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일곱번째 에클레시아입니다. 골로새와 히에라볼리 사이에 놓인 도시, 라오디케아로 갑니다.
 

  "라오디키아 에클레시아에 있는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
아멘이신 이, 증인이시고 신실하시며 참인 이,

하나님 창조세계의 아르케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멘이신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65장의 인유입니다.

이사야 65:16
땅에서 복을 비는 사람은 '아멘이신 하나님'을 두고 빌며,
땅에서 맹세하는 사람도 '아멘이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멘'의 의미는 진(眞)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의 '진실'이란 말도 '아멘'의 번역어입니다. 그런데 진리, 진실, 참, 진정. 이렇게만  써놓으면, 이 뚝 떨어진 말들은 대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의미가 붙잡히지 않습니다. 아멘의 하나님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어지는 이사야의 문맥 안에서 이 의미를 구체화시켜야 합니다.

"지난날의 괴로운 일들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멘의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진(眞)이란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를 캐묻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참인듯 싶은데, 이상하게도 '아멘'은 괴로웠던 과거를 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아멘일 수 없습니다. 그 과거가 어떠했든, 과거는 '나'입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산물이요, 과거를 지우면, 오늘날 나도 없습니다. 과거를 잊고 싶겠지만, 과거를 잊으면, 오늘 내가 사는 토대를 버리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타고 있는 배가 고장이 났다고 해서, 그 배를 불질렀다간 나도 죽게 되듯, 과거를 잊는 것만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합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잊으려고 해서 잊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트라우마의 과거가 오늘 나를 구성했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아니겠습니까?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새로움. 아멘의 하나님은 과거를 그저 잊으면 된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를 잊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 이사야가 예언했던 "아멘의 하나님"은 과거의 괴로움 마저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새창조의 주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새창조의 주님으로 인자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는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그는 창조하십니다. 과거를 역전시키는 새 창조.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이라 말씀하셨는데, 창세기의 첫대목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빛'이란 창조의 개시(開示)임을 알 것입니다. 태초에 빛을 시작으로 우주만물이 창조되었듯이, A.D.1세기, 빛이신 예수를 시작으로 옛창조의 썩음 위에서 새로운 창조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이가 빛이십니다. 새창조의 주님,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를 "창조세계의 아르케"라 말합니다. "아르케"는 '시작', '근원, 세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느 한 점에서부터 소용돌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치 이연걸이 나뭇잎으로 가득한 숲에서 태극권을 연마하듯 말입니다. 그 한 점에서부터 시작되니, 그 한 점은 근원이요, 세력이요, 그 한 점에서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구절에서 "태초에"는 "엔 호 아르케"의 번역어입니다. 희랍어 전치사 '엔'은 '~로'로 번역할 수도 있으므로, "아르케로 말씀이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는 새롭게 창조된 모든 것들의 아르케이십니다.

  그이가 "증인이시며 신실하고"라고 언표되는 것은, 그이 자신이 새창조의 주인이자 최초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 죽음으로 허물어져가는 현시대 안에 새로운 존재가 꽃 피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 이 새로운 창조의 소식이, 옛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그 약속에 신실했던 첫번째 사람 때문에, 우리는 잊혀졌던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예수가 '알레떼이아(참)이신 이'이십니다.') 예수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빚져있습니다. 아니, 이런 말로도 모자릅니다. 그이는 모든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토대(휘포스타시스)이십니다.


  2017.7.24 추가

"요한계시록 3장이 말하는 진정성은 이스라엘이 충성스러운 증인이어야 한다는 이사야서의 하나님 라씀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될 수 있다."[각주:1]


이사야 43:9~19

모든 열방과, 뭇 민족도 함께 재판정으로 나오너라. 그들의 신들 가운데서 어느 신이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느냐? 그들 가운데서 누가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예고할 수 있느냐? 그 신들이 증인들을 내세워서, 자신들의 옳음을 증언하게 하고,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게 하여서, 듣는 사람들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게 하여 보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이렇게 한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오직 나만이 하나님임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지음을 받은 신이 있을 수 없고, 나 이후에도 있을 수 없다. 나 곧 내가 주이니, 나 말고는 어떤 구원자도 없다. 바로 내가 승리를 예고하였고, 너희를 구원하였고, 구원을 선언하였다. 이방의 어떤 신도 이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 일에 있어서는 너희가 나의 증인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태초부터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내가 장악하고 있는데, 빠져 나갈 자가 누구냐? 내가 하는 일을, 누가 감히 돌이킬 수 있겠느냐?"

  너희들의 속량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에 군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치고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성문 빗장을 다 부수어 버릴 터이니, 바빌로니아 사람의 아우성이 통곡으로 바뀔 것이다. 나는 주, 너희의 거룩한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다.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 내가 병거와 말과 병력과 용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쓰러뜨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마치 꺼져 가는 등잔 심지같이 꺼버렸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일곱 에클레시아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모두 인자에 대한 표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멘의 하나님에 관련된 표현도, 우리가 이미 1장에서 보았던, "죽어 있었으나, 바로 나는 산다"와 연결됩니다. 요한은 주도 면밀하게 에클레시아들에 대한 메시지가 더해지면서, 인자에 대한 표현을 구체화시켜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새창조의 주님'으로서의 인자 설명은, 인자 이미지의 마지막 퍼즐조각이 됩니다.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즉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나는 네가 뜨겁거나 차기를 바랐지만, 이렇듯,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기에, 나는 너를 내 입으로부터 토해낼 참이다.


  아멘의 하나님은 뜬 구름 잡듯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주 만물을 지으셨지만, 언제나 우리와 같은 눈높이로 계십니다. 마치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한듯, 추상적인 어휘들로 참을 묘사해보려는 인간적인 시도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구체적이십니다. 라오디키아 지역은 히에라볼리와 콜로사이(골로새)라는 지역 사이에 있습니다. 히에라볼리에서는 온천이 있고, 콜로사이 지역에는 샘물이 있습니다. 수원이 부족한 라오디키아는, 히에라볼리와 콜로사이에 수도관을 설치해서 물을 공급 받았습니다. 히에라볼리는 광물들이 다량 함유되어 치료에 효과있는 자신들의 뜨거운 물이 자랑이었고, 콜로사이는 갈증을 해갈해주는 맑고 시원한 물이 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물들이 수도관을 타고 라오디키아에 오면, 다 식어 빠진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표현을 어찌 받아들였을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점이라곤 하나 없는 에클레시아. 입에서 뱉어버리고 싶다는 충격적인 표현을 인자로부터 들었습니다. 그 입과 무관한 에클레시아는, 더 이상 '증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존재 가치를 상실한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가 아래 등장합니다.

네가 말하길, '나는 지금 풍요롭고, 예전부터 줄곧 풍요로왔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정작) 너 자신이 어려움에 짓눌려 있고, 비참하며, 가난하며, 눈 멀었고, 벌거벗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논증하는 것은, 나로부터 불로부터 정제된 금을 구매해야 한다는 것(네가 풍요롭기 위해서), 그리고 빛나는 겉옷도 구매해야 한다는 것(덮어서 네 벌거벗은 추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연고를 네 두 눈에 발라야 한다는 것(네가 보기 위해서).


  라오디키아 에클레시아는 자신들이 예나 지금이나 풍요롭다 말하며,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바울처럼 '자족의 비결'을 배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풍요'는 순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만 관련되어 있습니다. 라오디키아에는 큰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로마 황제가 그 지역에 구호 자금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라오디키아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이것을 큰 자부심 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소아시아 교역의 중심이었던 라오디키아에는 그 옛날 벌써 금융업을 통해서 막대한 자금을 쌓아둘 수 있었고, 양모 산업 또한 발달했으며, 유명한 안과 학교가 있어서 돈 버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라오디키아의 부유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우상숭배 제의에도 참여해야 했습니다. 즉 그들이 에클레시아답게 살고자 했다면, 얻을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키아 에클레시아는 그림자 쫓음에 참여하여, 라오디키아 전체와 함께 번영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벌거벗었고, 눈 멀었습니다. 그릇되게 얻은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라오디키아 에클레시아는 증언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향해 인자의 말씀이 날카롭습니다. "정작 너 자신이 어려움에 짓눌려 있고, 비참하며, 가난하며, 눈 멀었고, 벌거벗었는지 알지 못한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그들은 숨 쉬는 사람이라 볼 수 없을만큼, 새창조의 온전한 인간성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라오디키아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인자는 처방을 내리십니다. 그렇다고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쉼볼로'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함께던짐'인데, 이 말은 서로 토론하고 논쟁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즉 라오디키아 에클레시아의 천사를 맞은 편 대화자로 놓고, 대화와 논쟁을 통해 다음의 내용을 권면 사항이 도출된 것입니다.

1) 나로부터 불로부터 정제된 금을 구매할 것
2) 빛나는 겉옷도 구매할 것
3) 연고를 두 눈에 바를 것

  역시 상업이 발달한 라오디키아 지역에 걸맞는, 그들의 정황을 반영한 표현들입니다. "불로부터 정제된 금"은 앞에서도 나왔던 표현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깨끗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빛나는 옷"도 사르데이스 에클레시아의 메시지에서 등장한 표현입니다. 연고만이 새로운데, 이 연고 역시 안과 학교로 유명한 라오디키아의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저 세 가지는 모두 메시아 예수를 가리킵니다. 예수의 인격에서부터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1)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2) 우상숭배 제의와 무관하게, 3) 상황을 다시 읽는 새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우상숭배를 일삼으면서도,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호세아의 인유이기도 합니다.

호세아 12:7~9


"에브라임은, 거짓 저울을 손에 든 장사꾼이 되어서, 사람 속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에브라임은 자랑한다.

'아, 내가 정말 부자가 되었구나.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다.
모두 내가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이니,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 살 때로부터 너희의 주 하나님이다.
내가 광야에서 너희를 찾아갔을 때에 너희가 장막에서 살았던 것처럼,
나는, 너희가 다시 장막에서 살게 하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부당하게 얻은 부유함은, 우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것을 부부관계로 풀어냅니다.

호세아 2:5~8
 
그는 이렇게 자랑한다. 

'나는 나의 정부들을 따라가겠다.
그들이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고,
내가 입을 털옷과 모시옷과,
내가 쓸 기름과 내가 마실 술을 댄다'

  그렇다! 그들의 어머니가 음행을 하였다.
그들을 배었던 여인이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가시나무로 그의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겠다.
그가 정부들을 쫓아다녀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찾아다녀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는 발길을 돌려서 나의 남편에게로 돌아가야지.
나의 형편이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좋았다'"

  바로 내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내가 그에게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에게 벌어진 일이, 라오디케아 에클레시아에게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부된 에클레시아가 우상과 간통을 저지르며, 우상을 통해 얻은 부유함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우정하는 누구든지,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고 설득한다. 그러니 열심을 내라, 생각을 바꾸라! 보라, 나는 문 앞에 줄곧 서 있었고, 지금 문 두드리고 있다.


  '우정한다'라고 풀어놓은 단어는 '필로'입니다. 우호관계를 뜻하는 말인데, '동지애'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토록 에클레시아의 기능을 상실한 패역한 사람들조차, 예수는 우호관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아직 우호관계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는 가장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바로 바른 말입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라오디케아 에클레시아의 상황이 처참하지만, 그래도 아직 기회가 박탈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은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합니다.

  그 다음 문장에 두 가지 시제가 나란히 나옵니다. "문 앞에 서있다"는 말은 완료형이고, "문을 두드린다"는 현재형입니다. 즉 인자는 전부터 문 앞에 있었고, 지금 인자가 에클레시아와 논하고 설득하는 것이 문 두드림인 것 같습니다. 필라델피아 에클레시아의 메시지에서도 '문'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때 이 문을 다윗의 열쇠로 잠그고 열 수 있는 '새 창조의 문이'자, 곧 '사람'이라 풀었는데, 여기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두드리는 인자에 대한 본문은, 아가서 5:2의 인유이기도 합니다.

아가 5:2
(여자) 나는 자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깨어 있었다.
저 소리, 나의 사랑하는 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 열어요! 나의 누이, 나의 사랑, 티없이 맑은 나의 비둘기!
머리가 온통 이슬에 젖고, 머리채가 밤이슬에 흠뻑 젖었소."


  요한이 라오디키아의 메시지에 인용하고 있는, 호세아, 아가서 모두가 부부관계의 맥락입니다. 앞에 '우정'이 나왔다고 해서, 부부관계로 해석하는게 배제될 수는 없습니다. 우정은 두 부부 사이에도 있으니까요. 아가서의 문맥은 이러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침식 밖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신부는 문 열어주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하고, 남녀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인자와 에클레시아의 사이가 이러합니다.

만일 네가 내 소리를 듣고, 그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따라서 전도용 성경 구절로 유명한 이 본문은, 전도용이 아니라 에클레시아를 깨우는 소리입니다. 문을 열면 메시아와 다시 하나됩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통해 일어나는 새창조에 참여하게 됩니다. 앞에서 나왔던 인자에게서 사는 금, 빛나는 옷, 눈에 바르는 연고는 모두 메시아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라는 표현은 성찬을 가리킵니다. 즉 성찬의 참 의미는 신부된 에클레시아가 새창조를 위해 신랑이신 인자와 한 식탁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즉 부부관계의 함의가 있습니다. 인자와 서로 깊은 것을 공유하고, 그것을 통해 현시대에 없는 새로운 삶을 창조해나가는 에클레시아는 성찬의 자격이 있습니다.

이기는 이, 나는 그에게 나의 왕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할 것이다, 마치 나 역시 이겼기에 나의 아빠와 함께 그의 왕좌에 앉았듯이.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왕이신 아빠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관계는, 신랑 예수님과 신부 에클레시아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기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은 메시아의 왕좌에 앉게 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졌을 때, 그 새로운 창조세계를 메시아와 함께 공동상속 받게 되는 에클레시아의 아름다운 결말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8:12~17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 가족 여러분! 우리가 빚진 사람들입니다. 허나 살몸에 빚진 것이 아니니 살몸을 따르는 삶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살몸을 따라 산다면,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숨으로 몸의 짓거리를 죽이면,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숨에 이끌린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빠지는 종의 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되는 숨을 받았습니다. 그 숨결로 부르짖습니다, 아빠 아버지! 숨님 또한 우리의 숨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이들이라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메시아와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나타나고자, 그와 함께 고난도 받는 한 말입니다.

  이김의 의미 또한 새로이 조명되는데, '이미 이기신' 메시아 예수와 하나되는 것이 곧 우리의 이김임이 밝혀집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다시 읽어봅시다.

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키아 에클레시아에 있는 천사에게도 편지하라. "
아멘이신 이, 증인이시고 신실하시며 참인 이, 하나님 창조세계의 아르케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즉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나는 네가 뜨겁거나 차기를 바랐지만, 이렇듯,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기에, 나는 너를 내 입으로부터 토해낼 참이다.

  네가 말하길, '나는 지금 풍요롭고, 예전부터 줄곧 풍요로왔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정작) 너 자신이 어려움에 짓눌려 있고, 비참하며, 가난하며, 눈 멀었고, 벌거벗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논증하는 것은, 나로부터 불로부터 정제된 금을 구매해야 한다는 것(네가 풍요롭기 위해서), 그리고 빛나는 겉옷도 구매해야 한다는 것(덮어서 네 벌거벗은 추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연고를 네 두 눈에 발라야 한다는 것(네가 보기 위해서).

  나는 내가 우정하는 누구든지,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고 설득한다. 그러니 열심을 내라, 생각을 바꾸라! 보라, 나는 문 앞에 줄곧 서 있었고, 지금 문 두드리고 있다. 만일 네가 내 소리를 듣고, 그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이기는 이, 나는 그에게 나의 왕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할 것이다, 마치 나 역시 이겼기에 나의 아빠와 함께 그의 왕좌에 앉았듯이. 귀 가진 자는 숨님이 에클레시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지어다."


  1. <성전신학>, 그레고리 빌, p. 40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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