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표적 : 

혼돈 속 혼돈 속 혼돈 속의 인자





0. 서론 : 다리 만들기

-요한복음의 서론(1:1~18)과 결론


1. 변화된 물질, 다시 만나는 하늘과 땅

 

2. 그의 가치 : 죽음을 이기는 것

 

3. 그의 시간, 이제 일을 시작할 때

 

4. 찢기는 몸, 넘치는 생명

 

5. 혼돈 속 혼돈 속 혼돈 속의 인자

 

6. 예고편 : 죽음에서 일어난 사람

 

7. 모든 기적들은 이 빈 무덤을 가리키고 있었다.

 

 


0.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봅시다. 저번 주, 우리는 요한이 오병이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오병이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산산조각내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께서 벌이신 신기한 마술과 같은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다른 시간의 차원, 즉, 현 시대와 오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것을 가져오는 자, 인자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그 새 시대를 가져오는 인자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찢기는 생명의 빵.


  그리고 해석된 오병이어는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표적들은 사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첫번째 표적에서, [변화된 물질]과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는 역사의 최종 그림을 확인했습니다. 신하의 아들 이야기에서는 [예수의 가치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예수의 가치는 죽음을 이기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뎃스다 연못에서는 안식일과 두 개의 시간표를 배웠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베뎃스다의 두 가지 시간표가, 바로 오병이어의 현시대와 오는 시대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건을 종합하여 역사의 캔버스 위에 하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 다섯번째 표적을 만날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오병이어는 하나의 큰 이야기 속에 서문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병이어만 읽고, 그것을 자신의 입맛대로 표적을 이해하는 것은, 예수를 덱소마이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한 사건 중심으로 본문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 사건은 대단히 깁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표적들은 계속 분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단 12절인 것을 생각하면, 이어지는 표적 이야기의 분량들은 가히 폭발적으로 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내용이 길어짐에 따라, 그 안의 내용들도 더 입체적입니다. 그러나 길어지더라도 지치면 안됩니다. 한 사건. 오늘 시각 장애인이 눈뜬 이야기도 한 사건 전체를 조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리 본문을 드렸습니다. 분량이 많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지금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선은 내용 중심으로 문단을 나눠보았습니다.


요한복음 9:1~10:42


1.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다. "선생님, 누구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까? 그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 보이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아직 낮일 때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고 있는데,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침으로 진흙을 개셨다. 예수께서 진흙을 그 남자의 눈에 바르시며 말씀하셨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는 가서 씻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볼 수 있었다.

  그의 이웃 사람들과, 그가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여기 앉아서 구걸하던 그 남자가 아니오?"

  그중에는 "맞소,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와 비슷한 사람이 뿐이오"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직접 "그렇소. 내가 그 사람이오" 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소?"

  그가 대답했다. "예수라 불리는 사람이오! 그가 진흙을 개서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했소. 그래서 가서 씻었더니, 볼 수 있게 되었소!"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소?" 하고 물었다.

  그는 "나는 모르오"라고 대답했다.


2.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었던 그 남자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다.(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가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그 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 내가 씻었더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 중 일부가 말했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을리가 없소.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소!"

  다른 사람들이 대답했다. "그럼,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할수 있다는 말이오?"

  그들은 서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눈 멀었던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겠소? 어쨌든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소?"

  그가 대답했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눈이 멀었다가 이제 보게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새롭게 눈을 뜬 그 남자의 부모를 불러다가 그들을 심문했다. 

  "이 사람이 정말로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당신들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그의 부모가 대답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정말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다 큰 사람 아닙니까. 그가 자기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 사람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들은, 만약 누구든지 예수가 메시아라고 전하면 그들을 회당 밖으로 내쫓기로 이미 결정한 터였다. 그런 이유로 그의 부모는 "그는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


3.

  이에 그들은 전헤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임을 알고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전부는 전에 내가 눈이 멀었다가, 이제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었다. "그가 네게 무슨 일을 했느냐? 그가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했느냐?"

  그 남자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당신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다시 듣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들이 비웃었다. "너는 그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허, 아주 이상한 일이군요!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데, 그는 내 눈을 뜨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귀를 기울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은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더면, 아무 일도 못했을 겁니다."

  그들이 대답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죄인으로 태어난 주제에, 감히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 그들은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


4.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들으셨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너는 인자를 믿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굽니까? 제가 그분을 믿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바로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네 선생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예수께 절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바리새인 중 일부가 가까이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눈이 멀었다는 말이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차라리 너희 눈이 멀었더라면, 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너희가 '우리는 볼 수 있다'라고 말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


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줄 것이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밖으로 데려간다. 자기가 소유한 양을 전부 밖으로 데려간 뒤에, 목자는 양들보다 앞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달아날 것이다. 양들이 낯선 사람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내 앞에 온 사람들은 전부 도둑이고 강도였다. 하지만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거쳐서 들어가면 안전할 것이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그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러 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 그렇다, 넘칠 만큼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런데 삯꾼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목자도 아니고 양의 주인도 아니다. 그는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려두고 달아날 것이다. 그러면 늑대가 양들을 물어가고 흩어 놓을 것이다. 그는 한낱 삯꾼에 불과하기에 달아날 것이고, 양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 또 내게는 이 양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하고,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한 양떼가 되고, 한 목자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있다. 내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 그것을 내놓기 때문이다.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그것을 내놓을 권리도 있고, 다시 찾을 권리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 받은 명령이다. "


6.   

예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유대 사람들 사이에 다시 분열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그는 귀신 들렸다! 완전히 미쳤다! 왜 그의 말을 듣는가?" 하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이것은 귀신 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어떻게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말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성전봉헌절이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솔로몬의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물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의혹하게 하실 겁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당당하게 말하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말했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에 대해 증언한다. 하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내 손에서 가로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훨씬 크시고, 아무도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가로챌 수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7.

유대 사람들은 또다시 예수를 치려고 돌을 집어들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여러 선한 일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유대 사람들이 대답했다. "당신을 돌로 치려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신성모독 때문이오! 이보시오. 당신은 한낱 사람에 불과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율법에, '너희는 신들이라고 내가 말했다'라고 쓰여있지 않느냐? 자,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부른다면(너희는 성경을 제쳐둘 수 없다), 아버지께서 따로 구별하여 세상에 보내신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 한들, 어떻게 너희가 그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할 수 있느냐?

  행여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하지만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다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까스로 그들에게서 벗어나셨다.

  

  예수께서 다시 요단 강을 건너가서, 처음에 요한이 세례를 주던 그곳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셨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왔다.

  그들이 말했다. "요한은 단 한번도 표적을 보여 준 적이 없소. 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서 했던 말은 모두가 참이었소."

  많은 사람이 거기서 예수를 믿었다.


7개의 문단을 재구성해서, 이 본문이 전달하는 바가 무엇인지 발견합시다.



1. 혼돈 속 혼돈 속 혼돈



  우선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혼돈’입니다. 


-시각 장애인의 만난 혼돈 : 죄는 어디에서?

  혼돈 속에 있는 한 남자. 이 남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앞을 볼 수 없는 혼돈 속에서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누군가는 부모의 죄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불교에는 카르마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즉, 전생에서의 죄가 오늘 현실에서의 고생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업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이 카르마에 대한 생각은 불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만연해 있는 인류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는 2009년. 제가 처음으로 전도사 사역을 나갔을 적, 저는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고, 초파일이었습니다. 의미심장한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날짜를 분명히 기억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그 다음날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어느 노숙자 할아버지 한 분과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논쟁 중이었습니다. 제가 가만 들어보니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집사님은 노숙자 할아버지를 향해, 당신이 하나님께 잘못을 했으니, 이러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 할아버지는 (이 답변이 제 온 몸의 털을 곤두서게 했습니다) “시각 장애인의 시각 장애인됨은 그 사람이 죄가 있어서나, 그 부모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 써있는데, 집사님이 어찌 그리 말하시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적실한 인용에 저는 감탄하여, 그 싸움판에 끼어들어 그 할아버지의 손목을 붙잡고 교회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사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이래 되셨냐고 물었습니다. 사연은 이러합니다. 그 할아버지는 쌀집 사장님인 나이 65세의 이완식씨입니다.(지금은 일흔이 다 되셨겠네요) 쌀 배달을 나가는 도중, 이 할아버지 뒤를 트럭이 덮쳤습니다. 전신마비가 3년 찾아왔습니다.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이, 부인과 자식들은 재산을 정리해서 사라졌고, 적반하장으로 할아버지 자신은 명예훼손으로 고발이 된 상태였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누워있는 동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있다면, 저를 일으켜달라고. 그리고 거짓말같이 이 할아버지가 전신마비에서 깨어나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몸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한 쪽 팔과 한 쪽 다리가 불구가 된채. 그렇게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살게 해주신 하나님 은혜가 고마워서, 노숙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하루하루를 사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왜 이완식씨에게 사고가 생겨서, 전신마비가 3년이나 찾아오는 혼돈이 닥쳤습니까?” 다시 말하면, “오늘날 왜 악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카르마를 말했습니다. 전생의 업보. 그것이 사람을 짓누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병이 있거나, 가난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천대하는 못된 전통이 생겼습니다. 다음 생애에는 양반으로 태어나야겠다는 헛된 소망도 여기에서 생긴 것입니다. 최근에는 영국 국가대표 축구단 대표가 공식석상에서, 선천적 결함과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말했다가 언론과 장애인 단체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완식 씨가 말했듯,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오늘날 겪는 악의 문제는 카르마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만난 혼돈 : 안식일은 무엇인가?

  혼돈은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개인에게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도 그 혼돈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눈이 멀었던 남자는 예수로 인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눈에 흙을 침에 짓이겨 눈에 바르셨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남자는 그대로 했고, 씻고나서 돌아왔을 때,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의 안구는 최초로 빛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눈을 떴을 때, 그것은 축하와 기쁨의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두 번이나 끌려가서 심문을 당해야 했고, 그의 부모조차 두려움에 떨며 아들의 시력이 되찾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할 뿐입니다. 


  왜 였을까요? 왜 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쁨이 될 수 없고, 문책 당하고, 여기저기 끌려가야 하며, 부모조차도 손사래를 치는 일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입니다. 바로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득이하게도, 예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왜 하필 안식일이었을까요? 생각해보니 베데스다 연못의 중풍병자가 일어난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38년 동안이나 주저 앉아있었는데, 마침 일어나보니 안식일입니다. 왜 그 사람은 자꾸 안식일마다 일을 벌이는 것일까요? 혹시 그는 안식일에 일부러 사람들을 고쳐주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위험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목숨처럼 지키는 법규였습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율법이자, 이방 민족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고, 로마의 핍박 아래서도 그들을 결집시키고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민족 정체성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유대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율법의 외인, 게다가 민족 반역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것을 그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부모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와서 어떻게 이 사람이 눈을 떴느냐고 다그칠 때, 이 부모는 기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 하필 안식일이란 말인가!’ 


  이 말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창조를 축하하는 안식일,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누리는 안식일이, 중풍병자가 일어날 수 없는, 시각 장애인이 눈을 뜰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도, 심지어 자기 아들이 시각 장애인인 부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러한 혼돈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바로 생존입니다. 이 생존 때문에, 아들이 병 고침을 받았음에도, 부모는 마치 경찰에게 걸린 범인 마냥 떨고 있습니다. 만약, 이 일과 자신들이 연루된다면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하는 사람을 회당 밖으로 내쫓기로 이미 결의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회당은 유대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을 예수가 눈 뜨게 해줬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이 아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물입니다. 그래서 이 가족은 떨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이 집안의 생존에 크나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 규정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려고 했던 이 민족 역시, 안식일을 목숨 걸고 사수해야 했습니다. 생존입니다. 이들이 지금 찾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모세. 로마의 속박에서 구해줄 모세. 그리고 그 모세가 아니라면 메시아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는, 여기 안식일마다 병자를 고쳐주는 사람은 눈엣 가시일 뿐입니다. 


-이미 전 지구가 혼돈 속에

  그리고 눈을 들어 조금 더 큰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이미 창조 전부터 이러한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인의 삶에, 공동체의 삶에, 그리고 전지구적인 삶에, 이 혼돈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거짓에 덮이고, 사람의 회복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며,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어둠이 이 지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2. 빛이 있으라

 

-창조와 빛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빛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지만, 성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혼돈은 질서로, 공허는 의미로, 흑암은 몰아내버리는 빛의 존재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빛에 의해서 창조는 시작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창조를 다시 망가뜨리려는 거대한 혼돈의 움직임이 벌어졌습니다. 그 움직임은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을 점령했고, 그 결과, 질서 위에 다시 혼돈이, 의미 속에는 무의미가 섞여 들어가고, 빛으로 창조된 세상 속에 어둠이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두운 세상 속에 한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는 태어나자마자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전생에 업보가 있어서? 그의 부모가 악인이라서? 아닙니다. 예수는 이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로부터 2000여년이 지나 완식이 할아버지가 2009년 초파일 인용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 보이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남자에게 어떤 하나님의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는 것이, 요한이 의도한 이 본문의 해석일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이 시각 장애인에게도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시각 장애인의 눈에 진흙을 침과 섞어서 바르셨습니다. 눈을 뜨게 해줘도 모자를 판에, 눈에 붙어있지 말아야 할 것을 붙였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눈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이 남자를 바로 고쳐주지 않고, 멀리 떨어진 실로암 연못으로 보냈습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이 시각 장애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머릿 속부터 혼돈 아니었겠습니까? 눈꺼풀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을 가지고, 그는 더듬더듬 실로암을 찾아 갔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마침내 실로암에 도착했습니다. 물가에 엎드려 얼른 눈에 붙은 진흙들을 씻어냅니다. 그는 애써 눈에 진흙을 달고서 힘겹고 거친 길을 걸어왔습니다. 내가 뭐하고 있나 싶지만, 그럼에도 믿고 그 길을 더듬어 왔습니다. 믿음없이는 걸을 수 없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로암의 물을 퍼다 눈을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시력이 혼돈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붙어 있던 진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일부러 눈에 붙여주신 그 진흙들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다섯 번째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행위들은 모두 의미가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만약 그저 이것이 뜻없는 기적이었다면, 실로암은 제2의 베데스다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 표적이 새창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눈에 진흙을 붙이고도 보인다 말하는 사람들

  진흙을 붙이고 움직이는 이 남자는 마치 이스라엘을 닮았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눈 위에 진흙까지 붙여놓고 있으니 꼴이 더 가관입니다. 보이지 않는 눈이 더욱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마 길거리에서 그를 보는 사람들은 눈에 진흙이 붙은지도 모른다며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오해했습니다. 안식일은 일종의 표지판이었습니다. 진정한 쉼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 말입니다. 이 땅에서 물질이 변하고, 하늘과 땅이 만나기 전까지는 진정한 쉼은 오지 않습니다. 타락으로 찾아온 죽음이 뒤집히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버스 도착 시간 알림판에 집착하느라 버스를 놓쳐버린 사람처럼, 이스라엘은 눈 앞에 새시대의 버스가 왔는데도 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밀이었습니다. 물질의 변화, 하늘과 땅의 만남, 죽음을 뚫고 아들의 다시 살아남, 그 전에 죽임당하는 인자, 그 인자의 방식으로만 얻는 영생. 그러나 생존에 얽매여 눈에 진흙을 잔뜩 바르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진리를 본다 말합니다.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다 팽개치고, 로마와 한판 붙으려는 사상 교육에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면서도 자신들이 진리를 본다 말합니다. 바로 눈 앞에 와있는 빛을 알아보지 못할만큼 눈이 멀었음에도 자신들이 진리를 본다 말합니다. 그러나 빛을 감지할 수도 없을만큼 철저하게 망가진 시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본다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다섯 개의 표적이 지나갔지만, 그들이 키우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적개심이요, 자기 밥그릇을 빼앗을 것 같은 자에 대한 살인의지입니다. 죄는 점점 이들의 눈에 진흙처럼 붙어서, 이 엄청난 비밀에 대해서 감조차 잡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

  다섯 번째 표적의 키워드는 바로 빛과 새창조입니다. 예수는, 그리고 요한은, 이 다섯 번째 표적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타락을 뒤집는 새로운 창조. 그러나 기존에 있던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던, 불완전하고, 망가졌고, 보이지 않고, 병들었던 것들이 완전해지고, 고침받고, 보게 되고, 새롭게 됩니다. 이 일이 마침내 벌어질 것이라는 게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혼돈의 세상 속에 다시 새창조의 빛이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이미 시작된 그 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시간표입니다.



3. 인자 = 양의 문 = 선한 목자 


  이 시각 장애인이었던 남자는, 이스라엘에 의해 두 번의 심문을 당하고, 다음의 판결을 얻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인으로 태어난 주제에 감히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 그리고 결국은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 그를 만나십니다. 이 남자가 눈을 뜨고, 예수를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만남, 눈 뜨고는 첫만남에서 예수께서 대뜸 물어보시는 것은 이러한 질문이었습니다.


“인자를 믿느냐?”


  이 시각 장애인은 지금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인 취급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눈이 낫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취급 받아 쫓겨났습니다. 심지어 부모는 자기 아들과 얽히기 싫어합니다. 당시에는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장애인인데, 벌어둔 돈이 있겠습니까? 갈 곳이 있겠습니까? 그는 진정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는 한 가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실로암으로 보냄받은 그 순간부터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도 그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던 것. 어떻게든 더듬더듬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던 그것. 믿음입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혼돈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빛이라 주장하는 이 사람을 통해서 그 혼돈이 질서로 새롭게 창조될 것에 대한 믿음.


“선생님, 그 분이 누굽니까? 제가 그 분을 믿고자 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바로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 대답합니다.

“네 선생님, 제가 믿습니다.”


  인자.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아들. 이 땅의 악의 문제를 심판할 심판자.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할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 자신. 그는 그렇게 예수가 인자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결국 보지 못하는 자는 새창조의 주인을 보게 되었고, 본다고 말하는 자는 그 예수를 통해 새창조가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가 인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역설이, 이 장면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유명한 비유. 양과 목자에 대한 비유.


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줄 것이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밖으로 데려간다. 자기가 소유한 양을 전부 밖으로 데려간 뒤에, 목자는 양들보다 앞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달아날 것이다. 양들이 낯선 사람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 역사의 맥락을 적용하면, 우리는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인자라는 사실에 대한 부연으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인자는 심판자입니다. 여기서 양은 심판에서 옳다 인정받는 사람들이고, 그 심판은, 세 번째 표적에서 확인했듯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지금, 이뤄지고 있음을 염두하고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엄중하게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내 앞에 온 사람들은 전부 도둑이고 강도였다. 하지만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거쳐서 들어가면 안전할 것이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그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러 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 그렇다, 넘칠 만큼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


  도둑이나 강도는 혁명가를 지칭하는 말이요, 혁명가가 하자고 하는 것은 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곧,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런데 삯꾼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목자도 아니고 양의 주인도 아니다. 그는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려두고 달아날 것이다. 그러면 늑대가 양들을 물어가고 흩어 놓을 것이다. 그는 한낱 삯꾼에 불과하기에 달아날 것이고, 양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 또 내게는 이 양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하고,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한 양떼가 되고, 한 목자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있다. 내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 그것을 내놓기 때문이다.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그것을 내놓을 권리도 있고, 다시 찾을 권리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 받은 명령이다. "


  선하다는 말은,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함은 ‘절대적으로 옳은’ 이라는 의미요, 곧 신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선한 랍비여’라고 불렀던 부자 청년에게 그것이 잘못이라 지적하신 것입니다.(랍비는 사람이므로, 선할 수 없습니다) 이 절대적으로 옳은 목자는 곧 하나님의 목자입니다. 이 하나님의 목자는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돈을 위해서 고용된(누구에게 고용되었을까요?) 목자와는 다른 점입니다.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은 포기나 낙담이 아닙니다. ‘다시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얻는지는 여러분들이 이제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6.   

예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유대 사람들 사이에 다시 분열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그는 귀신 들렸다! 완전히 미쳤다! 왜 그의 말을 듣는가?" 하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이것은 귀신 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어떻게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위의 선한 목자에 대한 비유가, 인자에 대한 설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건져내고 로마를 박살낼, 슈퍼맨 같은 인자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에게 인자가 죽임당할 것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기대를 산산조각내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자신이 인자, 즉,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는 양을 돌보는 목자라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악할만한 것이었습니다. 



4. 성전이 봉헌될 것이다. 요한의 말처럼


  예루살렘에서는 성전봉헌절이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솔로몬의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물었다.


  이 날은 게다가 성전봉헌절이었습니다. 성전봉헌절은 마카비 형제들이 시리아의 지배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왕조를 회복시킨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왕인 안티오코스 4세는 이스라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밀어넣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것에 분개한 마카비 형제들이 시리아를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하나님께 봉헌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마카비 혁명을 기대했습니다. 로마를 몰아내고, 다시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눈에 붙은 진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우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혁명 이후에, 세상의 모든 혼돈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느냐? 타락이 뒤집히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느냐? 그것은 진정한 출애굽이 벌어진 것이냐? 아브라함 언약이 이뤄진 것이냐? 온 세상에 하나님의 왕되심이 선포된 것이냐? 하늘의 뜻이 온 땅에 이뤄진 것이냐?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고집스럽게 혁명과 생존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들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들을 실로암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자신을 믿고, 길을 더듬어서라도 그 곳에서 눈을 씻으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할 진정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도 속하고 땅에 속하는 새로운 물질. 한 지역에 묶인 것이 아닌, 자신의 몸을 찢어 성령으로 세상을 채울 한 사람. 그로 인해 세상 전체, 구석구석이 모두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임을 알게 될 것이고, 이것이 마침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성전으로 봉헌되기 위해 이 땅에 온 자. 그가 바로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의혹하게 하실 겁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당당하게 말하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말했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에 대해 증언한다. 하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내 손에서 가로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훨씬 크시고, 아무도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가로챌 수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빛이신 하나님이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은, 요한복음 서문에 등장하는 한 문장을 떠오르게 합니다.


“참 빛, 곧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세상에 왔다. 

그는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를 통하여 지음받았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7.

유대 사람들은 또다시 예수를 치려고 돌을 집어들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여러 선한 일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유대 사람들이 대답했다. "당신을 돌로 치려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신성모독 때문이오! 이보시오. 당신은 한낱 사람에 불과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율법에, '너희는 신들이라고 내가 말했다'라고 쓰여있지 않느냐? 자,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부른다면(너희는 성경을 제쳐둘 수 없다), 아버지께서 따로 구별하여 세상에 보내신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 한들, 어떻게 너희가 그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할 수 있느냐?

  행여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하지만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다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까스로 그들에게서 벗어나셨다.

  

  예수께서 다시 요단 강을 건너가서, 처음에 요한이 세례를 주던 그곳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셨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왔다.

  그들이 말했다. "요한은 단 한번도 표적을 보여 준 적이 없소. 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서 했던 말은 모두가 참이었소."

  많은 사람이 거기서 예수를 믿었다.



  이것이 시각 장애인이 시각 장애인 된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만약, 요한복음의 서문대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한 빛이라면, 모든 사람은 그 빛으로 인해 새롭게 창조될 것입니다. 혼돈에서 출애굽 될 것입니다. 당신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그 창조가 시작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세례요한이 말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봉헌될 때. 그리고나서 3일뒤, 물질은 변하고, 하늘과 땅의 결혼이 이뤄질 것이며, 아들들은 살아나고, 이것이 인자를 통해서 이뤄졌으며, 이뤄질 것을 믿는자들에게서 새창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새창조는 부활로 완성될 것입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빌립보서 1:6,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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