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표적 : 

4를 깨뜨리는 3





 

0.


  벌써 여섯 번째 표적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에서 50절까지를 다섯 단락으로 나누고, 각 단락 마다 소제목을 붙인 뒤, 필요할 때마다 인용하는 방식으로 아래의 글을 기술했습니다. 


요한복음 11:1~50


1.

  베다니에 나사로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병이 들었다. 베다니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가 사는 마을이었다. (이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칼로 그분의 발을 닦은 여자다. 병이 든 나사로는 그녀의 오라비였다.)

  이에 자매들은 예수께 전갈을 보내어 말했다.

  “주님,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전갈을 받고 말씀하셨다. “이 병으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녀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일단 계시던 곳에 이틀을 머무셨다.

  그런 다음에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유대로 돌아가자.”

  제자들이 대답했다. “선생님, 방금 전까지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정말 거기에 다시 가시겠다는 뜻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 아니냐? 낮에 다니면 헛발을 딛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의 빛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밤에 다니면, 헛발을 딛게 될 것이다.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를 깨우려 한다.”

  제자들이 대답했다.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보통 잠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실 그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사실 너희를 위해서,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게 기쁘다. 너희 믿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그에게 가자.”

  쌍둥이라 불렸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자. 우리도 그와 함께 죽자.”


2.

  예수께서 도착해 보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벌써 나흘째였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부근,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많은 유대 사람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와서 오라비의 일을 두고 위로했다.

  예수께서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를 만나러 갔다. 그러는 사이,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게시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럼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주실 줄을 압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 오라비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말했다.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줄을 압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설사 죽더라도 살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말했다. “네, 주님. 제가 믿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3.

  이렇게 말한 다음 마르다는 돌아가서 자매 마르다를 불러서 남몰래 말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찾으신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서 예수께 갔다.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는 마르다를 만났던 그곳에 아직 계셨다.

  마리아를 위로하며 집에 함께 있던 유대 사람들은, 그녀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마리아가 울러 무덤으로 간다고 짐작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를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시기만 했다라면, 내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깊이 심란하고 몹시 괴로우셨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말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물을 터뜨리셨다.

  유대 사람들이 말했다. “보라. 그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말했다. “그래, 그는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했잖소? 이 사람이 죽지 않게 무엇인가 할 수 없었단 말이오?”


4.

예수께서는 다시 마음속에 깊은 고통을 느끼셨다. 그는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이었고, 그 앞에는 돌이 놓여 있었다.

  “돌을 치워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했다. “하지만 주님, 냄새가 날 겁니다! 벌써 나흘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들은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을 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 말을 들어 주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위에 둘러선 무리로 인함이니, 그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 크게 외치셨다. “나사로야-나와라!”

  그러자 죽은 사람이 나왔다. 그의 손과 발은 세마포 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천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이 모든 일의 결과로,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몇이 그를 믿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린 사람도 있었다.


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해서 물었다.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소?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고 있으니 말이오. 그를 이대로 두면, 모두가 그를 믿게 될 것이오!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강탈할 것이오!

  그들 중 하나인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소! 당신들에게 가장 유익한 일이 이것이오. 곧 민족 전체가 없어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도록 하는 것이오.”




1. 여섯 번째 사건 발생


-장소는 베다니

  여섯 번째 표적이 벌어진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땅”이라는 뜻이고요. 예루살렘에서 3Km, 아주 가깝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남매가 거주하는 지역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엿새전 방문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때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늘 여섯번째 표적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이 베다니로부터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안 가신다고?

  그러나 예수는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그 삼남매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삼남매중의 한 명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는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 병으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지난 사건의 향기를 느껴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었던 이유 말입니다.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의 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드러남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의 나타나심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혼돈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드러내는 배경인 것입니다.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우리는 희미하게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어쨋거나 예수께서는 베다니로 이동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이틀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다 나사로가 죽습니다. 이 병으로 말입니다. "이 병으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가신다고?

  이제 움직이십니다. 병든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를 뜯어 말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바로 옆 동네이고, 그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로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본거지. 

  그러한 예루살렘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습니다. 피라미드식으로 쌓아올려진 위계. 많은 사람들은 아래에서 짓밟히고 있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자들이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피라미드의 정점의 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자도 자신들과 같은 생각으로, 그리고 강력한 힘으로, 자칭 별이라는 로마를 추락시키고, 그 자리를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할 것이라 가르칩니다. 그렇게 피라미드의 형태로 굳어진 이스라엘은 로마와의 일전을 준비하며, 인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 앞에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인자임을 밝히셨습니다. 더불어 자신이 죽임당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존에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꿈을, 모조리 산산조각내는 발언입니다. 이스라엘을 혁명으로 단합시키는 지도자들은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아니, 피라미드의 정점과는 상관없는, 나사렛 출신의 거렁뱅이 같은 이가 인자라니! 게다가 인자가 나약하게도 죽임당한다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민족을 망하게 할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시각 장애인의 눈을 고쳐주신 사건의 끝부분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기에,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민중들도 신성모독자에게 돌을 집어 던질 기세였습니다. 즉, 예루살렘이 생각하는 예수는, 기껏 짜놓은 판을 깨뜨리는 자, 신성모독자, 이단자였습니다. 사탄이 예수를 시험할 때, 주겠다고 했던 이 도시는, 화려해보일지언정, 눈에 진흙을 잔뜩 붙이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돌을 집어 던지는 눈 먼 도시, 반역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가 다시 호랑이 굴로 들어가려고 하니, 제자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 당연하지요.


-밤과 낮

  그러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대답은, 밤과 낮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 아니냐? 낮에 다니면 헛발을 딛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이 빛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밤에 다니면, 헛발을 딛게 될 것이다.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전체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크리스마스 트리를 이용해서 얘기해봅시다.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별이 '빛'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를 좋아하고 추구합니다. 대통령이나, 슈퍼맨이나,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나, 선진국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빛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 별을 쫓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 별에게 이용당할 뿐이고, 정작 별들도 명멸을 거듭할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별은 생존으로 쌓아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꼭대기에 있지 않았고, 마굿간 구석의 말구유에 있었습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세상의 빛’. 이것은 요한복음 9장에서 시각 장애인을 두 번이나 찾아갔던 바로 그 빛입니다. 혼돈 속에서 벌어진 새창조의 빛. 그 새창조의 빛과 함께 하는 시간이 바로 '낮'입니다. 빛과 함께 하는 낮에는 길을 더듬어 찾지 않아도 됩니다. 설령 그 곳이 예수를 죽이고 싶어 안달하는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일지라도, 빛과 함께라면, 언제나 옳은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빛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다하더라도, 짙은 어둠 속에서 진리에 눈먼 사람, 언제 진리를 향해 돌을 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다는 것입니다. 베나니로. 위험천만한 유대 근처로. 병든 나사로에게로. 지금 나사로의 병보다, 자신의 목숨을 귀히 여기는 제자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누가? 세상의 밤을 끝내고 낮을 가져오는 새창조의 빛이 말입니다. 직접.


-잠자는 자들이 일어날 때

  지금 우리는 여섯번째 '표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표적 안에서 사용된 상징들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낮과 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한 사람의 일어남]. 예수께서는 지금 어떠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상태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발언을 하십니다. 한 번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고, 또 한 번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셨고, 다른 한 번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밤이 지나고 세상을 빛이 덮으면, 이제 잠자던 사람들이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듯, 예수께서는 죽은 이를 가리켜,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그들이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암시하듯 말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잠잔다'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대로라면 나사로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도 이와 같은 용례로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개정)


  죽은이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의 병으로는, 나사로를 잠들게 할 뿐 완전히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잠이 아닌, 진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로 미뤄놓습니다. 


-죽으러가는 너희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어서, 이 여섯 번째 표적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사로는 죽었다. 사실 너희를 위해서,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게 기쁘다. 

너희 믿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그에게 가자.”


  이틀간 기다리셨던 것도, 낮과 밤을 이야기하셨던 것도, 죽은 자를 가리켜 잠잔다 말씀하신 것도, 그리고 이제 나사로에게 가시는 것도, 모두가 제자들의 믿음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시는 것입니다. 표적은 누군가에게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그 누군가는 바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의미를 보여주십니다. 바로 표적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은 의미로 충만한, 오늘 우리에게까지 글자로 전달된, 역사의 그림 언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지금 우리가(예수의 시간에) 이 표적의 의미를 추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도마의 의미심장한 말로 첫번째 단락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쌍둥이라 불렸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자. 우리도 그와 함께 죽자.”


  비아냥인지, 진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죽음의 위기를 피해갈 수 없는 길임은 분명합니다. 도마의 말이 맞습니다. 만약 간다면, 그와 함께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2. 여동생1의 진술-"오는 시대는 나중이죠?"



-지나버린 死일의 시간

  그러나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병들었던 나사로는 죽었고, 이미 나흘이 지났습니다. 시체는 죽고나서 3일부터는 부패가 시작됩니다. 썩어가는 시체로부터 엄청난 냄새가 뿜어져 나옵니다. 나흘째는,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이 끊어진 시간. 아니, 그 어떠한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마치 오늘날과 같습니다. 오늘날 그 누가, 죽음이 정복되고,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있음을 믿습니까? 오늘날 그 누가, 그 새로운 길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어, 그 길의 끝에 서기를 온 몸으로 갈망합니까? 오늘 이 시대는 나흘째입니다. 생존만 추구하다가, 이웃의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에도 아랑곳않고, 페브리즈 뿌리면 된다고 말하는, 정치는 분열되있고, 사람은 먹고 살기 바쁘며, 모든 것은 이용하고 이용당하며, 까마득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기어오르느라 정신없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나흘째. 안녕하지 않은 나흘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 안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날은 나사로가 죽은지는 나흘째이지만, 예수께서 움직이기 시작한 날로부터는 삼일째라는 사실입니다. 이틀을 기다리시고 움직이셨으므로.

  

-여동생1의 진술

  예수께서 베다니 입구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여동생1이 달려 나옵니다. 이름은 마르다입니다. 이 와중에 제자들은 혹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자신들을 향해 돌을 들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없나 두리번거렸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는 마르다의 전언에, ‘아 위험한 곳 괜히 왔다. 빨리 돌아가자’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게시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럼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주실 줄을 압니다.”


  우리는 이 마르다의 발언에서, 두 번째 표적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 때 아들이 죽어가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왕의 신하가 했던 말이 기억나십니까? “선생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주십시오!” 마르다는 예수를 좋아합니다. 예수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머리 속에 없는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왕의 신하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바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실 것이라는 사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기 전까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티메가 아닙니다. 후에 바울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5:17,18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다를 위해서 말입니다.(이틀동안 머무실 때, 분명 예수께서는 마르다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마르다들을 위한 예수의 답변

  예수께서는 정곡을 찌르십니다. '니가 생각하지 않은 경우의 수가 있어. 그건 니 오라비가 다시 죽음으로부터 일어서는거야.' 그런데 마르다의 반응은 정곡을 찔린 사람의 반응이 아닙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영 심드렁하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마르다의 발언이 신학에 있어서도, 역사의 사료로서도 참으로 중요한 발언이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믿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시간개념이 있었습니다.(세번째 표적에서 배웠듯) 하나는 현시대,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입니다. 이 오는 시대를 가리켜 ‘영생’이라 번역합니다. 유대인들의 믿음은 현시대가 종결되고, 오는 시대가 말 그대로 오는 것입니다. 이 현시대의 마지막 날은 악인의 심판의 날이며, 오는 시대의 시작은 의인들의 부활의 날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오는 시대의 시작의 날에, 옳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 중에 오라비도 끼어 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믿음이었기 때문에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시대를 끝내고, 오는 시대를 가져오는 이를 메시아라 부르는 것 또한 유대인에게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현시대의 끝, 메시아, 유대인들의 단체 부활, 오는 시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설사 죽더라도 살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느냐?”


  ‘죽더라도, 살 것이다. 살아서 믿으면 안죽는다.’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살아서 믿으면 안죽는다’ 이 말이 핵심입니다. 살아서 믿는다는 것은, 살아있을 때 오는 시대가 온다는 말일테니까요. 어? 그 오는 시대 속에서 예수를 믿고 죽는 이들은, 모두 죽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자는 것입니다. 낮이 되어, 깨어날 때를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그럼 나사로 역시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이고, 나사로가 앓던 병 역시 나사로를 죽일 수 없고, 잠들게 할 뿐이군요!


-나중에? 지금!

  마르다가 말했다. “네, 주님. 제가 믿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르다는 도대체 무엇을 믿게 된 것일까요? 예수께서 '나중에' 유대인들의 단체 부활을 가져오시는 메시아라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조차 어마어마한 것이지요. 지금 눈 앞에 있는 예수는 메시아이며, 그가 오는 시대를 가져올 것이고, 인자의 최종 그림을 완성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요. 그런데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오는 시대가 오는 것은 언제이며, 옳은 이들의 부활은 언제 벌어지는가? 언제? 마리아는 짐작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언제가 '지금'이라는 걸.



3. 여동생2의 진술-"타락을 넘어설순 없죠?"



-같은 소리, 다른 반응

 예수는 마르다에 이어 나사로의 여동생2를 만나십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장소는 아직 베다니에 들어가지 않은 채, 마을 어귀입니다. 마리아가 달려나옵니다. 그 마리아가 곡하기 위해서 무덤으로 간다고 생각해고, 그녀와 함께 나사로의 죽음을 울어주기 위해 유대 사람들도 따라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간 곳은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앞이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시기만 했다라면, 내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데자뷰. 우리는 이 진술을 앞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르다의 진술과 같습니다. 마르다도, 마리아도, 왕의 신하를 만나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로부터 예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당신들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는 증언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도 죽음 안에서 경우의 수들을 떠올렸고, 그 안에는 병을 고치시는 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뒤집을 수 있는 예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만났을 때의 두 자매의 진술도 같고, 그 진술이 나오게 된 생각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반응은 다릅니다. 마르다에게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는 시대와 부활의 실체를 가르쳐주셨다면, 마리아에게는 함께 울어주십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우셨을까요?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는 왜 우셨는가?

  만약 여러분과 가까운 사람이 죽었는데, 누군가가 “천국 갔는데 왜 울고 그래?”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너도 천국으로 보내주기 전에 입다물고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몹시 괴로운 것입니다. 왜 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뒤틀림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반역,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죽음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는 곧 ‘인간 실패’입니다. 하나님 없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인간 스스로 이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이 비참함 아래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보고 어찌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인간의 타락을 핏기없는 표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타락과 죽음은 너와 나의 아픔, 우리 모두의 눈물입니다.


  가끔 죽음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서, 닫혀있는 그들의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동식물의 죽음과는 다르게, 인간의 죽음은 단순한 자연계의 순환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느날 찾아온 비극이고, 인간 실패입니다. 죽음을 가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차라리 ‘필멸하는 인간’에 대해서 말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더 솔직합니다. 반드시 찾아오는 절망, 삶의 끊어짐, 죽음은 어찌 포장한다해도 절망입니다. 아니, 포장하기에는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비극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살을 선택하게 하는 허무주의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자들을 보면, 이 세상은 정말 눈 멀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가장 인간다운 반응은 눈물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죽음에 대해서 우셨습니다. 더 말이 필요합니까?


-와서 보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이 질문을 잘 기억해둡시다. 똑같은 질문을 나중에 마리아가 한 번 더 받게 될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와서 보십시오.’


  Come and see. 이 말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요한을 처음 만난 날, 건내신 말이 바로 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와서 보라”라는 이 말을 듣고, 요한과 베드로와 형제 지간인 안드레는 예수와 함께 먹고, 함께 다니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요한복음 1:38) 

  그런데 이번에는, 요한을 예수께로 인도한 그 말을, 사람들이 예수께 합니다. 사람들은 시체 썩는 냄새로 진동할 무덤을 가리키며 예수께 말합니다. “Come and see." 즉, 죽음을 보라는 것이죠. 이 날은 죽음의 나흘째 날이었습니다. 당신도 어찌할수 없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초대한 예수와 다르게, 사람들은 예수를 가장 끔찍한 자리로 모셨습니다.


  그 ‘와서 보라’는 말에 예수께서는 다시 눈물을 터뜨리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죽음에 이른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절망입니다. 마르다도, 마리아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에 꺽여, 소망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는 통곡하셨습니다.

  사람들 마저도 탄식합니다. 


“그래, 그는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했잖소? 이 사람이 죽지 않게 무엇인가 할 수 없었단 말이오?”


  눈 먼 사람을 뜨게 했으면서,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단 말이냐! 가정법 과거완료죠. 이미 과거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반대를 가정하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가 알고 있고, 다른 경우를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와 함께 '와서 본 것'은, 죽음 앞에서 손 쓸 수 없음. '죽음을 피할수만 있었다'면 하는 후회. 더불어, 죽음의 강력함에 대한 강력한 인정.



4. 4를 깨뜨리는 3



-오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죽음에 저당잡힌 사람들에 대한 마음 속 깊은 고통을 가지고, 예수는 무덤에 왔습니다. 그리고 봤습니다. 저세상 입구와 같은 무거운 돌이 나사로와 사람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을. 

  그런데 이 사람, 사람들에게 그 돌을 치우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마르다가 말립니다. 이 마르다는 죽은 사람의 누이입니다. 누구보다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르다, 앞서 예수를 오는 시대를 가져올 메시아로 인정한 그녀도, 그 오는 시대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와 친밀한 그녀도 이러한데, 다른 유대인들은 어떠했을까요) 그 오는 시대가 어떠한 시대인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나흘째에 살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강력함에 눌려 있는 그는, 다른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채, 예수의 앞 길을 가로 막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영광은 드러남입니다. 억측이 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죽음의 나흘째 날. 그러나 이 나흘째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틀을 일부러 머물렀던 이 남자는 정확히 사흘째에 나타났고, 그리고 지금. 이 생명의 사흘이, 죽음의 나흘을 깨뜨릴 것입니다. 4보다 3이 큰 것은 미취학 아동들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는 3은 4를 뒤집을 것입니다. 억측. 이 억측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리고 이것이 오는 시대입니다. 마르다에게 말했던 것과 같이, 현시대가 끝나고 오는 시대가 옵니다. '올것입니다'가 아닙니다. 그 시대는 현시대가 담을 수 없는 시대. 현시대의 발전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시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시대. 그 3의 시대가 4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했던 사람으로부터.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설사 죽더라도 살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느냐?”


  세상에!


-새로운 시대로 걸어나온 사람과 그를 보는 사람들

  무덤문이 열립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왜냐하면 냄새가 나지 않았거든요. 예수께서는 대번에 아셨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썩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무덤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사실은 지금 예수의 주변에 있는,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어야 하는 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표적을 예수를 통해 이뤄주셨습니다. 즉, 예수의 감사의 내용은, 주위에 둘러선 무리였습니다. 이들이 진실을 보게 되어 감사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기 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서 밝혀집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사실 너희를 위해서,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게 기쁘다. 

너희 믿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그에게 가자.”


   표적입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 이 표적들이 일어났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우리는 이제 하나의 표적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신 예수는 크게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나와라!”


  요한은 재치있게 다음 구절을 기록합니다. “그러자 죽은 사람이 나왔다.” 

  죽은 사람이 나오는 시대. 죽음으로 들어갔던 이가 이제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시대가 옵니다. 그 시대가 오는 시대요, 예수로 인해 시작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마르다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바로 그 오는 시대입니다. 요약하자면, '지금 벌어지는, 죽음의 정복'. 

  이 표적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의 의미. 지금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2000여년이 지난 오늘 저는 이 장면에서 역사의 큰 그림을 봅니다.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부활 이야기의 실체를 봅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현시대, 그 현시대는 죽음이 지배하는 ‘나흘째’의 시대. 그 시대 위에 인자가 오셨고, 그 인자를 통하여, 현시대로부터 오는 시대로 나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이 사람이 죽음으로부터 일어나 걸어 나오는 시대를, 보여주고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치밀한 준비. 그리고 다음 주에 벌어질 그 일의 완성.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아직 남았다. 물질의 변화

  지금 무덤가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스스로 걸어 나오는 엄청난 사건을 목격했으니까요. 그러나 아직 요한복음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을 때,


 그의 손과 발은 세마포 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천으로 싸매여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번째 표적의 언어로 말하자면, 아직,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변화, 즉, 아직, 새로운 몸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사로의 사건으로는 하늘과 땅의 결혼식이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는 살아났지만 다시 죽을 것입니다. 다시 잠들 것입니다. 

  물질의 변화가 있을 때, 세마포 끈도, 얼굴의 천도, 사람을 묶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을 때, 우리도 비로소, 비아냥이나 조소가 아닌, 진실함으로, 도마가 앞서 했던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가자. 우리도 그와 함께 죽자.” 




5. 에필로그



  그리고 이 여섯 번째 표적이 있은 후, 이 소문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해서 물었다.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소?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고 있으니 말이오. 그를 이대로 두면, 모두가 그를 믿게 될 것이오!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강탈할 것이오!

  그들 중 하나인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소! 당신들에게 가장 유익한 일이 이것이오. 곧 민족 전체가 없어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 죽도록 하는 것이오.”


  죽은 자가 살아났는데, 예수를 믿기는 커녕, 나사로와 묶어서 죽일 공모를 하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정점에 앉아, 자신들이 별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서 전전긍긍할 때, 자신들의 생존이 제1의 목적일 때, 한편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모여, 최근 창작하신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제목은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예수의 곁에는 이 이야기를 가장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과 함께 배꼽을 잡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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