 될테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스토커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거부감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을 이용해먹거나 뒤틀린 욕망을 채우려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분이심을 안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의 존재가 오히려 안심의 근거가 됩니다. 자신의 가게를 지키기 위해 CCTV를 설치하는 것은, 적어도 자기 자신만은 믿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하나님은 변덕심한 나보다 더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이 심판에는 유명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옛 창조세계에서 가지고 있던 지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이와 작은 이가 본문에 기록된 것은, 아마 크고 작음에 대해 많이 신경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책에 기록된 각자의 삶을 물으실 것입니다. 공개적인 부분이든, 비공개적인 부분이든 하나님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해서 공정한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이들이 그 책에 쓰인 것으로부터 그들의 일들에 따라 판결(심판)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 바다로(안에) 죽은 이들을 주었고, 그리고 죽음과 하데스는 그들 안에서 죽었던 이들을 주었고, 그들의 일들에 따라 각각은 판결받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미 죽었던 이들도 이 판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같은 기준, 그들이 행했던 것으로 판결을 받습니다. 악의 진원지였던 바다마저도 그 심판 앞에 바다 안에서 죽었던 이들을 토해냅니다. 심지어 죽음과 망자의 영역인 하데스조차 얄짤 없습니다. 거기는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그 하데스는 그 불의 못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이것이 그 두번째 죽음입니다, 바로 그 불의 못이. 그리고 만일 누군가 그 삶의 책에서 기록된 이로 발견되지 못한다면, 그는 그 불의 못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내어놓은 죽음과 망자의 영역은 이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 사탄이 악용하던 임시법 마저도 폐지될 때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불의 못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번째 죽음이라 말합니다. 이 두번째 죽음의 대상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죽습니다. 그리고 그 두번째 죽음과 함께 하데스, 사탄, 거짓 예언자들, 짐승들은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호흡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죽은 이들이었던 이 3인방은 그들의 소원대로 됩니다. 죽음을 추구했던 이들이 죽음과 함께 죽습니다.


로마서 2:7,8
사람이 참을성 있게 선을 행하므로,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구할 때, 한 분은 그들에게 '오는 시대의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편을 나누고, 진리를 따르지 않으며,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두번째 죽음을 맞게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삶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20:7~15


  그리고 그 천년이 이뤄지면 반드시 사탄은 그의 갇힘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올 것입니다, 땅의 네 모서리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 그들을 그 전쟁으로 함께 이끌어, 그들을 그릇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수는 그 바다의 모래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의 넓이(만큼)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이들의 진, 그 사랑받는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불이 그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소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릇되게 하는 고발자는 그 불과 유황의 연못으로 던져졌습니다, 거기에서 짐승도 거짓예언자도 낮밤으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빛나는 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거기 계신 그의 얼굴로부터 땅과 하늘이 달아났고, 그것들을 위한 '곳(토포스)'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죽은 이들, 큰 이들, 작은 이들, 그 왕좌 앞에 서있었고, 책들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작은 책이 열렸는데, 그것은 삶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이들이 그 책에 쓰인 것으로부터 그들의 일들에 따라 판결(심판)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 바다로(안에) 죽은 이들을 주었고, 그리고 죽음과 하데스는 그들 안에서 죽었던 이들을 주었고, 그들의 일들에 따라 각각은 판결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그 하데스는 그 불의 못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이것이 그 두번째 죽음입니다, 바로 그 불의 못이. 그리고 만일 누군가 그 삶의 책에서 기록된 이로 발견되지 못한다면, 그는 그 불의 못으로 던져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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