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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1~10

  장면이 바뀌고 나는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말하는 많은 무리의 큰 소리를,

"할렐루야!

구원과 뚜렷함과 힘이 우리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이의 심판들이 참되고 옳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포르네이아로 그 땅을 파괴했던 큰 도시를 심판하셨기 때문이고,

(그이가) 그이의 종들의 피를 그녀의 손으로부터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치열하지 않았습니다. "되었다"에서 "되었다"로 마무리되는 그 한 시간만에, 누가 이겼는지 가 확실해졌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서 말하고 있는 많은 무리들을 이미 5장에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무너지자 다음과 같이 찬양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라는 믿지 않는 이도 들어보았을 법한 흔한 말이지만, 정작 신약성경에서는 계시록에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이 환희에 찬 명령어가 어떠한 맥락에서 쓰였는지를 이 유일한 신약본문을 통해 확인해봅시다. '할렐루야'를 전후로, 앞에는 포르네이아로 이 땅을 더럽게 한 바벨론의 멸망, 그리고 이 할렐루야 뒤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뚜렷함과 힘이 나옵니다. 구원, 영광(뚜렷함), 능력(힘)은 그 뜻이 모호하여,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그 맥락이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뚜렷함과 힘은 바벨론의 멸망의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구원'은 바벨론의 패망과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 씨알이 구출된 사건을 의미하고, '영광'은 이를 통해 패러디가 아닌 근원이신 한 분이 뚜렷하게 드러났음을 뜻하며, 힘은 크게는 바벨론을 자멸하신 능력을, 작게는 바벨론에 의해 씨알들이 망하지 않고 참을 이어나게끔 하셨던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심판'입니다. 요새는 '요한계시록'과 '심판'이라는 말들을 예수 공동체에서보다 길거리에서 더 흔하게 들을 수 있고 정치나 영화나 심판의 개념을 더 애용합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반대편을 정죄할 때 저 단어를 쓰고, 영화에서는 지구가 멸망할 때 저 단어를 씁니다. 그 결과 '심판'을 죄다 망하는 것,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듣기 싫은 단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할렐루야가 터져나오는 소식입니다. 세상이 문제 투성이로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만큼 때가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의 새로워질 것이고, 바로잡힐 것이라는 소식이 있다면, 그 소식은 너무 엄청나서 어찌 반응할지 난감해하거나, 허무맹랑하다 여기고 고개를 흔들만한 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잡히는 심판의 소식은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그래서 심판을 '바로잡음'이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마치 블랙홀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물질과 시공의 소멸로도 볼 수 있고, 물질의 생성으로도 볼 수 있듯이, 이 좋은 심판의 소식을 보는 시각이 두 패로 나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뻐하는 쪽에게 심판은 마침내 정의가 이겼다는 소식이고, 더이상 사람을 괴롭혔던 짐승의 권력이 무너졌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쪽은 그 심판의 대상인 경우일 것입니다. 암행어사의 출두 소식을 싫어하는 건, 탐관오리 원님 뿐입니다. 그동안 원님에게 수탈당했던, 혹은 죽임당했던 이들은 원님의 처벌만큼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뚜렷함, 그리고 힘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할렐루야'입니다. 역사 전체를 짊어진 말이면서도, 두 어깨가 가벼운 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들이 말하길,

    "할렐루야!

그리고 그녀의 연기가 올라간다,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오늘 본문에서 할렐루야는 총 네 번 나옵니다. 그 중 두 번쨰 할렐루야는 그녀가 태워짐을 보며 터져나온 탄성입니다.

  이 구절을 보며, 중세의 마녀 사냥 당시 이 구절들을 차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만일 어떤 지역에서 성경의 권위를 등에 업고 어떤 여자를 계시록의 음녀로 규정하고선 그 생명을 앗아갔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패러디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계시록은 어느 개인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도시', '세력'을 음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중세까지 넘어가지 않더라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무고한 희생을 끊임없이 낳고 있다면,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심판받지 않지 않는 길은,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심판하는 길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1:31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심판한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심판한다는 말은 자신이 전체에 속한 개인으로서, 이 전체의 부패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해 인정했다면, 이후에는 스스로가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은 이 말일 것입니다.


  타락한 도시 바벨론은 분명히 태워질 것입니다. 이미 세상 전체를 태울 불꽃이 여기 저기 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바벨론이 태워진 자리는, 다시금 생명이 자라날 수 없는 폐허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다루진 않았지만, 우리는 바벨론이 망한 자리에 새로운 도시가 나타나게 될 것을 몇 주 뒤에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음녀를 태우는 불은 정화의 불, 도시를 바로 잡아 새롭게 하는 불, 곧 심판의 불입니다. 적어도 이 바벨론을 태우는 연기를 보며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이들은, 음녀와 정반대의 방향에서 올바름을 세워나가려는 사람들일 것이요, 도시가 새로워질 것을 갈망하며 살아갔던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엎드렸고, 그리고 왕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말하길,

"아멘, 할렐루야!"


  익숙한 친구들이 등장했습니다. 5장에서 보았던 이십사 장로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네 생물입니다. 


이사야 34:10~17


  그 불이 밤낮으로 꺼지지 않고 타서, 그 연기가 끊임없이 치솟으며, 에돔은 영원토록 황폐하여, 영원히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펠리컨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겠고, 부엉이까마귀가 거기에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주님께서 에돔을 '혼돈의 줄'과 '황무의 추'로 재실 터이니, 에돔을 창조 전처럼 황무하게 하실 것이다. 거기에는, 나라를 세울 통치자들이 없을 것이며,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도 없을 것이다. 궁궐이 있던 곳마다 가시나무가 돋아나고, 그 요새에는 쐐기풀과 엉겅퀴만 무성할 것이다. 그 곳은 승냥이 떼의 굴이 되고, 타조들의 집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들짐승들이 이리 떼와 만나고, 숫염소가 소리를 내어 서로를 찾을 것이다. 밤짐승이 거기에서 머물러 쉴 곳을 찾을 것이다. 부엉이가 집을 만들어 거기에 깃들고, 그 알을 낳아 까서, 제 몸으로 그늘을 만들어 덮을 것이다. 솔개들도 제 짝과 함께 그리로 모일 것이다. 주님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동물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님의 영이 친히 그 동물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친히 그 동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시고, 손수 줄을 그어서 그렇게 나누어 주실 것이니, 그 동물들이 영원히 그 땅을 차지할 것이며, 세세토록 거기에서 살 것이다.


  에돔에게는 이것은 자신들을 멸망시키는 블랙홀 같은 메시지이지만, 저에게는 새로운 시절을 뿜어내는 화이트홀처럼 보입니다. 이 본문이 이렇게 흥미로울줄이야! 우상숭배적 세력이 무너진 자리에 이제는 새로운 시절이 도래합니다. 일단은 아나키즘입니다. 어떤 인간적 권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각양 동물들이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짝과 함께 그 도시의 터에서 쉼을 얻습니다. 심지어 펠리컨도 있습니다!(표준새번역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당아새'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토하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래서 먹이를 먹어 저장했다가 다시금 꺼내놓는 새니까 '펠리컨'으로 번역했나봅니다. 아, 여기에 자세한 내용이 있네요.) 이는 이 본문은 인간의 바벨 프로젝트와 하나님의 에덴 프로젝트를 극명하게 대조시킵니다. 성경에서 '세세토록'이라는 말이 나오면 꼭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바벨 프로젝트가 자멸한 자리에, 하나님의 에덴 프로젝트가 세세토록 이뤄질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 생물이 하늘에서 이 망한 바벨론으로 내려오는 장면이 이해가 됩니다. 우상숭배적 인간 권력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금 모든 피조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십 사 장로 역시, 군림해서 다스리는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통치자와 지도자가 패배한 자리에, 그들이 다시금 "통치자"로 혹은 "지도자"로 왔을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창세기 1:28에 선언하신 '다스림'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이 땅을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스림의 방식은 우리가 본 적없는,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정치권력들에게서 배울 수 없는 새로운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왕좌로부터 소리가 왔고 말하길,

"찬양하라 우리 하나님께,

모든 그이의 종들아,

그이를 두려워하는 이들아,

큰자들과 작은자들아!"


  총 네 번의 할렐루야 중에서 두 번은 천상적 존재들에 의해 고백되었습니다. 하늘의 셀 수 없는 무리들과 이십 사 장로, 네 생물. 그런데 다시금 그들의 출처인 하늘에서 찬양의 명(命)이 들립니다. 그 명령은 땅에 있는 이들에게 이 할렐루야의 찬양을 확장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종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큰 자도 있고, 작은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이 크고 작은 것은 주인의 임명에 따른 것이니, 주인을 믿는다면 자신의 직분에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누가복음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그리고 나는 들었습니다, 많은 무리의 소리를, 그리고 많은 물들의 소리를, 그리고 강한 천둥들의 소리를,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 왕이 되셨으니, 

우리 기뻐합시다, 기뻐뜁시다,

우리 그이에게 영광을 드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이 왔고,

그이의 신부가 자신을 준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주어졌습니다, 깨끗한 빛나는 세마포를 입는 것이."

(즉 세마포는 거룩한 이들의 의로운 것들입니다.)


  하늘의 많은 무리들은 이미 19장 들어오면서 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찬양하는 이들의 목록에 "많은 물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앞에서 '물들'은 바벨론이 깔고 앉아 기생하고 있었던 모든 민족들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들'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오라"(18:4)는 말을 듣고 바벨론으로부터 출애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음녀의 오물로 가득한 더러운 물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구원과 뚜렷과 힘을 찬양하는 깨끗한 물이 되었습니다. 이 "많은 물 소리"를 에스겔은 네 생물의 날개 소리같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허다한 사람들, 땅 위의 깨끗해진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천둥 소리가 어우러졌습니다. 그 소리들이 하나되어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할렐루야의 이유를 다시금 새롭게 표현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 왕이 되셨으니!"

 

이사야 52:7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스가랴 14:9

주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섬기고, 오직 그분의 이름 하나만으로 간구할 것이다. 


  이 땅을 짓밟던 짐승들은 심판받고, 이제 에덴 프로젝트를 이 창조세계 전체에 이루실 하나님께서 이제 다스리십니다. 그이를 막아서던 세력들은 오히려 그이를 따르는 이들을 강하게 만들어준채 파멸당했습니다. 이제 인간 통치자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나타셨고, 이제 그와 함께 왕좌에 앉아 다스릴 이들도 등장합니다. 이때 '결혼'의 모티브가 사용됩니다.


  왕은 신랑으로 나타나셨고, 이제 그와 함께 이 땅을 다스릴 이들이 신부로서 나타났습니다. 오직 이 날을 위해서 왕은 신부를 위해서 "깨끗하고 빛나는 세마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는 그 옷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시켰습니다. 여기에는 능동과 수동의 구분, 주체와 객체의 구분,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 없습니다. 아내는 이 일을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억지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신을 준비시키고 있는 예비 신부를 신랑은 줄곧 돌봤습니다. 이 신부에게 신랑의 청혼과 준비는 동시에 언제나 벌어졌습니다. 마치 우리 옛말 '깃거이'와 같습니다. 기꺼이, 기쁘게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준비된 옷은 문자 그대로 '옷'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옷'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내 몸이 표현하는 모든 것이 나의 옷입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의로운 행위'로 번역했습니다. 즉 신부의 준비는, 이 몸을 통해서 하게 되는 모든 몸짓이 곧 준비입니다. 특정 선행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치 남편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정결히 하듯, 자신의 몸 전체를 신랑께 드리기 위해 사는 것이, 신부될 사람의 의로운 삶입니다. 따라서 옷은 삶입니다. 성경에 옷을 언급한 여러 구절이 있지만, 생각나는 것은 단연 요셉입니다. 요셉을 해하려는 이들은 끊임없이 그의 옷을 벗겨냅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요셉은 옷이 벗겨지고 고생하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을 지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영광스러운 옷을 입게 되었고, 이제 가장 좋은 옷을 입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야 61:10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이,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이, 주님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의의 겉옷으로 둘러 주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준비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 내용을 관통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을 맡기셨듯이, 왕이신 예수와 정결하게 준비된 에클레시아는, 이제 바벨론이 패망한 이 창조세계를 새롭게 가꾸어나갈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잎사귀로 만든 옷은 더이상 불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죽인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을 통해 창조된 가장 좋은 옷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이 옷을 입은 이 신혼 부부는 에덴 프로젝트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시편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합니다.

    "기록하십시오. 복된이들은 어린양의 혼인의 식사로 부름받은 이들(이라고)."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아닙니다.(그 이유는 아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분명합니다. 이 피로연에 초대되는 것이 '복'입니다.(그리고 이 식사 자리에는 그에 걸맞는 옷이 필요합니다. 옷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2:11)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합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입니다."


  나는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합니다.

"자, 그러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과 함께 섬기는 종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증언을 가진 당신의 형제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십시오. 왜냐하면 예수의 증언이 예언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앞에 했던 말입니다. 요한은 이 말을 듣자, 자신에게 말을 건내주는 이에게 엎드려 경배합니다. 톰 라이트의 말대로 "메신저와 메시지를 혼동"하는 일이 요한에게도 벌어집니다. 경배는 말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지,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가 취할 것이 아닙니다. 요한에게 말씀을 전달해준 이는 자신 역시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의 증언을 가진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이 충격적입니다. "예수의 증언"이라고 할 때, '의'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증언일수도 있고, 예수에 대한 증언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라는 어휘가 언급되지 않아도 예수께 속한 증언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증언들이 예언의 숨결이라고 말합니다. 숨결, 성경에서 이 '숨'은 성령을 가리키면서도, 하나님과 그분께서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시는 자신의 호흡을 뜻합니다. 그 호흡이 이 세상에 사람을 통해 전달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숨결을 전하는 매개가 됩니다.


  따라서 사람은 경배를 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호흡을 전달하는 매개입니다. 그 호흡은 곧 예수에 관한 증언입니다. 지금 요한과 함께 하는 이들은 마치 아이를 낳으려는 여인처럼 숨을 쉬느라 힘이 듭니다. 단지 예수의 증언을 할 뿐인데, 이 힘차게 숨 쉬려는 이들을 악한 권세는 가만 두지 않습니다. 짓눌러 숨통을 끊어놓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 호흡은 살몸의 숨통을 끊어놓는다고 끊어지는 숨줄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원한 숨입니다.


  당신이 숨을 쉬고 있다면, 하나님께 경배하세요. 당신이 하나님과 이 창조세계 사이의 매개입니다. 당신이 증언하는 예수의 소식 때문에, 이 땅이 참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숨줄 하나만 지켜나가세요.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19:1~10

  장면이 바뀌고 나는 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말하는 많은 무리의 큰 소리를,

"할렐루야!

구원과 뚜렷함과 힘이 우리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이의 심판들이 참되고 옳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포르네이아로 그 땅을 파괴했던 큰 도시를 심판하셨기 때문이고,

(그이가) 그이의 종들의 피를 그녀의 손으로부터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들이 말하길,

    "할렐루야!

그리고 그녀의 연기가 올라간다,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내려왔고, 그리고 왕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말하길,

"아멘, 할렐루야!"


  그리고 그 왕좌로부터 소리가 왔고 말하길,

"찬양하라 우리 하나님께,

모든 그이의 종들아,

그이를 두려워하는 이들아,

큰자들과 작은자들아!"


  그리고 나는 들었습니다, 많은 무리의 소리를, 그리고 많은 물들의 소리를, 그리고 강한 천둥들의 소리를,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 왕이 되셨으니, 

우리 기뻐합시다, 기뻐뜁시다,

우리 그이에게 영광을 드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이 왔고,

그이의 신부가 자신을 준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주어졌습니다, 깨끗한 빛나는 세마포를 입는 것이."

(즉 세마포는 거룩한 이들의 의로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합니다.

    "기록하십시오. 복된이들은 어린양의 혼인의 식사로 부름받은 이들(이라고)."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합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입니다."

  나는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합니다.

"자, 그러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과 함께 섬기는 종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증언을 가진 당신의 형제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십시오. 왜냐하면 예수의 증언이 예언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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