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우리는 이제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에 들어섰습니다. 이 장을 딱히 '천년왕국'이라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인유들이 여러 교차점을 만들며 지나가고, 당시 요한이 겪었던 삶의 정황을 복잡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 책을, 어느 한 단어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진화론과의 논쟁에만 열을 올리다가 정작 <창세기>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하듯,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19장에서는 일곱 머리 열 뿔의 짐승이 파멸되었습니다. '짐승의 파멸'이라면, 우리는 단연 다니엘 7장을 떠올려야 합니다. 다니엘 7장에서 짐승이 파멸되고, 인자가 나타나, 왕좌에 앉으신 옛적부터 계신 분께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상속받는 장면(주기도문의 끝부분이기도 합니다.)은 A.D.1세기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저 짐승이 누구인지'가 예언 해석의 핵심이었고, '저 짐승이 어떻게 파멸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이스라엘 민족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다니엘 7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A.

  동서남북 사방에 하늘로부터 큰 바람이 불어옵니다.

  바다에서는 네 마리의 짐승이 올라옵니다. 끔찍한 생김새의 짐승들, 그 중에서도 네 번째 짐승은 머리에 열 개의 뿔을 달고 있는데, 이 뿔들은 제국에서 나타나는 왕들을 가리킵니다. 이 왕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도 마저도 바꾸어놓으려고 합니다. 


B.

  그러나 그들에 대한 심판이 벌어집니다. 비밀스럽게, 사람의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변화. 그렇게 타락한 이들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존재 자체가 짐승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새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은, 묵은 것이 사라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왕들은 이에 불복하여 성도들을 괴롭히고, 하나님께도 맞서려고 합니다.


C.

  성도들을 통해 시작되었던 심판이, 이제 눈 앞에 드러난 현실이 되었습니다. 왕좌들이 놓이고, 그 왕좌들 중에는 "옛적부터 계신 분"의 왕좌도 놓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왕좌는 그 모습을 감추지 않습니다. 불길이 강물처럼 그 왕좌에서 흘러나오고, 그 왕좌 곁에는 수천 수만의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 앞에는 책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D.

  그리고 심판은 순식간에 벌어집니다. 교만한 말을 내뱉던 넷째 짐승은 금새 시체가 되어버렸고, 불의 연못으로 던져졌습니다. 남은 세 짐승들은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만은 이상하게도 보존되었습니다.


E.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이는 모든 권세와 나라와 영광을 이양받고, 모든 백성과 나라와 방언은 그이의 나라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성도들이 나라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이 A~E 내용들이 이어지는 계시록의 주요 주제가 됩니다. [각주:1]


요한계시록 20:1~6


그리고 나는 그 하늘로부터 걸어내려오는 천사를 보았는데, 그는 그 아비소스의 열쇠와 큰 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 사탄은 사람의 삶 자체를 비겁하고 더러운 것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고소 고발 해왔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초기 텍스트라고 알려진 욥기에도 사탄의 그러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사탄은 천상회의에 참여하여 욥이란 사람의 의로움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다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사탄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삶에서 온전함을 찾아보기란 어렵고, 에클레시아 안이든 밖이든 위선, 거짓, 폭력, 불의, 음란들은 늘 사람과 직접적이든 간적접이든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첫 사람 이후 인류를 압박해왔던 그 힘은, 인류 전체를 억누릅니다. 그래서 선(善)을 행하고 굽은 '올(義)'의 척추를 곧게 세우는 게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강력한 용, 고발자이며 사탄인 태초의 뱀"이 굴복당한적이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답할 것이 없다면, 당신은 요한계시록 20장을 읽어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진리'는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서만 구현되고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사탄에 대한 이김'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 사건과 무관한 진리는 허위입니다. 사람과 무관한 것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할 수 있을리 없습니다. 만일 외계인이 나타나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역사, 사건과 무관한 것을 진리인양 사람에게 적용하려 한다면, 인류는 그것을 폭력이라 부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악은 패배했는가? 2) 그것이 사변이 아닌, 역사의 지평선 위에 사건으로 드러난 것인가? 


  저는 '악이 인류 역사 위에서 패배한 그 사랑의 사건'을 고백합니다. 이 사건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악하면 악해질수록, 그 악을 정복한 충격적인 사람과 사건은 더욱 더 부각됩니다. 악에 조금도 물들지 않았던 한 사람이 사탄을 무력하게 짓눌렀던 역사의 현장은, 믿는다고 말하던, 그렇지 않다고 말하던지 부인할 수 없는 실제 사건입니다.


골로새서 2:14b~15

하나님께서는 빚문서를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입니다. 십자가로 사탄은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탄의 목적, 사탄의 방식, 사탄의 세력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무 죄 없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그것으로는 사람을 사람답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골고다 언덕 위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한 사람이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이 방법으로 태초의 뱀을 이기신 그이를 하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신 이는, 자신을 500여명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셨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기생해서 자신의 몸을 용으로 불린 뱀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그이를 붙잡기 위해 하늘로 추격했습니다.(아마도 뱀은 그이가 하늘에 오르면, 자신이 하늘에서 방출될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부터 나타난 천사'와 그의 군대 의해 패배했고, 다시는 하늘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천사가 바로 그 사탄을 땅으로 던저버린 천사, 미카엘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용, 고발자이며 사탄인 시작부터 있던 뱀을 굴복시켰고, 그를 천년동안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아비소스로 던져 잠그고 그 위를 인으로 봉했습니다, 그가 천년이 이뤄질 때까지 더이상 민족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이 일 후에 그를 잠시 풀어줘야 합니다.


  이렇게 전체가 한 문장입니다. 여러 내용들이 압축되어 있음에도 요한은 당연히 이 내용에 대해서 알 것이라 가정하는듯 단숨에 써내려갑니다. 바로 승천에 대한 내용입니다. 계시록 12장에 보여주듯, 이 승천 사건 이후, 용은 땅으로 던져집니다. 계시록 20장은 이것을 '아비소스에 갇혔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12:9,10

그리고 큰 용은 던져졌습니다, 시작부터 있었던 뱀, 둘로 찢어놓는 자(디아볼로스) 곧 사탄이라 불리는, 사람사는 전체를 속이는 자가 땅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말씀하기를,

"이제 구원과 힘과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메시아의 출애굽이 되었다,
즉 우리 가족들의 고발자, 낮과 밤동안 우리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고발하던 자가 던져졌다.


  사탄이 갇혔습니다. 하늘은 땅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은 땅에 갇혔음을 뜻합니다. 즉 하늘의 하나님과 단절된채 땅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곧 아비소스가 됩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차원'을 가리키는데, 사탄은 하나님의 차원이 아닌 인간적 차원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늘의 천상 회의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우리에 대한 사탄의 고소와 고발은 더 이상 하나님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욥기에서와는 달리).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의 차원, 곧 땅은 사탄과 인간이 부딪치는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아비소스는 하나님의 차원과 단절되어 땅의 차원에 갇혀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생각을 하면, 하나님 없이 땅에 사는 이들은 아비소스에 갇힌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아비소스의 반대는 '성전'입니다. 성전도 땅에 있지만,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사십니다. 그래서 땅에 갇힌 사탄과 달리, 성전들은 땅에 살면서도 땅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거룩한 호흡으로 하늘의 차원에 잇대어 있어 사탄보다 넓은 차원을 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 예수께서 보내주시는 거룩한 숨님으로 땅의 차원보다 높은 하늘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실천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의 갈증을 사탄의 패러디로 채우며, 문제 없는듯(자신을 '여왕'이라 칭하는 창녀와 같이) 살지만, 그들 역시 아비소스에 살고 있는 것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로마서 1:18장 이후가 그러한 사람의 참상을 보여줍니다). 다만 사탄과 차이가 있다면, 아비소스로부터 나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올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탄에게는 그러할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열쇠에 관해서는 계시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앞에서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1:18), "다윗의 열쇠"(3:7), "아비소스의 열쇠"(9:1)가 언급되었습니다. 앞의 둘은 예수께서, 그리고 9장의 "아비소스의 열쇠"는 천사의 손에 주어졌습니다. 어찌되었든 본문의 '열쇠'와 '쇠사슬'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면, '사탄을 제압했고 가두어놓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그이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마가복음 3:26~29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갈라지면, 버틸 수 없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사탄이 스스로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 요한계시록 19장의 바벨론 멸망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을 묶어 그의 세간을 털어간다"는 말씀을 승천으로 사탄을 아비소스에 가두어 사람들을 출애굽시키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 모독 죄'는, 성령을 거절하여 사탄과 더불어 하나님이 배제된 땅의 차원에 갇혀 있겠다는 능동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천년"입니다. 이것을 실재 기간으로 보는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이 있습니다만, 계시록은 숫자를 줄곧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 천년 역시 상징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44,000에서도 1000은 '많음'을 나타내는 숫자였습니다. 이렇게 1000을 실제 숫자로 읽지 않는 방식을 '무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천년이 없다는 의미로 오해해선 안되겠습니다. 일단 이 '천년'이 메시아 예수의 승천으로 시작된 사탄의 무력함을 가져오는 시절' 임을 기억해둡시다. 천년은 뒤에서도 다시 나오니까, 일단은 다음 구절로 넘어갑시다.


  그리고 나는 왕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들 위에 앉았고, 심판(의 권한)이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들은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수당한 이들의 호흡들 (입니다). 그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 그리고 짐승의 아이콘을 (경배하지 않은), 그들의 미간과 손 위에 표를 취하지 않은 이들.


  요한은 또다른 환상을 봅니다. '왕좌들'입니다. 다니엘 7장에 나온 바로 그 왕좌들일 것입니다.


다니엘 7:9, 10

내가 바라보니, 왕좌들이 놓이고, 한 왕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고, 옥좌의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불길이 강물처럼 그에게서 흘러 나왔다. 수종 드는 사람이 수천이요, 모시고 서 있는 사람이 수만이었다. 심판이 시작되는데, 책들이 펴져 있었다.


  다니엘에서도 왕좌들이 놓이고, 계시록에서도 왕좌들이 놓였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다니엘의 환상을 더욱 자세히 풀어주는듯 합니다. 다니엘에서는 그저 "왕좌들이 놓이고"였지만, 계시록은 그 왕좌들에 누가 앉았는지, 왜 앉았는지, 이후 어찌 될지를 더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이어지는 계시록 내용은 다니엘 7장에 언급된 '불', '책'의 심상들을 차례대로 불러옵니다.) 왕좌들에 앉은 이들의 정체를 확인합시다. 문장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심판(의 권한)이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즉 심판은 하나님 한 분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왕좌에 앉은 이들이 함께 심판합니다. 심판은 바로잡음입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바로 잡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담을 창조하시면서, 함께 창조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목적을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심판은 함께 다스리기 전에, 이전에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새로운 일의 '시작'에 벌어지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왕권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함께 심판하고 이 땅을 바로잡은 일이 역사 위에 벌어진 바 있는가?" 물론입니다. 이미 2000년전부터 메시아의 공동체가 하늘에 앉아 그 심판의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이 '심판'의 개념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이뤄지며, 미래에는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즉 선은 악을 끝없이 압박하고 있고, 하나님의 바로잡음은 이미 시작된지 오래입니다. 이제 이 바로잡음이 완성될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자신의 비뚤어짐을 곧게 세우며, 이 땅의 비뚤어진 일들을 옳게 세우는 이들이 바로 이 땅을 심판하는 이들입니다. 계시록 본문은 그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이들은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수당한 이들의 호흡들."


  머리가 잘린 이들이 왕좌에 앉아 이 땅을 심판하는 그림을 떠올리니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당시 예수를 따르다가 로마 황제 반역죄로 몰려 사형에 처하게 되면, 참수형이 아니라 십자가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죽을 것이 결정된 이들은 십자가형보다는 고통이 덜한 참수형을 선호했을 것입니다. 만일 요한이 순교자들을 언급하기 위해서 "참수당한 이들"이라는 표현을 썼다면, 차라리 십자가형이라 쓰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참수형'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은, 이 단어 역시 훨씬 보편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은유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자신의 머리를 내어주고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을 심판하는 이들'이, '메시아를 머리로 두고 살아가는 그이의 몸된 공동체'의 이미지와 잘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한다면, 뒤에 이어지는 "그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 그리고 짐승의 아이콘을 (경배하지 않은), 그들의 미간과 손 위에 표를 취하지 않은 이들."이라는 표현들은 참수당한 이들과 다른 그룹이 아닌, 같은 그룹에 대한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참수당한 이들 = 그 짐승과 그 짐승의 아이콘을 경배하지 않은 이들 = 미간과 손 위에 표를 취하지 않은 이들. 이들이 왕좌에 앉았고, 하나님과 함께 심판하고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메시아와 함께 천년을. 그 죽은이들의 나머지들은 살지 않았습니다, 그 천년이 이뤄지기까지. 이것이 첫 부활. 복되고 거룩합니다, 이 첫 부활에 메로스를 가진 이는.


  그들은 살았습니다. 살았다는 말은 그들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부활을 첫째와 둘째로 나눌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첫째 부활, 살았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부활은 "살아서 하나님의 왕권에 동참함"입니다. 그리고 그이의 왕권에 동참한 이들에게는 다스리기 위한 지혜가 필요합니다(솔로몬처럼). 그들에게 지혜의 영이신 거룩한 숨님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이 땅을 바르게 심판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산 삶입니다. 참말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숨으로 연결된 '성전'들은 둘째 부활, 즉 새로운 몸으로 일으켜질 것입니다. 성전을 깨끗게 하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이었으므로, 메시아는 틀림없이 그 성전들을 자신의 몸과 동일한 상태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성령의 구름기둥을 따르는 사람은 그 따름이 죽음의 강 앞에서 멈춰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강은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이 마르기 전에 필요한 것이 따름입니다. 구름기둥을 따르지 않고서야, 말라버린 요단을 만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이는, 반드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천년'으로 돌아옵니다. 계시록은 참수당한 이들이 왕좌에 앉아 하나님과 함꼐 이 땅을 다스리는 기간으로서 '천년'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 천년동안은 사탄은 묶이고,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천년을 기점으로 정반대의 묘사가 참수당한 이들에게 이뤄집니다. 사탄이 묶이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천년은, 참수자들이 살아서 왕으로서 메시아의 왕권에 참여하는 기간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 천년을 "지상의 천 년이 아니라, 특정 기간 동안 성립되는 하늘의 실재"라고 말했습니다. 천년을 지상의 숫자로 이해하면, 이것을 어느 위치에 놓을지가 고민이 됩니다. 재림 후에 놓자는 전천년설, 재림 전에 놓자는 후천년설의 논쟁이 그래서 벌어집니다. 무천년이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지만, 사실 천년의 의미가 어려워서 무천년으로 도망간 것이라면,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채로 남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의 말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을 만드는 인간의 숫자 개념을 무너뜨립니다. 따라서 저 천년은 인간의 해(年)를 넘어선, 그럼에도 모든 인간의 시간에 간섭하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이라 여겨집니다. 분명한 것은 이 하나님의 시간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입니다. 2) 사탄은 묶여서 그 무력함을 드러내며, 3) 메시아를 머리로 둔 공동체는 왕좌들에 앉아 다스리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이 천년은 사탄이 아비소스에 갇힌 1) 승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단서를 가지고, 이 천년을 우리가 그간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쳐 있는 낀시대"와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고 이 낀시대 자체가 사탄이 힘을 못쓰고, 에클레시아는 무조건 잘 나가는 기간이 아니라는 사실도 압니다. 이 천년은 국방부 시계같은 크로노스가 아닙니다. 에클레시아에게 사탄을 이기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카이로스입니다.


그들에게 둘째 사망은 엑수시아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과 메시아의 제사장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와 함께 그 천년을 다스립니다. 


  메시아의 이김, 하늘에서 굳건히 확립된 왕권, 땅에 갇힌 사탄, 그 사탄을 극복하는 올바른 판단. 에클레시아. 이 모든 주제들을 아우르는 단어가 출애굽기 19장 인유로부터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19:5,6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며 말씀하셨던 이 말씀이, 오늘 올바른 판단을 하는 에클레시아에게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참수당한 이들을 낳기 위해서 그 긴 역사의 산고를 기다리고 견디셨고, 마침내 이들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기를 참 생각과 참 실천을 얻었습니다. 참과 함께!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아, '오늘'! 계시록 20장을 통해 보는 오늘의 의미는 새롭기만 합니다. 오늘이 바로 천년입니다!


요한계시록 20:1~6

  그리고 나는 그 하늘로부터 걸어내려오는 천사를 보았는데, 그는 그 아비소스의 열쇠와 큰 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용, 고발자이며 사탄인 시작부터 있던 뱀을 굴복시켰고, 그를 천년동안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아비소스로 던져 잠그고 그 위를 인으로 봉했습니다, 그가 천년이 이뤄질 때까지 더이상 민족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이 일 후에 그를 잠시 풀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왕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들 위에 앉았고, 심판(의 권한)이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들은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수당한 이들의 호흡들 (입니다). 그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 그리고 짐승의 아이콘을 (경배하지 않은), 그들의 미간과 손 위에 표를 취하지 않은 이들. 그리고 (그들은) 살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메시아와 함께 천년을. 그 죽은이들의 나머지들은 살지 않았습니다, 그 천년이 이뤄지기까지. 이것이 첫 부활. 복되고 거룩합니다, 이 첫 부활에 메로스를 가진 이는. 그들에게 둘째 사망은 엑수시아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과 메시아의 제사장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와 함께 그 천년을 다스립니다.


  1. 요한은 이 다니엘 7장의 구조를 염두해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7장에서는 하늘의 천사들이 '땅 위의 네 바람'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붙든 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찍기 위해 잠시 그렇게 한 것일 뿐, 이 네 바람은 타락한 인간 역사 안에서 줄곧 매섭게 불어왔습니다. 다니엘도 동서남북의 네 바람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바람이 잠시 멈추었을 때는 성도가 인침받을 때이고, 성도가 인침을 받는다는 건, 이제 짐승을 보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7장의 나머지 내용은 '144,000의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 부분이 다니엘 7장의 하나님을 보좌하는 수천 수만에 대응합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이루셨고 이루실 일을 찬양하고, 이 환상 이후 마침내 일곱번째 실을 떼어 냅니다. 그리고 금향로에는 불이 담겨지고, 그 불은 땅 위에 던져집니다. 다니엘 7장에서도 하나님의 왕좌를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나온다"고 묘사했고, 그 불은 짐승의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8장의 나팔 심판으로 넘어갑니다. 나팔은 전투를 알리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첫째 나팔부터 넷째 나팔까지 모두 심판은 '불'로 이뤄집니다. 나팔 심판 안에는 하나님께 맞서는 군대들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9장에는 아비소스로부터 하나님께 맞서는 메뚜기 군대와 유프라테스 강에 묶였던 네 천사들과 2억의 기병들이 등장합니다. 다니엘의 예언대로라면, 이 군대들이 성도들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그 기간은 한 때, 두 때, 반때. 그러나 이들은 법과 때를 바꿔서라도 자신들의 기한을 늘리려는 짐승의 수하들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자신들의 대장인 짐승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자멸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을, 우리는 계시록 19장에서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10장에서 '책'이 등장합니다. 강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요한에게 '작은 책'을 먹도록 합니다. 이 책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심판을 위한 책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11장에서 두 증인이 등장하고, 그 두증인에게는 "그들이 거룩한 도시를 42개월동안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주어집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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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8:9~24  (1) 201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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