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표적 : 

그의 가치,

죽음을 이기는 것




0. 서론 : 다리 만들기

-요한복음의 서론(1:1~18)과 결론

 

1. 변화된 물질, 다시 만나는 하늘과 땅

 

2. 그의 가치 : 죽음을 이기는 것

 

3. 생존에서 생명으로

 

4. 찢기는 몸, 넘치는 생명

 

5. 혼돈 속 혼돈 속 혼돈 속의 인자

 

6. 예고편 : 죽음에서 일어난 사람

 

7. 모든 기적들은 이 빈 무덤을 가리키고 있었다.

 

 

0.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예수에 대해서 소개하는 글입니다. 요한은 문학적 기지를 발휘하여, 일곱 개의 기적을 중심으로, 자신이 목격한 예수에 대해서 풀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이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그 예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 첫 번째 기적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 안에는 인류 전체의 역사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물질이 새롭게 되는 2000년전 그 사건,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오늘 우리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그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연구 않는 것은 너무도 단편적이고 아쉬운 태도입니다. 성서 전체의 맥락 위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표적들은 마치 원근법의 소실점과 같습니다. 역사의 여러 선들이 모여, 그것의 목표, 의도, 의미가 되는 한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이 모든 것을 요한이 의도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목격자 요한의 복음서. 읽을만 합니다. 탁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어서 요한이 기록한 두 번째 표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부터 읽어봅시다. 


신하의 아들(요한복음 4:43~54)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지내신 후,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친히 증거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시자 갈릴리 사람들이 환영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는데, 이는 그들도 그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로 다시 가셨으니, 그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가버나움에 왕의 신하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병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께 와서, 자기 아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가버나움으로 내려와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표적과 기적을 보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신하가 대답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는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하인들을 만나서, 그의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전갈을 들었다.

  그는 종들에게 언제부터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어제 오후, 한 시입니다. 그때 열이 내렸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예수께서 “아들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순간에 그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그도 믿었고, 그의 식구들도 전부 믿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오신 뒤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다.




1. 이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 


  오늘 본문의 소실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난 역사의 선분들을 확인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멀리서 날아오는 두 개의 선분을 보여줍니다.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지내신 후,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친히 증거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시자 갈릴리 사람들이 환영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는데, 이는 그들도 그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사마리아에서 이틀 지내실적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사건입니다. 



1)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지내신 사건(요4:1~42)


  먼저 바로 앞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요약해봅시다. 지금 이 지면에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핵심적인 사항 두 가지를 언급해야 합니다. 하나는 사마리아 인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가장 끔찍한 이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순수한 혈통을 지는 자신들이 정통이라 생각했고, 그 옛날 앗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가 혼혈이 되어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 야곱, 이삭이라고 주장했으나,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두 번째로, 바로 그러한 사마리아, 즉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포로 출신들의, 유대인들이 함께 그릇쓰는 것조차 거절했던 그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2) 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벌이신 사건(요2:13~25)


  예수께서 명절, 즉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성전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성전 업무를 일순간 마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세우겠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발언이 메시아와 관련된 발언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해야 할 일의 목록에는, 이방 제국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게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마카비 형제들이 시리아를 몰아낸 이후 했던 일도 성전을 다시 봉헌하는 일이었고, 헤롯도 이것 때문에 제2성전을 리모델링했습니다. 메시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성전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운다' 는 말은 성전을 새롭게 하겠다는 발언, 바로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발언입니다. (4. 기억된 역사 -성전과 메시아 참조)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니, 이 광경을 예수님의 고향 사람인 갈릴리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환영과 존경의 차이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지내신 후,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친히 증거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시자 갈릴리 사람들이 환영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는데, 이는 그들도 그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로 다시 가셨으니, 그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유대인이 경멸하던 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는 유대인에게로 돌아오십니다. 그것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친히 증거 하십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어?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이번에는 빗나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모두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 성전에서 예수를 보고, 그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 주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를 환영한다는 것은, 이 고향 사람들 역시 예수를 메시아라 생각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바로 그 곳입니다. 


  이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민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원어 성경을 펴들고 단어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곱씹어봤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말하고,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존경과 환영은 다른 것이 아닐까?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사전에 보니, 존경은 희랍어로 ‘티메’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직역하면, “선지자는 고향에서 티메를 갖지 않는다”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티메는 무슨 뜻일까하여, 다시 사전을 뒤졌습니다. 사전에 티메는, ‘가치 있는 것이 가시화되기 위해 지불되는 것’이라 나와있습니다. 다른 뜻으로는, ‘존경’, ‘예배’, ‘경배’가 있습니다. 아, 머리 속이 정리되었습니다. 즉, 어떤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가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어떤 행위를 가리켜서 티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에서는 티메가 없다. 즉, 예수님의 고향에는,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여, 그에 합당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분명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거든요? ‘환영’이라는 단어도 찾아보니, 이 단어는 ‘덱소마이’입니다. receive라는 뜻입니다. 즉,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즉 예수님의 말씀을 사전적 정의에 따라 풀어보면, 지금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 입니다.


  가치를 모르면서도 열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고향 사람들은 예수가 어떤 메시아인지, 그가 정말 귀한 이유가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바랐던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였습니까? 제국을 박살내는 메시아, 로마에게서 해방을 가져다주는 메시아, 유대인들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에게 열광합니다. 나중에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환영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합당한 태도. 티메는 아니었습니다. 존경이 아닙니다. 예배가 아닙니다. 그저 환대일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생각한 예수를 만들고, 그 예수에게 열광합니다. 곧 자신의 욕망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 실제 예수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헌 신짝 버리듯 그 예수를 버릴 것입니다. 아니, 죽일 것입니다.


  그래서 환영과 존경은 다릅니다. 환영은 내 생각입니다. 존경은 그의 생각입니다. 그의 생각, 그의 가치에 따라 나를 바꾸어, 그 새로운 생각과 가치에 맞추어 내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에 대한 바른 태도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존경입니다. 


  존경하기 전에 환영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환영했다하더라도, 결국 존경으로 나가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가치를 모르고 그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도, 필연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예수를 깨뜨리고, 진짜 예수를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 부릅니다. 어릴적부터 교회의 문화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교회의 주인되신 분의 가치를 모르는, 많은 모태신앙들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3.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표적

  


  가버나움에 왕의 신하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병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께 와서, 자기 아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가버나움으로 내려와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표적과 기적을 보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본문은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왕의 신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다시 한 번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표적과 기적을 보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왜 예수께서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앞쪽에서 예수를 존경하지 않고 환영하는 고향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치, 그것은 죽임당하고 살아나는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지금 고향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니 바랄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추구하던 가치를 그대로 예수께 뒤집어 씌우고는 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표적과 기적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저 예수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수 없습니다. 이미 사람들은 예수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의 목적은 다른 데 있씁니다. 바로, 예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표적'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목적은 교육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보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현장학습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왕의 신하에게 벌어진 기적을 해석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이 기적 속에서 예수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에 따라 우리의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하가 대답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그 사건은 참으로 짤막합니다. 아들의 아버지는 지금 두려워합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살펴왔던 것입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아들이 죽을 까봐 전전긍긍하는 아버지는, 예수께,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간청합니다. 아마, 그의 머리 속에는 그 대단한 예수조차도 죽고 나서는 손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저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라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지금 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가나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그 지역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같이 가버나움으로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가버나움으로 가지 않으시는 예수가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나 가버나움이나 갈릴리 호수 근처리고,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한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곳 가버나움에는 예수님의 집이 있습니다. 우리가 갈릴리 본부라고 말하자했던 지역이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 곳은 가깝고, 예수님은 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순회사역을 하셨기에, 예수님이 가셔야 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그 가버나움에 안가십니다. 그 아비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지척에서는 자기 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에 병상에 누운 아들을 집에 두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단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 그래? 그럼 가서 얼른 고쳐주마’ 하시지 않고, 그 가까운 곳에 죽어가는 아들에게 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그저 돌아가라고, 네 아들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거 울화통 터지는 일입니다. 만약 예수도 죽음에 패배한다면 말입니다.




4. 죽음을 피하는 예수인가?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인가?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러나 그 아들의 아비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라 말씀하셨을 때, 니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여기서의 ‘믿고’는 고향 사람들의 환영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전에 아들의 아비가 무엇으로 걱정하고 괴로워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예수가 오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오지 않으셨고, 아들은 죽지 않고 살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비는 이것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비가 생각을 고쳐먹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예수를 재단하고 평가했던 고향 사람들과는 달리, 그 아비는 정말 예수를 티메했습니다. 존경했습니다. 예배했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예수의 판단에 맡겼습니다. 그 판단은, 예수의 말씀이 죽음을 이긴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그는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하인들을 만나서, 그의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전갈을 들었다.

  그는 종들에게 언제부터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어제 오후, 한 시입니다. 그때 열이 내렸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예수께서 “아들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순간에 그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그도 믿었고, 그의 식구들도 전부 믿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의 말씀, 죽음의 이김. 

  그가 하인들을 만나서,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어떠했겠습니까? 기뻐 춤추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춤추기 전에, 언제부터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는지부터 묻습니다. 이것은 그도 반신반의 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아들에게 찾아올 죽음을 물리치실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길을 돌아섰으나, 그럼에도 그 마음에는 온갖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전해준 기쁜 소식을 듣고는 곧장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나았어?” 그리고는 자신이 믿었던 것이 정녕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그 메시아 예수는, 말씀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역전시키는 그러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가치입니다. 


  예수는 죽음을 피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돌파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는 고난을 피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고난 끝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새생명을 가르치십니다. 로마를 작살내서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해주고(로마의 생존은 파괴하고), 유대인들만의 옳음을 증거할(다른 민족들은 틀렸다고 정죄할) 메시아는 진짜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고, 그러한 메시아를 추종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메시아에게 투영하고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왕의 신하의 아이를 고쳐주시며, 그 사건을 통해 우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는 메시아. 오히려 죽음을 정면 돌파하는 메시아.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를 환영했으나, 예수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는 그러한 예수의 가치를 인정하고, 합당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아닌 메시아의 가치를 믿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본문에서 티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병들인 아이의 아비뿐입니다. 믿고 움직인 결과,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모두가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된 모두 역시 마침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에피소드를 마무리 짓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오신 뒤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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