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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요한과 함께 '옛적부터 계신 분'의 왕좌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요한이 이 땅에서 보기 어려운 것을 보고 있는 중이라면,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말할 법도 한데 그는 왕좌와 그 주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 왕좌에 앉으신 분에 대한 묘사는 극도로 삼갑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성난 표정이든 인자한 표정이든 인간의 얼굴을 한 누군가를 그려줄 것이라 기대한다면 오산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하나님을 인간 통치자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는듯 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지목하고 있는 인간 통치자란, 당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자행하던 로마 황제일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묵시적 언어로 쓰여진 당대 로마 제국 비판서인 이유들 중 하나를 확인합니다. 왕좌에 앉은 이는 제국 전역에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광고하고 있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 4:6b~11

  그리고 왕좌 가운데와 왕좌 둘레로, 앞뒤로 눈으로 가득한 네 생물이(있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생물은 사자 비슷했고, 두번째 생물은 황소 비슷했고, 셋쩨 생물은 사람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고, 네번째 생물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은, 그들 각각 여섯 날개를 위로 가지고 있고, 둘레와 안에는 눈들로 가득합니다.


  그 왕좌 곁에 있는 네 생물이 등장합니다. 이 네 생물은 이미 에스겔의 환상과 이사야의 환상 속에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먼저 에스겔부터 확인해봅시다.

에스겔 1:1~14

  주님께서 바빌로니아 땅의 그발 강 가에서 부시의 아들인 나 에스겔 제사장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으며, 거기에서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때에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데, 큰 구름이 밀려오고, 불빛이 계속 번쩍이며, 그 구름 둘레에는 광채가 나고, 그 광채 한가운데서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반짝였다. 그러더니 그 광채 한가운데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얼굴이 각각 넷이요, 날개도 각각 넷이었다.  그들의 다리는 모두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의 발바닥과 같고, 광낸 놋과 같이 반짝거렸다.  그 생물의 사면에 달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이 있으며, 네 생물에게는 얼굴과 날개가 있었다. 그들의 날개 끝은 서로 닿아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몸을 돌리지 않고,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그 네 생물의 얼굴 모양은, 제각기, 앞쪽은 사람의 얼굴이요,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요, 뒤쪽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얼굴 모양이었다. 그들의 날개는 위로 펼쳐져 있는데, 두 날개로는 서로 끝을 맞대고 있고, 또 두 날개로는 그들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은 영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때에는,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그들은 몸을 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생물들의 모양은 마치 활활 타는 숯불이나 횃불과 같이 보였다. 그 불은 그 생물들 사이를 오가며 빛을 냈고, 불 속에서는 번개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생물들은 이쪽 저쪽으로 번개처럼 빠르게 달렸다.


  '넷'이라는 숫자는 동서남북 네 방위, 곧 땅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네 생물은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사자, 황소, 인간, 독수리등의 다양한 종(種)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에 나왔던 스물 네 장로는, 역사 속에 있었던 모든 에클레시아를 대표합니다.


  하늘의 문을 열어 두 종류의 천사를 만나는 것은 이미 성막에서 재연된 바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이 되면, 하늘을 상징하는 지성소를 휘장을 열어젖히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언약궤 위에 날개를 맞대고 있는 두 천사가 있습니다. 계시록대로라면, 한 천사는 모든 피조물을, 다른 한 천사는 모든 에클레시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바로 요한이 보고 있는 옛적부터 계신 분의 왕좌입니다.


  생물이 눈으로 가득하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은 그만큼 '하늘'은 '땅'과 다르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인지시켜 줍니다. 그렇다고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이질적인 하늘을 그 존재의 토대로 두고 있습니다.(그렇다면 하늘이 이질적인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보는 현실이 이질적인 것입니까?) 위에 인용한 에스겔 1장의 나머지 부분의 환상 속에서, 그 네 생물을 따라 땅에서 움직이는 '바퀴'가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네 생물은 숨님을 따라 움직이고, 땅에 있는 바퀴는 그 네 생물과 같이 움직입니다. 즉 에스겔의 환상은 하늘과 땅은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을 모른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앞에 나왔던, "땅에 거주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던 모르던 네 생물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땅에 거주하는 이들"이 로마 황제가 세상을 다스리는 왕좌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에 속한 존재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어야 할 에클레시아도 흔들린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계시록은 이 이질적으로 보이는 하늘이, 땅에 드러나고, 마침내 21장에 이르면, 이 이질적인 둘은 서로 하나가 됩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들은 인간 통치자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그 네 생물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멈춤을 갖지 않고 밤과 낮으로 말하길,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주 하나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이,
  계셨고 계시며 오시는 이."


  산 생물의 대표들은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이 세 번 반복되고, 끝에는 삼중 표현이 이어집니다. 이 말하는 방식은 이사야 6장의 천사들과 같습니다.

이사야 6:3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이사야에 "만군의 주님"이라 된 것을, 요한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이(판토크라토르)"라고 썼습니다. 이를 리차드 보컴은 하나님(YHWH)에 대한 표준적인 번역어라고 합니다. 즉 모든 만물들에 대해 실제적인 통제권이 있으신 분임을 뜻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쓰던 표현인데(삼하 5:10, 렘 5:14, 호 12:5, 암 3:13, 4:13) , 이로써 요한은 예언자들의 계보를 잇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들이 뚜렷과 영예와 감사를 그 왕좌 위에 앉으신,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사시는 이께 드릴 때, 스물 네 장로들은 그 왕좌에 앉아 계신 이 앞에 엎드릴 것이고,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할 것이며, 그들의 면류관들을 그 왕좌 앞에 던질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수식들을 뺀다면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네 생물들이 하나님께 뚜렷과 영예와 감사를 돌리자,

2) 스물 네 장로들이 엎드리고, 경배하며 자신들의 면류관을 그 왕좌 앞에 드린다.


  이는 네 생물과 스물 네 장로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보여줍니다. 아담의 타락을 따라 산 생물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그렇게 반역한 생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먼저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부름받음은 바로 이 땅에 산 존재 때문입니다. 산 존재를 위해 베풀고 섬기는 것이 에클레시아의 역할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에클레시아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들은 쉬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이 땅과 대단히 이질적인 장면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피조물 이후에 에클레시아를 상징하는 스물 네 장로들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이 땅의 산 것들과 함께 합니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땅에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가 신적 토대 위에 있음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살게 해야 합니다. 허나 이것은 강요나 제도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새창조로만 이뤄집니다. 스물 네 장로들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합당하십니다, 주 우리 하나님, 뚜렷과 영예와 힘을 받으시기에,
왜냐하면 당신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그 뜻을 통하여 (만물이) 있어왔고,
그리고 (다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산 것으로부터 뚜렷과 영예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자격있으십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하십니다. 첫 문장에 삽입되어 있는 "주 우리 하나님"은 예배 때나 들을 법한 '종교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저 말은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호칭이었습니다.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dominus et deus noster 지배자이며 우리의 하나님)"


  요한은 왜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한 분이신지 그 이유를 들려줍니다. 바로 창조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창조는 과학과 신앙이 격돌하는 창세기 1,2장에 국한된 창조가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는 '창조'라는 말은 훨씬 더 큰 범위입니다. 먼저는 과거에 있었던 창조 사건을 언급합니다(옛창조). 그리고 모든 만물이 유지되고 존재로서 존재하는 현실 역시 창조입니다. 그리고 존재하던 것이 다시 새롭게 존재하게 되는 '새창조'를 말합니다. '옛창조 - 있음 - 새창조'(이렇게 생각하면 옛창조는 새창조를 위한 준비였음을 알게 됩니다). 이 창조를 이루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 분만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그리고 네 생물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 새창조의 결과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산 것이 메시아 안에서 새로이 창조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제한된 목숨으로만 살던 것이 메시아 안에서 새로이 창조되는 것을 기뻐하고, 이를 통해 새창조의 하나님께 경탄합니다.


  앞에서 네 생물의 소리와는 달리, 온 에클레시아를 대표하는 스물 네 장로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합당하시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생각해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창조 세계 전체를 대표하는 네 생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은 오늘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대단히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창조세계 전체는 하나님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예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나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하지 않고 살 수 없고, 그가 예배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모르고 예배하는 것'과 '알고 예배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다니엘 11:38

그 대신에 강한 신을 공경할 것이요 또 그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신에게

금 은 보석과 보물을 드려 공경할 것이며


사도행전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마지막으로 앞에서 빼놓고 왔던 긴 수식어를 살펴봅시다.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사시는 이"는 다니엘 12:7의 인유입니다.

다니엘 12:7
내가 들으니, 모시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사람이,
그의 오른손과 왼손을 하늘로 쳐들고,
영원히 살아 계신 분에게 맹세하면서 말하였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지나야 한다.
  거룩한 백성이 받는 핍박이 끝날 때에,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새번역이 "영원히 살아 계신"이라 번역한 말을 저는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사시는 이"라고 풀었습니다. 단순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간을 늘려놓은 영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창조는, (옛)창조 이후 단 한 번도 끊어진 바 없는 시간 위에 돌입한 새로운 시간입니다. 전자가 땅의 시간이라면 후자는 하늘의 시간입니다. 전자를 현시대라 불러왔고, 후자를 오는시대라 불러왔습니다. 과거를 기준점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 속으로, 미래를 기준점으로 가지고 있는 전혀 새로운 시간이 들어왔습니다. 그 기이한 시간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창조됩니다. 바울은 그 창조의 시작이 바로 "신실함(믿음)"이라 말합니다. 신실함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8
여러분은 그 거저주심에 의해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출애굽 받았으니,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이로서 발은 땅에 딛고 있으나, 머리는 하늘을 향하는, 현시대가 보기에 기이한 인간이 탄생합니다. 그는 옛창조의 결과물이면서도 새창조를 덧입은 사람이며, 이러한 존재는 인자와 니고데모의 대화 속에서는 "거듭남"으로 언표되었습니다. 바로 스물 네 장로들이 대표하고 있는 이 땅의 에클레시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위(하늘)로부터 새로이 태어난 사람.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아멘 아멘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4:6b~11

  그리고 왕좌 가운데와 왕좌 둘레로, 앞뒤로 눈으로 가득한 네 생물이(있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생물은 사자 비슷했고, 두번째 생물은 황소 비슷했고, 셋쩨 생물은 사람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고, 네번째 생물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은, 그들 각각 여섯 날개를 위로 가지고 있고, 둘레와 안에는 눈들로 가득합니다. 다시 멈춤을 갖지 않고 밤 낮으로 말하길,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주 하나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이,
  계셨고 계시며 오시는 이."

  그리고 네 생물들이 뚜렷과 영예와 감사를 그 왕좌 위에 앉으신,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사시는 이께 드릴 때, 스물 네 장로들은 그 왕좌에 앉아 계신 이 앞에 엎드릴 것이고, 시대들로부터 시대들에 이르도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할 것이며, 그들의 면류관들을 그 왕좌 앞에 던질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당신은 합당하십니다, 주 우리 하나님, 뚜렷과 영예와 힘을 받으시기에,
  왜냐하면 당신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그 뜻을 통하여 (만물이) 있어왔고,
  그리고 (다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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