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이기는 이, 나는 그에게 나의 왕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할 것이다,

마치 나 역시 이겼기에 나의 아빠와 함께 그의 왕좌에 앉았듯이.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인자가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여러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미지들은 바로 이 장면, 이기신 인자와 하늘의 아빠가 함께 앉아 계신 왕좌에서 멈추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1~6a

  장면이 바뀌고, 나는 하늘에 있는 열려 있는 문을 보았고, 내 뒤에서 말하던 나팔같이 들렸던 처음 소리가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이 일 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을 보여주리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인자가 앉아계신 왕좌와 그 왕좌를 둘러싼 '게임'이 아니라 예배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 장면은 계시록의 등뼈 역할을 합니다. 앞에 있던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보낸 메시지와, 뒤에 나오는 천사들의 환상이 바로 이 예배 장면을 중심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4,5장을 보면서, 이 전체 내용이 다니엘 7장의 인유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 본문을, 소위 "내가 본 천국"을 말하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이단들이 많이 왜곡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 앉으신 왕좌의 장면은, 우리를 다니엘 7장으로 안내합니다. 인자는 바로 그 왕좌에 앉아 계신 "옛적부터 계신 분"으로부터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왕좌에서의 예배 장면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나라, 권세,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한 후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다니엘 7장을 큰 축으로 놓고, 에스겔과 스가랴같은 다른 예언들의 인유가 이 하나님 왕좌를 더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은 분석과 종합의 두 단계로 이뤄집니다. 즉 우리는 하나하나 부분들을 연구한 뒤, 그 부분들을 모두 합쳐보아 비로소 무언가를 '알게됩'니다. 떼놓으려고만 한다면 전체가 죽어버리고, 뗴놓지 않으려 하면 우리는 전체에 대한 편견에 갇히게 됩니다. 계시록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 인유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은, 그 인유들이 합쳐졌을 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의 전체 그림을 위함입니다. 다층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먼저 첫 구절부터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장면이 바뀌고"라고 번역했는데, 개역성경에는 "이 일 후에"라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로는 "메타 타우타(μετε ταυτα)"라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메타(μετα)'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영어로는 after, behind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이 일후에"라고 해버리면, 마치 2,3장의 메시지와 4,5장의 내용이 시간순으로 연결된 것이라 오해하기 쉽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가뜩이나 계시록을 오늘날의 사건과 연결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그릇된 해석의 빌미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은 하나님 보여주시는 환상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을 "장면이 바뀌고"라고 풀었습니다만, "뒤"라는 전치사 본래의 뜻과 '베일을 벗긴다'는 '계시'의 의미를 살린다면, "그 이면에는"이라 푸는 것이 또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인자가 일곱 에클레시아의 천사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장면이 또 벗겨지고, 그 이면에 더 깊은 층위의 내용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이제 요한이 하늘에 있는 성전의 환상을 보는 장면으로의 진입입니다. 인자가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메시지를 주는 장면에서 '더 근원적인' 장면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자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으셨던 그 원출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올라오라'는 말은 상하작용이 아니라, 더 하나님과 가까운 차원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문'이 열렸습니다. 이 '문'이라는 심상도 에클레시아의 천사들에게 주신 메시지에 줄곧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 문을 성전의 문으로 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1:19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그 때에 번개가 치고,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계시록이 연대기적인 시간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분명해집니다. 11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늘에 있는 성전의 문이 열린게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4장에도 이미 그 성전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 장면 장면마다 어떠한 의미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각 장들이 시간순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곧장 난점에 빠집니다. 4장에서 열린 문은, 11장을 지나 15장과도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 15:5
그 뒤에 또 내가 보니,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소인 장막 성전이 열리고,


  신천지 사람들이라면, 2,3장의 일곱 에클레시아가 가리키는 유재열의 장막 성전이 6장 이후 배도와 멸망을 겪고 나서, 15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천지 증거장막 성전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전혀 그렇게 읽을래야 읽을수가 없습니다. 4장의 열린 문은 11장의 하나님의 성전이고, 15장의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 성전'도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실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미가야의 예언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22:19
미가야가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가 보니, 주님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그 좌우 옆에는, 하늘의 모든 군대가 둘러 서 있는데,


  미가야, 에스겔, 요한이 본 것은 눈에 띄도록 흡사합니다. 공통점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이사야는 어떻습니까?

이사야 6:1~4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이 이사야의 장면은 뒤에 그대로 인유됩니다. 보좌 곁에 있던 네 생물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스랍처럼 날개 여섯이 달렸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여기서도 왕좌(보좌)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이사야가 본대로 '성전'입니다. 즉 구약의 예언자들과 더불어 요한이 보게 된 것은, 하늘 성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님 처소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요한은 "이 일 후에 반드시 일어아야 하는 일"에 관해 듣게 됩니다.

  "이 일 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란 표현도 시간 순서를 꿰어 맞추려는 시도를 지지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 2:28의 인유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풀어주듯, 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비밀을 에클레시아에게 풀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풀어주지 않고 환상만 그대로 전해주었다는 신천지의 주장도 억측이고,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을 단서로, 오늘날 벌어지는 사건과 뭔가 맞춰보려는 시도도 잘못되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예언된 것이, 요한 자신의 때에 이르러서는 성취된 일이 되었다는 것이 이 인유의 핵심입니다. 요한이 달리 다니엘을 인유하는 게 아닙니다.


  곧장 나는 숨님으로(안에)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 왕좌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고, 왕좌 위에 앉아 있던 이도 보았고, 앉아 있던 이의 뵘은 벽옥(jasper)과 홍옥(sardius) 같았고, 그 뵘이 에메랄드 같은 무지개가 왕좌 전체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에스겔처럼 "숨님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계시록 1:10에서 요한은 같은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1장에서 보았던 촛대와 인자의 환상은, 4,5장에 나오는 환상과 연결됩니다. 숨으로 연결됩니다.
  그가 숨님으로 감동되어 보게 되는 환상은 어떤 왕좌가 놓인 장소인데, 그 앉아 있던 분은 '빛'이신가 봅니다. 벽옥, 홍옥 같은 빛나는 보석으로 묘사됩니다. 베르그송의 말대로 사람은 고체적 사고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단단하게 고정된 것을 중심으로 사고를 이어나갑니다. 형언할 수 없는 빛나는 존재를 표현해야 하는 역시, '고체적 사고'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왜 하필 보석인가?' 묻다가 든 생각이 이렇습니다. 그렇다고 보석에 대한 묘사들이 어떻게든 설명하기 위해 일회적으로 쓰인 것은 아닙니다ㅣ. 계시록 끝부분에 가면, 벽옥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11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에스겔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숨님에 감동되어 '하늘을 열어 보여주신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가 보게 된 것은 '전차'인데, 전차는 당시 최신 무기로서 전투를 나가는 왕의 탈 것이었습니다. 이 전차가 요한에게 있어서는 왕좌입니다. 에스겔이 본 이 우주적 전차의 환상에는 계시록 4장과 마찬가지로 네 생물이 등장하고, 보석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지개도 등장합니다.

에스겔 1:26~28

또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또 나는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위쪽에서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불꽃처럼 안팎으로 그를 둘러싼 것을 보았는데,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아래쪽에서도, 나는 불꽃과 같은 모양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무지개는 노아를 생각하게 합니다. 홍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약속은, 노아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의 약속이었습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물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너를 혼내주겠다'가 아니라, 이제는 물로 새롭게 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새창조로 이어집니다. 즉 모든 생명체와 맺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생명체의 새창조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에스겔이 보았던 전차에, 그리고 요한이 보았던 왕좌에 둘려있습니다. 그러니 이 왕좌는 새창조의 왕좌입니다. 살아있는 것을 새롭게 하시는 이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왕좌에 스물 네개의 왕좌들이 둘려 있었고, 왕좌들 위에는 스물 네 장로들이 빛나는 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좌를 중심으로 스물 네개의 왕좌들이 둘려 있습니다. 이 자리는 스물 네명의 장로들 자리입니다. 그들이 일곱 에클레시아의 메시지에 등장했던 흰 옷과 금 면류관을 '이미' 쓰고 있습니다. '스물 넷'이라는 숫자는 역대상 24~26장에 나오는 직책들이 숫자 스물 넷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을 스물 네 갈래로 나눕니다(24장). 악기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도 스물 넷이었습니다(25장). 성전 문지기 역시 스물 네 갈래로 나누어 임명합니다. 이들 모두는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요한이 하나님의 성전을 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스물 넷이라는 숫자를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구약적 사고입니다.

  그레고리 빌은 이 스물 넷을 구약의 '열 두 족장 + 신약의 '열 두 사도'로 이해합니다. 즉 "보편 제사장 직분을 특징으로 하는 에클레시아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이 스물 네 장로는 7장에 나오는 "흰무리"와는 구별됩니다. 그는  "일곱 편지에서 천사들이 일곱 교회의 대표로 간주되고, 다니엘 10-12에서 천사들이 나라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여기서 24장로는 구약성도들을 포함한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천사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라고 합니다.
  또한 '장로'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지도자, 즉 통치자입니다. 이들은 천상회의의 구성원들입니다.

이사야 24:23
만군의 주님께서 왕이 되실 터이니, 달은 볼 낯이 없어 하고, 해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주님께서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


다니엘 7:9
내가 바라보니, 옥좌들이 놓이고, 한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고, 옥좌의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소리들과 천둥들이 나왔습니다.


  이 왕좌로부터 나오는 번개들, 소리들, 천둥들도 구약의 인유로 가득합니다. 일단 모세가 토라를 받으러 올라갔던 시내산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거하시는 시내산도 번개와 소리와 천둥으로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위에서 봤던 다니엘 7:9에서도 "바퀴달린 왕좌"에서는 불꽃과 불길이 치솟습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전차도 같은 모습입니다.(겔 1:26) 그리고 이 '번개들, 소리들, 천둥들'은 이어지는 계시록 내용에도 줄곧 등장합니다.
  이 소리들의 정체가 계시록 4:8에 가서 밝혀질 것이고, 천사가 하늘 성전에 있는 제단의 불을 땅으로 던지는 장면에서도, 11:19가서 하늘 성전이 열리는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그리고 일곱번째 대접을 쏟는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고, 성전의 왕좌에서 "다 되었다"하는 큰 음성 울릴 때에도, 번개들과 소리들과 천둥들('진동'으로서 지진)이 나옵니다.(16:18)

  이뿐만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 4장에 나오는 '왕좌'가 계시록의 등뼈라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뒤에 이어지는 인 심판, 나팔 심판, 대접 심판의 출처가 모두 이 하늘 성전 안에 놓인 왕좌로 명시 되기 때문입니다. 인을 떼는 말탄 자들을 불러낸 것은 살아있는 네 생물입니다.(6:1) 일곱 나팔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일곱 천사가 붑니다.(8:2,6)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종결되는 마지막 일곱 재앙들을 요한은 15장에서 자세히 묘사하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4장에서 묘사들이 그대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촛대들이 그 왕좌 앞에서 불 타오르고 있었고(그 일곱들은 하나님의 일곱 숨결들입니다), 그 왕좌 앞은 수정처럼 뵈는 유리 바다 같았습니다.


  이러한 왕좌 앞에서 일곱 촛대들이, 즉 에클레시아가 불 타오르고 있습니다. 즉 에클레시아 전체가 참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증언하는 참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이 일곱 등불 인유인 스가랴 4장에 대해서는 1장 풀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정바다는 열왕기하 25:13과 예레미야 52:17에 나오는 놋바다일 것이라 합니다.

열왕기상 25: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예레미야 52:17
바빌로니아 군대는 주님의 성전에 있는 놋쇠 기둥과 받침대, 또 주님의 성전에 있는 놋바다를 부수어서, 모든 놋쇠를 바빌론으로 가져 갔다.


  솔로몬 성전에 놋바다가 놓였듯, 하늘 성전에는 유리바다가 놓여있습니다. 이 '바다'가 의미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에 나오는 '홍해'입니다. 즉 언약백성을 가로 막는 악(惡)을 상징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을 가르셨고, 그 갈라진 악을 지나 언약백성이 출범했습니다.) 다니엘의 네 짐승들도 바다 위에서 올라옵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봅시다.

이사야 51:9~11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힘으로 무장하십시오, 주님의 팔이여! 오래 전 옛날처럼 깨어나십시오! 바다 괴물을 토막 내시고 용을 찌르시던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바다와 깊고 넓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입니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입니다.


시편 74:12~15
하나님은 옛적부터 나의 왕이시며,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바다를 가르시고,

물에 있는 타닌(바다 괴물)들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짓부수셔서 사막에 사는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셨으며,
샘을 터뜨리셔서 개울을 만드시는가 하면, 유유히 흐르는 강을 메마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32:2
"사람아, 너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두고 애가를 불러라. 너는 그에게 알려 주어라. '너는 스스로 네가 만방의 사자라고 생각하지만, 너는 나일 강 속에 있는 악어이다. 뾰족한 코로 강물을 흩뿌리고 발로 강물을 휘저으면서 강물을 더럽혔다.


  이스라엘이 지중해를 건너온 로마를 악이라 여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를 집어 삼키려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사건이나, 심지어 바다를 밟고서 그 위를 걸으셨던 사건을 다시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에서도 바다는 악을 상징하는데, 이 바다가 앞으로 어찌 표현될지를 염두하면서 읽어가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6a

  장면이 바뀌고, 나는 하늘에 있는 열려 있는 문을 보았고, 내 뒤에서 말하던 나팔같이 들렸던 처음 소리가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이 일 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을 보여주리라."

  곧장 나는 숨님으로(안에)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 왕좌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고, 왕좌 위에 앉아 있던 이도 보았고, 앉아 있던 이의 뵘은 벽옥(jasper)과 홍옥(sardius) 같았고, 그 뵘이 에메랄드 같은 무지개가 왕좌 전체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좌에 스물 네개의 왕좌들이 둘려 있었고, 왕좌들 위에는 스물 네 장로들이 빛나는 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소리들과 천둥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곱 촛대들이 그 왕좌 앞에서 불 타오르고 있었고(그 일곱들은 하나님의 일곱 숨결들입니다), 그 왕좌 앞은 수정처럼 뵈는 유리 바다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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